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어쩌다 01호
[야간]어쩌다는, 작가가 어쩌다 갖게 된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어쩌다 밤 중에 올리는 글입니다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현재 내가 있는 곳'과 '앞으로 내가 갈 곳'의 파악입니다.
지도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에서 나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알게 해줍니다.
지도가 우리의 공간 상 좌표를 알려준다면, 시간 속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시계와 달력을 봅니다.
하루 24시간 중 지금 내가 얼마쯤 지나왔는지, 올 해는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You Only Live Once를 외쳐도 인간에게는 매우 높은 확률로 '다음 순간', '내일', '내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도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파악합니다.
만약 그 시계가 너무 단기간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의 위치도, 미래의 위치도 모두 잘못 파악할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과소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 과학자가 생각해냈습니다.
시간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혀줄 아주 특별한 시계를.
Y2K를 아시나요? 이 단어를 들어봤다면 삐빅, 당신은 최소 92년생이겠군요.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1999년에 사람들은 진지하게 세계 종말을 걱정했습니다. 프랑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해 7월에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구를 멸망시킬 거라 했고, 엔지니어들은 99년에서 00년으로 바뀌면 컴퓨터 연도처리 방식(DD-MM-YY)에 오류가 생겨 사회 시스템에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 했습니다. 2000이라는 놀라운 숫자는 개념적으로 충분히 커서 그 자체로 미래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2000년 1월 1일이 온 이후에도 세상이 있을까. 마을의 강물 수위가 조금만 높아져도 짐부터 싸고 보는 프로봇짐러 초딩이었던 저 역시 마음 한 구석에 공포를 안고 살았죠.
2000년은 인류에게 어떤 절벽 같았습니다.
1989년, 대니 힐리스라는 과학자는 사람들이 '2000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심히 낙담했습니다. 대니 힐리스는 발명가이자 컴퓨터 엔지니어로 신경망 이론의 발전에도 기여한 대단한 천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교류했던 사람들도 당연히 범인은 아니었겠죠. 그런데도 그가 만난 사람 대부분이 '2000년'에 세상은 어떻게 될까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도 그 이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죠.
"
모든 사람이 200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떠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다음의 미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이후에도 우리의 삶은 지속되는데 말이죠.
<베조스 레터>, 대니 힐리스의 이야기
대니 힐리스는 2000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계속 짧아지는 미래의 정신적 장벽'이라고 정의했습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미래에 대한 사고가 단절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있게 할까요. 그가 생각한 것은 거대한 시계였습니다. 볼 때마다 사람들의 시간이 확장되는. 기껏 100년을 살고도 장수를 축복하는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추지 않는, 보다 장기적인 시계.
그 시계의 이름은 10,000년 시계입니다.
기본 원리는 평범한 시계와 같습니다. 일정한 간격에 따라 시간의 변화를 알려줍니다. 다만 단위가 다릅니다. 대니 힐리스가 만든 것은 이름처럼 만 년 단위의 시계였습니다. 높이만 약 150m에 이르는 이 시계는1년에 한번 움직이는 초침과, 100년에 한번 움직이는 분침, 1,000년에 한번 등장하는 뻐꾸기로 이루어져있지요. 10,000년 시계는 하루 한 번 아름다운 차임벨이 울리는데, 10,000년 동안 단 한 번의 멜로디도 겹치지 않도록 설계했다고 합니다. 앞으로의 10,000년 동안 이 시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를 울릴까요?
그러나, 10,000년 동안 유지되는 시계를 실제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야 시계가 만 년 이상 버틸 수 있을까요? 일단 너무 비싼 금속이 들어가면 안 될 겁니다. 도둑들이 훔쳐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만 년을 버틸만큼 내구성이 좋아야 하겠죠. 동시에 아무리 먼 미래에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시계의 기능을 보수하거나 확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론, 시계를 분해하지 않고도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의 후손들이 보아도 즉시 알아챌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실 사이즈의 대형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더 작은 프로토타입들을 제작해 끊임없이 테스트 해야 할 겁니다.
그리하여 약 2.8m짜리 첫번째 프로토타입은 1999년 12월 31일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아, 표기를 이렇게 바꾸어야겠군요. 01999년 12월 31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만년을 측정하려면 그레고리력을 4자리 수가 아니라 10,000에 맞게 5자리로 써야 하니까요. 첫번째 10,000년 시계는 인류 역사의 두번째 밀레니얼을 기념하며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최소 10번의 밀레니얼을 세상에 알려줄 예정이죠. 이 프로토타입은 런던 과학 박물관에 대여되었다가, 2018년에 만년 시계 프로젝트의 메인 재단인 Long now 재단의 뮤지엄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럼 150m 크기의 거대한 10,000년 시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과연 만들어지고는 있을까요? 완공일자는 물론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만, 실제 크기의 10,000년 시계는 현재 텍사스 서부 깊은 산 속에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아마존의 창업가 제프 베조스의 사유지입니다. 제프 베조스는 4200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투자했습니다.
