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절의 분위기 등에 그리움을 느끼는 감정
2025년 봄, LA와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로 미국 서부 여행을 다녀온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비즈니스석을 마일리지로 예매하기 위해 떠나기 1년 전부터 티켓팅을 하고 기다렸던 여행이었는데, 그 후 브런치에 기록을 남기기까지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당시 바쁘게 여행했다는 핑계로 단 한 줄의 감상도 남기지 않은 게 조금 아쉽지만, 대신 그때 열심히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그 순간의 공기와 감정이 희미해지기 전에 펜을 들어본다.
미국 서부 여행 계획은 남편의 버킷리스트 실현에서 시작되었다. 그건 바로 LA다저스 경기장에서 야구선수 오타니의 경기를 직관하는 것. 사실 몇 년 전 나의 미국 동부(뉴욕) 여행 기억은 숨 막히는 빌딩과 특색 없고 정신없는 대도시, 비싼 물가와 맛없는 음식들로 대표되는 다소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미국의 유명한 도시들을 가본다는 상징성과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그랜드캐니언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소박한 기대감으로 여행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만큼의 설렘과 함께, 서울에서는 이제 막 벚꽃이 몽우리를 피울 무렵 LA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쨍하고 새파란 하늘과 사계절 내내 포근한 봄 날씨 덕분에 LA는 샌프란시스코보다 살짝 더 마음이 기울었던 도시다. 그런데 머무르는 4일 내내 대부분 구름이 잔뜩 끼고, 세찬 바람에 비와 추위라는 달갑지 않은 반전을 보여줬다. 내가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았던 LA가 진짜 이곳이 맞는 건지, 우울한 날씨는 풍경과 기분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LA 별로였어’라는 뭉뚱그린 감정으로 기억하곤 했는데, 이번에 사진을 보며 추억을 하나씩 되살려보니 그래도 즐거운 추억이 꽤 많았다.
처음 타본 자율주행차인 웨이모(Waymo)에 올라 너무 신기했던 기억, 비버리힐즈의 야자수를 지나 어스카페(Urth café)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뜨끈한 북창동순두부를 먹었을 때 미식의 즐거움. 비록 남편의 버킷리스트에 있었지만 나 역시도 궁금했던 오타니의 멋진 스윙, 미니마우스 머리띠를 하고 디즈니랜드에서 즐긴 신선한 스릴, 할리우드 간판 아래 펼쳐졌던 드넓은 잔디밭, 개봉 후 시간이 흘러 다시 봤을 때 조금 다른 느낌의 감동을 준 영화 ‘라라랜드’ 주인공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정까지. 그래도 가끔씩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을 때 마음까지도 맑아졌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LA,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니 참 괜찮았던 도시였구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라스베이거스행 국내선 비행기가 4시간 정도 지연되는 바람에 호텔에 밤 11시쯤 도착했다. 그런데 늦은 시간인데도 택시 안에서 바라본 거리는 낮처럼 화려하게 반짝였고, 호텔 로비에서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는 호텔마다 빠짐없이 카지노가 자리하고 있는데, 다음 날 아침 샌드위치 가게로 가면서도 휘황찬란한 카지노를 지나가야 하는 게 좀 싫었다. 빛과 소리가 과한 이곳은 짧게 즐기기엔 좋겠지만, 정신이 산만해져서 오래 머물기에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좋았던 점은 드디어 반팔을 입을 수 있는 따뜻하고 쾌적한 도시에 왔다는 것, 그리고 어느덧 화려한 볼거리들에 물들면서 서서히 이 강렬한 감각을 즐기고 있는 호모루덴스인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 밤늦게도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걸으며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를 보고, 궁금했던 태양의 서커스의 ‘오쇼(Eau show)’와 2023년 오픈한 세계 최대 공연장인 ‘스피어’에서 ‘Postcard from Earth’라는 거대한 영상에 압도되기도 했다. 떠나기 전 날, ‘노스 아웃렛’에 들러 소소한 쇼핑까지 하면서 내가 이 도시에 하루만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사실 라스베이거스는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그랜드캐년’을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에 불과했었다. 과학책에서인지 역사책에서였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랜드캐년은 내가 꼬마였을 때 처음 알게 된 뒤 꽤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 온 장소였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랜드캐년이 미서부의 여러 국립공원을 아우르는 ‘그랜드서클’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타주에 있는 자이언과 브라이스 캐니언, 애리조나주에 속한 그랜드캐년, 앤텔롭 캐년, 홀스슈 밴드까지 1박 2일 동안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투어를 선택해 방문하기로 했다.
