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역 쌀 브랜딩 예찬
2019년도 어느새 해가 꼴딱꼴딱 합니다. 코끝이 시리니까 괜히 마음도 시린데, 다들 따끈한 밥 잘 먹고 다니시나요? 한국인들은 밥심으로 산다잖아요. 밥 하나면, 만나고 헤어지는 인사 다 할 수 있고요. 빡센 다이어트에 식단 관리를 하다가도, 해외여행에 오만 진미를 먹다가도 문득 쌀밥 한 공기가 그리운 순간이 있죠. 소울푸드라고 애써 꼽기도 민망할 정도로 한국인의 삶과 떼놓을 수 없는 밥.
그런데 오늘 먹은 그 밥, 이름은 뭐였을까요?
사실, 이 글은 서산 뜸부기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퇴근길 지하철 환승구간에 전국 향토 농산물 판매 코너가 있는데, 거기서 본 광고였어요. 왜 서산 쌀은 뜸부기일까,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뜸부기가 서산시의 시조(市鳥)인가. 그러다 제가 엉성하게 기억하는 쌀 이름들을 떠올려봤죠.
여주 임금님 쌀 (세종대왕릉이 있어서 그럴까!)
강원도 오대쌀 (오대산의 오대일까?)
김포 금쌀 (김포는 특별히 명물이 없어서 금인가?)
생각해보니 쌀에는 항상 그 쌀을 키운 땅의 이름이 붙습니다.
쌀의 능력은 밥맛, 그 밥맛은 어디서 나오나? 쌀이 자란 땅이다!
자기소개의 스케일이 인간의 것과는 사뭇 다르죠.
모든 쌀들의 꿈은 하나일 것입니다.
아, 한 숟갈 따뜻한 밥이 되고 싶다.
쌀 미(米) 자를 풀어보면 한자로 88(八十八) 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선 여든여덟 번의 수고가 든다구요. 하지만 그렇게 귀하게 키운 쌀도 끝내 밥이 되려면 누군가가 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 속엔 논이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봐도 삼천리 화려강산 이남 지역 어디에나 쌀이 자랍니다. 서울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적은 양이지만 쌀이 납니다. 이 수많은 지역의 쌀들이 당신의 밥이 되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마트의 쌀 코너를 가보면 팔도 쌀들의 대 각축장입니다.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밥맛이 뭐 얼마나 다를까 싶지만, 지역마다 잘 자라는 벼 품종이 다르고, 벼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쌀맛도 다르죠. 그래서 쌀들은 소비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저마다 있는 힘껏 스토리텔링을 합니다. 그렇게 지자체마다 고민해서 내놓은 이름들이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한국 사람이라면 무조건 공감 가는 포인트가 있어서 참 재미있습니다. 팔도 유람을 하는 기분도 들고요. 그렇습니다. 과연 누가 이런 게 궁금할까 싶지만 저는 이 기분을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정말 팔도강산 방방곡곡 지역 쌀밥 기행을 해보고 싶어요.
서울과 제주도에서도 쌀이 납니다. 서울의 쌀은 경복궁 쌀. 서울의 자부심이 한눈에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주로 강서구 끝자락의 그린벨트 지역에서 생산하는데, 김포평야와 맞닿아 있어 밥맛이 좋고 친환경으로 재배해 깨끗하다고 합니다. 한편, 담수가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밭벼 '산듸'가 자랍니다. 포장에 적힌 '제주 바람'과 '한라산' 이름만 보아도 왠지 밥맛이 다를 것 같습니다.
경기도는 '이천 쌀'과 '여주 쌀' 2강의 자존심 싸움이 흥미롭습니다. 서로 맞닿아있는 고장 둘이 임금님을 마크로 내세우는데, 디테일이 살짝 다릅니다. 이천 쌀은 동국여지승람에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의 명산지'로 적혀있는 것을 근거로 '임금님 표'라는 마크와 함께 포장에도 진상미라는 것을 강조해두었습니다. 한편 선사시대의 탄화미가 발견될 정도로 쌀농사가 오래된 여주 쌀은, 조선 태종 임금이 밥을 먹어 보고는 최고의 쌀이라고 극찬했다고 해요. 게다가 영릉(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 여주에 있으니 대왕님이라는 이름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집니다.
충청북도에도 이름난 쌀들이 많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최우수 쌀 인증 마크인 러브미 8회 수상에 빛나는 청주 청원 생명쌀이 있습니다. 포장에 당당히 붙은 8개의 러브미 마크에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생명 쌀이라는 이름에선 제초제를 쓰지 않고 왕우렁이로 한정 생산해내는 깨끗한 느낌을 한껏 살렸습니다. 또 청주에는 청개구리쌀이 있는데요, 이 귀여운 이름은 우렁이 농법으로 키운 논이라 청개구리가 자란다고 해서 붙였대요.
차령산맥의 수려한 산허리가 병풍이 되어 감싸 안고,
미호천 상류의 맑은 물이 그 자락을 적시며,
따사로운 햇볕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한가로이 내려앉은 진천!
