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의미 있는 영화
웬만한 기대작은 이제 싱가포르에서도 대부분 개봉하는 분위기라 여기서 최신 한국영화를 관람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때 논란도 많았지만 지지층도 많았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리메이크돼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싱가포르에서도 개봉한다 길래 1주일 전부터 기다리다 개봉일에 맞춰 칼퇴하고 곧바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오묘하게(?) 섞여있는 싱가포르에서 오래 살아 그런지 나에게는 토종 한국인들에 비해 비교적 공감하기 어려운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몰입이 잘되고 밀려오는 감정이 많았기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브런치를 켜게 되었다. 국내에선 지난달에 개봉했기 때문에 이미 본 사람이 꽤 있겠지만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대량 방출될 것을 경고한다. 스포일러가 싫다면 관람 후 읽기를 권장한다.
나는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을 지지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나는 가부장주의 미소지니스트 성차별주의자 인가? 페미니스트는 아닐지라도 나는 자신을 성평등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냥 레디컬 페미니스트의 접근 방식에 동의할 수 없을 뿐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아는 "페미니스트" 영화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다. 내가 봤던 그 어떤 여성주의 콘텐츠 보다도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여성이라는 주체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는 했지만 남성을 적대시하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서의 남성은 딱히 악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2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감독은 김지영이라는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스토리를 이끌어 나아간다. 지영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수모와 부조리함을 여러 번 드러낸다. 하지만 결코 특정 계층이나 사람을 온전히 악역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은근히 비꼬며 지영을 못마땅해하는 시어머니도 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보약을 선물한다. 워킹맘 김 팀장에게 회의 중에 성차별적인 발언을 툭툭 던지며 비아냥 거리던 남자 직원들도 특별히 악한 사람들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스토킹 당해 힘들어하는 지영에게 "여자가 먼저 조심했어야지"라며 꼰대스 스킬을 발동했던 아버지도 지영을 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커 걱정하는 마음에 상처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게 된다. 모두 올바른 행동들은 아니었지만 기존의 페미니스트 콘텐츠들처럼 그들을 청산의 대상으로 묘사할 만큼 적대적이지는 않는다.
"82년생 김지영"은 모든 남성을 일방적으로 피의자 또는 잠재적 피의자로 묘사하지 않은데 있어서 남녀 관객 모두에게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성을 피의자로, 여성을 피해자로 프레이밍 하는 행위는 그냥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젠더갈등 조장 댓글들과 다를 게 없다. "남자들은 들어라. 너네 들으라고 만든 영화다"라는 의도를 보이기 시작하면 그냥 편 가르기 하고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더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보다는 "지영"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집중하게 스토리를 이끌어간 덕에 지영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 콘텐츠 치고 반전이었던 것은 바로 지영의 남편인 "대현"이 비교적 괜찮은 남성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이 공유라서 더 비현실적인 부분도 없잖아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장면도 빠짐없이 지영 생각만 하는 지영 바라기. 명절과 가정 행사 때는 지영이 걱정돼 그냥 여행이나 가자고 제안한다. 일하고 싶어 하는 지영에게 자신이 육아휴직을 내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겠다고 얘기한다. 멋있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주변에서 보기 드문 남편의 모습인 것 같다. 핵심 남자 캐릭터인 대현을 선하고 좋은 모습으로 연출하면서 최대한 편향적이지 않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대중들에게 원작만큼 거부감을 주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커스가 "성차별" 뿐만이 아닌 "정신병"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는 지영이지만 영화에서 만큼 정신병에 집중하지는 않았던것 같다. 성차별로 인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지영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정신병을 겪으면서까지 힘들게 버텨내는 그녀의 모습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대한민국의 여성혐오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질타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지영의 정신병이 영화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지영은 산후우울증에 더해 엄마 할머니 언니 등의 모습으로 빙의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빙의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빙의된 모습으로 자신이 억압하고 있었던 속마음,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까지도 대변해 주었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있어 "빙의"는 지영이 세상에 하고자 하는 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지영의 "정신병"을 알게 돼서야 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어머니도, 남동생도, 아버지도. 그리고 남편 대현까지도. 만약 지영이 정신적으로 아픈 것을 몰랐다면 대현의 태도는 어땠을까?
대현은 단언컨대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는 그냥 지영을 정말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영화 초반부 지영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명절에 부모님 대신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정도로 아내를 위하는 남편은 아니었다. 아내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내가 옷을 갤 때, 딸을 샤워시킬 때 청소하고 있을 때 그냥 멀찍이서 바라만 보고 있는 대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기껏 해봤자 고작 수건으로 샤워를 마친 딸을 닦아줄 정도? 지영의 건강 때문에 조금은 삶의 변화가 있었지만 사소한 습관들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커피가 있다. 공원에서 "남편이 번 돈으로 편하게 산다"며 조롱 섞인 부러움을 받던 지영은 상처를 받은 체 유모차를 끌고 자리를 피한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카페에 "왜 아이를 데려오는지 모르겠다"며 조롱하고 커피를 쏟았을 때 뒤에서 욕하던 손님들에게 지영은 당당히 그들의 행동을 지적한다. 확실히 그녀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고 더 이상 이전처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은 조금 현실과 동떨어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 여자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성차별을 주인공 혼자서 전부 다 경험하는 느낌? 그것도 시대착오적으로 과장된 차별들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에 비해 비교적 현실적이고 남자로서도 공감이 갈만한 요소들이 많다.
혹시나마 페미니즘 성향이 짙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보기 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편견을 갖지 말고 꼭 도전해 보기를 추천한다. 최대한 편향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 꽤나 합리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그런 말보다는 조금이라도 그들의 고통을 공감해주고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