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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Aug 01. 2021

퇴근길, 유럽에서의 플렉스를
원한다면

나만의 비밀스러운 나라를 찾고 있다면 ② 우크라이나


나에게는 옛 소련 국가(CIS)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우울한 날씨 속 무채색의 건물과 도시 풍경, 그곳을 걷고 있는 큰 키의 모델 같은 사람들은 왠지 도도하고 차갑게만 보였고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에 근심 걱정도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또한 별다른 기대 없이, 여행 경로에 있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방문하게 된 나라였다. 그런데 어쩌다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길게 체류하게 되면서 조금씩 이 나라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나를 사로잡은 우크라이나의 매력은 다름 아닌 ‘저렴한 물가’였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관광청 책자에서도 ‘2014년 이후 현지 통화인 흐리브나가 유로 대비 2/3 절하되어 외국인들에게 여행하기 좋다’고 홍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현지인들의 팍팍한 삶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관광객의 입장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갑을 여는 건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이니까. 얼마나 즐거웠는지 당시의 일기장을 다시 보니 이런 문구를 적어 놨다. “참으로 행복한 일상이다 :)” 



동쪽에 위치한 수도 ‘키예프’와 서쪽의 폴란드 국경 근처에 위치한 ‘리비우’, 이 두 도시를 여행하면서 1박에 2만 원이 안 되는 가격으로 최신 스튜디오와 집 한 채를 빌려 느리게 쉬어 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현지 주민 놀이를 하면서 체감한 우크라이나의 물가를 한화 기준으로 살펴보자. 단, 그 비교 대상은 물가가 매우 낮은 여느 국가가 아니라, 유럽 국가의 분위기를 즐기며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저렴함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 키워드는 ‘미식’이다. 키예프의 에어비엔비 숙소 근처에 고급 일식당이 있었는데 런치 메뉴로 5천 원 정도에 롤과 간단한 식사, 음료를 즐길 수 있어 자주 방문했다. 목가적 풍경의 인테리어 속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 레스토랑에서는 코스 요리를 먹어도 2만 원이 채 나오지 않았다. 리비우의 명물 ‘리비우 크로와상’의 오리지널 크로와상과 아메리카노 세트는 약 2천5백 원이었는데, 한 입 베어 물면 푸짐한 재료들의 조화와 살살 녹는 빵의 식감까지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맛있어서 지금도 우크라이나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다. 다음은 디저트를 먹을 차례,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 소유의 초콜릿 회사 ‘ROSHEN’ 매장은 작은 테마파크처럼 꾸며져 있어서 마치 놀이 공원에 온 듯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쇼핑보다는 구경을 하고 난 뒤 300~500원을 주고 초콜릿이나 웨하스 등의 과자를 사 먹으면, 어린 시절 슈퍼마켓에 들러 100원짜리 사탕을 입에 물고도 행복했던 그 소박했던 즐거움을 상기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키워드는 ‘문화생활’이다. 멀티플렉스의 영화 가격은 4천 원(보통 우크라이나어 더빙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긴 하다), 클래식 공연의 관람료는 5천 원에서 만원 사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리비우에 위치한 ‘맥주 박물관’이었는데, 학생 할인까지 받아 4천 원도 안 되는 입장료에 맥주 샘플러 4잔 시음권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가격이 놀라웠던 건 박물관의 전시 상태가 기대 이상이었으며, 천장의 나무 조형물이 인상적인 2층 펍에서 시음한 맥주가 마치 브루어리 투어를 끝낸 뒤 맛보았던 효모가 살아있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키워드는 특히 여성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미용’이다. 미용의 질만 따진다면 전 세계에 한국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크라이나는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은 나라였다. 어느 날 숙소 주변을 산책하다가 네일숍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마치 네일숍에 아닌 런웨이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정성스럽게 손과 발을 만져주었다. 이는 외국에서 받아 본 네일/페디케어 중 최고였으며, 깔끔하게 발뒤꿈치 각질까지 제거한 뒤 지불한 돈은 다 합해서 1만 2천 원 정도였다. 은은한 조명 속 몽환적인 명상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한 시간 동안 받은 오일 마사지는 2만 원 정도였고, 미용실에서 3만 5천 원에 펌도 했는데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 머리 어디서 했냐는 말을 들었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 후 한국의 여러 미용실에 그때의 사진을 들고 가 똑같이 해 달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케이 뷰티가 우크라이나 미용사의 솜씨를 재현하지 못했다.   



물론 단지 저렴한 물가로 호의호식했다는 이유만으로 우크라이나를 추천하는 건 아니다. 칙칙한 잿빛 건물을 예상했던 키예프의 거리는 생각보다 고풍스럽고 활기가 넘쳐서 놀랐고, 황금색 지붕의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도 눈을 황홀하게 했다. 키예프에서 기차로 7시간 정도 떨어진 ‘리비우’의 풍경은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었고, 유럽의 전형적인 올드타운과는 달리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붉은색 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리비우 시청사 탑’에 올라 한참 동안 두 볼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우크라이나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풀꽃' 같은 여행지라고.


☆ 2018년 7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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