이렇게 풍수지리학적인 자랑이 적힌 쌀은 충북 진천군의 생거 진천 쌀입니다. 예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엔 용인으로 간다’는 말이 있었다고 해요. 이 말을 따서 살기 좋은 '생거 진천'을 브랜딩 하자, 다른 지자체들에서도 '생거'를 따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7년에 '생거 진천'을 상표 출원해서 이제는 '생거'라는 타이틀은 오직 진천군만이 쓸 수 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속리산이 있는 보은 시의 쌀도 귀엽습니다. 속리산의 정이품 소나무를 따서 지은 이름인데, 포장에도 고장의 명물이 크고 아름답게 박혀 있습니다.
충남의 대표 쌀은 도 차원에서 관리하는 청풍명월 쌀이 있습니다. 포장에 적힌 "충남인의 온건한 성품과 참된 마음으로 만든다'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천안 쌀은 천안 삼거리의 고장답게 천안 흥타령쌀이라는 이름인데, 상모를 돌리고 있는 로고가 시선을 끕니다. 아산시의 아산 맑은 쌀은 굉장히 기술적으로 어필하고 있습니다. '게르마늄 농법', '갯벌 쌀', '아산 시장이 품질을 보증한다' 등 테크적인 접근과 그동안 수여받은 온갖 훈장들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게 한 서산 뜸부기 쌀. 뜸부기와 함께 자란 서산 쌀은 우리나라 최초로 호주에 상표도 등록한 글로벌 역량이 돋보이는 쌀인데요, 뜸부기에 대한 의문은 아래 서산시청 농정과 임종근 팀장님의 인터뷰로 대신합니다.
"오빠 생각이란 추억의 동요에 등장해 우리에게 친근하고 뜸부기는 오염된 논에서는 살 수 없는 환경 친화적인 여름철새로서 특히 물이 맑고 깨끗한 청정농업지역인 서산에서 최근 서식이 확인되고 있다"며 "뜸부기쌀 상표는 서산시 소유로 2년씩 사용 승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반도의 곡창지대 전라북도에서는 어떤 쌀들이 자라날까요. 전라북도는 주로 신동진 쌀을 쓰는 것 같습니다. 동진 벼를 개량해 만든 신 동진 벼는 쌀알이 기존 품종보다 1.3배 더 커서 초밥이나 김밥을 하면 더 맛있고 탄력성이 좋다고 하는데요, 이 말을 쓰는 것만으로도 저는 배가 고파지네요.
전라북도에는 군산의 쌀이 유명한데, 일단 옥토진미 골드가 있습니다. 옥토에서 자란 맛있는 쌀의 기름진 느낌이 포장의 골드 컬러에서도 느껴집니다. 또 군산에는 대한민국 수출 1호 쌀에 빛나는 철새도래지 쌀이 있습니다. 철새가 날아가는 서정적인 그림과 함께 군산시장님께서 맛을 보증해주십니다. 김제시 이택 라이스 센터의 쌀 이름은 방아 찧는 날 골드. 방아 찧는 날이라는 시적인 표현에선, 고소한 밥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전라북도의 쌀들은 황금들녘이 연상되는 '골드' 네이밍으로 풍부한 밥맛을 한번 더 강조해주네요.
전라남도에도 수많은 맛진 쌀들이 있었지만, 이름이 재미있는 쌀들만 몇 개 추려보았습니다. 황토가 나기로 유명한 무안군의 쌀은 무려 쌀의 신동진. 신동진 품종을 기막히게 이용한 작명이 돋보입니다. 신이 내린 황토에서 자란 쌀의 신동! 절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싶게 만드는 설명이네요. 대숲이 유명한 담양은 자연스럽게 대숲맑은 담양 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대나무와 쌀의 생산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깨끗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게 암시되는 좋은 이름입니다.
함평 나비쌀에 얽힌 이야기는 감동적이면서도 웃긴 데가 있습니다. 함평이 특별히 나비가 많은 동네는 아닙니다. 그런데 1999년부터 21년째 나비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지역 축제라고도 평가받습니다. 나비 축제는 이석형 전 군수가 3 무의 고장이라 불릴 정도로 노령화되고 특별한 자원이 없는 함평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떠올린 아이디어였습니다. 기획 당시 계절은 겨울, 도대체 봄까지 어떻게 축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수만 마리 나비를 만들까. 그해 1월, 함평 군수와 군청 공무원들은 제주도의 배추밭들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배추흰나비들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잡은 100마리의 나비를 온실에서 부화하고 번식시켜 마침내 나비 축제에선 수만 마리의 나비를 날릴 수 있었대요. 그렇게 날아다니는 예쁜 나비들로 함평의 맑은 물과 깨끗한 자연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당연히 함평 쌀 이름도, 함평의 라이스센터에도 모두 '나비'가 붙게 된 거죠.