새벽 4시 반에 픽업 후 출발한 투어 버스, 두 시간쯤 달리니 일출이 반사된 기이한 오렌지 빛 바위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화성에 온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첫 번째 장소 ‘자이언 캐니언’에 도착했을 때는 웅장한 바위들이 모여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서 있어 그랜드캐년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향한 ‘브라이스캐년’은 뾰족한 후두들이 마치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솔직히 풍경의 아름다움만 보면 그랜드캐년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마침 석양 무렵에 찾아간 ‘홀스슈 밴드’에서는 인생샷을 건질 수 있었고, 윈도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앤텔롭 캐년’은 제한된 시간에 빠르게 보아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눈을 두는 곳마다 새로운 세상에 온 듯 다채로운 경관을 보여줬다.
그리고 마침내, 그랜드캐년에 도달했다! 이름만큼이나 상상 이상의 광활함이 눈앞에 펼쳐졌고, 각 시대를 품은 지층들의 선명한 색 변화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20억 년에 걸친 지질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마치 고생대 타임머신에 올라타 수억 년 전 그 땅 위를 걷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주변의 관광객들을 잠시 클린업 기능으로 모두 지워버린 뒤 오롯이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대자연의 풍경을 접할 때마다 내가 평소 갖고 있는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이 저 바닥 아래 모래 한 톨보다도 크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이토록 나를 자유롭게 하는 존재와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투어의 특성상 시간 제약이 있어서 겉훑기에 만족해야만 했다. 만약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트레일을 따라 여유롭게 달리던 외국인들처럼 온몸으로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랜드캐년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리라.
어릴 적 집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 중에 영화 중경삼림의 OST로 유명한 ‘California dreamin’을 부른 ‘MAMA’S & PAPA’S’라는 그룹의 노래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귓속에도 멜로디가 꽤 감미롭게 들렸는지 가사도 모르면서 종종 따라 흥얼거리곤 했다. 그 음반에 수록된 다른 노래들 ‘Look through my window’나 ‘I saw her again yesterday’ 등을 들을 때면, 마치 미국의 한적한 소도시 카페에 앉아있거나, 근교의 낙엽이 가득 쌓인 조용한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적 없는 90년대 미국에 대한 그리움, 미국에 대한 아네모이아를 바로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날 수 있었다.
렌터카를 타고 LA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BGM으로 캘리포니아 현지에서 듣는 ‘California dreamin’은 정말 감동이었다. “All the leaves are brown~”라는 첫 구절 가사밖에 몰랐었는데 이번에 처음 가사를 찾아보면서 노래 속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하는 마음까지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그렇게 도착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북쪽으로 올라온 만큼 기온은 낮았지만 기대치 않았던 환상적인 햇살과 쨍하게 빛나는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작은 트램)의 파월-하이드라인을 타고 해안가 쪽으로 가다보면 매우 가파르고 굴곡진 언덕을 오르게 된다. 거의 종점에 다다를 무렵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인사이드아웃'에 나온 배경인 ‘롬바드스트릿’에 가기 위해 내렸는데 그 순간 자연스럽게 감탄이 나왔다. 저 멀리 언덕 아래로 펼진 탁 트인 푸른 바다와 아기자기한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면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If you’re going to San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여행 내내 수도 없이 흥얼거렸던 노래 스콧 맥킨지의 ‘Sanfrancisco’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거였구나.
샌프란시스코는 언덕이 많아 길마다 굴곡이 있어, 마치 숨겨진 매력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듯한 특별함이 있었다. 그 경사가 꽤 가파르기도 해서 이 비탈을 지나면 또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1960년대 히피 문화의 발상지로서 피어 39 같은 바닷가 부두 주변만 활기가 넘치는 게 아니라, 도시 곳곳이 특유의 활기찬 바이브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저 거리를 걷기만 해도 행복했다. 블루보틀보다는 Rituals나 Peets 같은 개성 넘치는 로컬 카페에 들러 따뜻한 라테 한 잔 마시며 천천히 거닐면, 어느새 이 힙한 도시의 주민이 된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알라모스퀘어 근처에서 파스텔 톤 아기자기한 주택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어린 시절 마마스 앤 파파스의 노래를 들으며 상상하고 그리워했던 미국의 한 장면을 마침내 만난 것 같다고!
샌프란시스코는 근교 여행지들도 참 아름다웠다. 하루는 나파밸리와 소노마 밸리의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해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와인 한 잔을 마셨는데, 그 순간 술 대신 햇살에 취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노마 밸리 마을 곳곳에는 마침 벚꽃이 활짝 피어있어 그 해 한국에서 보지 못한 벚꽃에 대한 아쉬움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바로 페리를 타고 건넌 ‘소살리토’였다. 곳곳에 만개한 알록달록 꽃들과 소박하고 여유로운 마을의 풍경 속을 걸으며, 눈을 어디에 두어도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서부 여행의 풍경들과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느꼈던 나의 오랜 아네모이아는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네모이아’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만나게 될 장면을 미리 그리워하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번 미국 서부 여행에서 내가 만난 것은 새로운 풍경이라기보다 오래전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순수한 나의 어린 시절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