대니 힐리스의 위대한 아이디어는 1995년 와이어드지에 최초 공개되었는데, 실제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토록 큰 시계를 만드려면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자본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다 제프 베조스가 이 아이디어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인 제프 베조스에게 한화 500억 원 정도야 뭐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었고, 아직까지 그 어떤 부자들도 인류의 '장기적 사고'에 대한 프로젝트에는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도 갑부였던 빌 게이츠는 전염병 백신 개발에, 워렌 버핏은 가족 계획이나 핵문제에 관심이 있었죠. 베조스의 10,000년 시계는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장기적 사고'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게다가 제프 베조스 본인이 언제나 Day1에 대해 강조하는 사람이었죠. 제프 베조스의 가장 유명한 말을 아시겠죠?
우리는 언제나 Day 1입니다
아마존에는 Day1 정신이 있습니다. 제프 베조스에게 Day 2는 결국엔 추락하고 마는 정체 상태입니다. 반복되는 오늘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역사의 첫날인 것처럼 새롭게 사고하고 거침없이 위험에 뛰어드는 것 - 그것이 아마존의 성공 비결이자 제프 베조스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스타트업 정신입니다. 베조스는 1997년부터 주주서한을 보내고 있는데, 해마다 주주서한의 끝에는 1997년, 최초의 주주서한을 언급합니다. 그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첫 날인 것입니다.
매일을 Day 1으로 사고한다면, 단 하루도 정체되지 않겠죠. 매일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니까요. 2018년, 베조스의 한 친구가 아마존의 분기 수익 발표 후 대단한 성과라며 축하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고마워, 하지만 그 분기는 이미 3년 전에 지나간 일이야." 그러면서 밝히기를, 18년 주주서한을 쓸 당시 그는 이미 2021년 1/4 분기에 일어날 일을 구상하고 있다고. 이 정도의 스케일이라면 제프 베조스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또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까요. 힌트는 2018년 그의 스피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
20년 전 아마존을 창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통망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습니다.
지불 시스템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세상엔 신용카드 시스템이 구축된 상태였습니다.
컴퓨터를 만들어 책상 위에 놓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것 역시 이미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0만 달러로 아마존을 시작할 수 있었고,
페이스북은 기숙사 방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기숙사에서 거대한 우주 기업을 세울 수 있을까요?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큰 무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미래의 아이들이 기숙사에서 거대한 우주 기업을 세울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기반 시설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런 거대한 도약이 이루어지려면 많은 일이 일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건, 단 하나의 큰 발걸음입니다.
* <베조스 레터>에서 인용해 분량에 맞게 각색했습니다
이 스피치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 발걸음은 바로 우주에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도로가 있었기에 택배망을 필요로 하는 무인 거래가 가능했고, 신용카드가 있었기에 인터넷 결제를 만들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이 이미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기에 SNS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발전은 언제나 이전 세대의 거인들이 이룩해낸 것 위에 올라타며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비로 그 거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프 베조스는 단 한 걸음, 우주 산업을 위한 작지만 큰 한 걸음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2000년에 설립한 회사가 바로 블루 오리진 Blue Origin, 민간인 우주 여행을 꿈꾸는 곳입니다.
첫번째 '진짜' 10,000년 시계가 지어지는 곳에서는 블루 오리진의 기지가 내려다 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아직 수렵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10,000년 시계가 살아남아 우리의 만 년 뒤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면 어떤 메세지를 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달라졌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일까요. 먼 미래의 후손들이 만 년 시계를 등지고 서서, 눈 앞에 펼쳐진 원시적인 우주 여행의 흔적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저는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비약적으로 확장됨을 느낍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은 10,000년 단위로, 우리가 계획하는 공간은 지구 밖을 넘어 우주로. 제프 베조스가 이 곳에 10,000년 시계를 설치하기로 한 것은 마치 시간과 공간의 기준점을 다시 세우자는 선언처럼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day 1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한다, 시간과 공간의 지형도를 모두 바꾸자. 10,000년이란 한계를 너끈히 이겨낼 만큼. 중력의 한계를 훌쩍 벗어날 만큼.
대니 힐리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당신이 1만 년 동안 째깍거리는 시계를 갖고 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질문과 프로젝트를 제안하시겠습니까?"
제프 베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계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먼저 사라질 겁니다.
모든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칠 테고, 새로운 정부 시스템이 발명될 겁니다.
이 시계가 경험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현재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은 바이러스 학자 조너스 소크의 질문을 따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보다 위대한 시계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 참고한 책과 인터넷 페이지들입니다
대부분의 인용구는 <베조스 레터> 리더스북, 스티브 앤더슨 저, 한정훈 역 에서 따왔습니다.
너무너무 재미있는 책이니까 읽어보세요. 만년 시계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술술 읽힙니다.
그 외 10,000년 시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들에서 참고했습니다.
영어는 문맹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잘못 인용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거나 혀를 한번 차주십시오.
https://www.wired.com/2011/06/10000-year-c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