해남 한눈에 반한 쌀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한눈에 반한 쌀은 히토메보레라는 일본 품종을 사용합니다. 히토메보레 一目惚れ는 '한눈에 반했다'는 뜻. 대한민국이라는 글자를 굵게 배치한 레이아웃의 옛날 패키지는 일본 품종이라는 쌀의 출신을 잘 희석시켜 줍니다. 한편 신세계에서 유통되는 해남 쌀 패키지는 더 세련되고 개인적으로 참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12대 고품질 브랜드 쌀 10회 이상 선정되었다는 말에서 밥맛의 자부심이 느껴지네요.
경북 상주 쌀도 언어유희가 돋보입니다. 명실상부의 뜻을 살린 태그라인 '그 명성 그대로'에 명실 상주쌀이라는 브랜드 이름을 붙여 '아 상주쌀이 뭔가 유명한가 봐' 하는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패키지에는 상주 쌀의 품종인 '일품 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쓰여있습니다. 95년도 일본 도쿄 TV에서 실시한 양국 밥맛 평가에서 일품 벼가 히토메보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네요. 바로 이것이 '그 명성 그대로'의 명성이겠지요.
의성의 쌀 브랜드는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바른고을, 의성진 쌀로 통합 브랜드를 다시 론칭했는데 그 이전 이름이 더 귀엽기 때문입니다. 의성 쌀의 옛 이름은 '의로운 쌀'이었습니다. 왜 의성이 의로운 고장인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고려 초기 의성 지역은 '문소 군'이라는 작은 동네였는데 문소 군의 성주가 견훤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를 의롭게 여긴 왕이 의성(義城)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의성부로 승격하였다고 하네요. 의로운 쌀이라니, 먹을 때마다 왠지 정의감이 +1 될 것 같지 않나요.
경북에선 안동 양반쌀도 빼놓을 수 없죠. 개인적인 아쉬움은 패키지에 하회탈 그림이 없다는 것.
참, 경기도 쌀들은 '임금님'을 쓰지만, 경북 경주의 쌀은 '이사금쌀'이랍니다.
경남의 쌀들은 임팩트가 상당히 강합니다. 거창군은 처음으로 문장형 쌀 이름을 선보입니다. 무려 밥맛이 거창합니다! '밥맛이 거창합니다'는 2014년부터 쓰인 이름인데, 1년간 지역 곳곳에 현수막을 걸어 지역 내외부인들과 소통한 끝에 좋은 평가를 통해 15년도에 론칭했다고 합니다. 이름만큼이나 밥맛이 일품이어서 경남 브랜드 쌀 평가에서 거의 매해 우수 브랜드로 선정되었습니다.
경남 진주의 쌀은 무려 동의보감입니다. '쌀'이라고 한마디 붙이지도 않고 60년 전통의 동의보감이라는 자신 있는 정의가 멋있습니다. 가마솥에 태우는 불길 같은 패키지 디자인도 인상적이고, 이 쌀은 정직합니다 라는 카피도 군더더기 없습니다. 왜 동의보감일까 찾아보니, 진주에서 드라마 허준을 찍었고 진주시와 산청군 사이에 있는 동의보감촌이 워낙 유명한 명소여서 '동의보감'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강원도에는 철원 오대쌀이 있습니다. 저의 추측과 달리 오대미는 '오대산'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고 벼의 품종인 '오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대 벼는 1982년에 육성한 품종으로, 일조량이 적고 추운 강원도의 기후에 맞게 개량된 쌀입니다. 냉해에 강하고 재배 기간이 짧아 다른 지역에선 기를 수 없고 오직 강원도, 그것도 특히 현무암 지대인 철원에서 난 오대쌀이 그렇게 맛있대요. (밥이 식어도 금방 딱딱해지지 않아서 도시락으로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합니다.)
토토미는 농민은 흙에서 나서 흙을 벗 삼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간과 흙의 떨어질 수 없는 농자 철학을 담은 원주시 고품질 쌀의 공동 브랜드입니다.
강원도 원주쌀은 토토미입니다. 약간 스포츠 토토도 생각나는 이름이 참 귀여운데, 그 의미는 자못 비장합니다. 매해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인데, 이것을 1964년 원주에서 처음으로 제정했다고 합니다. 왜 11월 11일이냐, 농업인은 살아도 죽어도 땅 土, 그렇다면 농업인의 날은 土월 土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土자의 한자를 파해보면 11, 그래서 11월 11일이 농업인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런 원주의 쌀이라면, 토토미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한반도의 땅이 쌀을 키우고, 그 쌀이 한국인들을 기르니
구석구석 우리 쌀을 보면 우리나라가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죠.
지역 쌀마다 얽힌 이야기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 정답기도 하고
쌀 구매 후기마다 적힌 '고향 쌀을 먹어 좋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찡하기도 해요.
어느 동네에서 나든, 어떤 이야기를 담았든
정성 없이 절로 크는 쌀이 없고, 그렇기에 끼니마다 귀하지 않은 밥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밥상에 오른 쌀, 당신의 쌀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 밥이 참 달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