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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화 May 20. 2020

송강호 배우가 옳았다

흔히들 영화 한 편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
이런 말씀을 자주들 하십니다.
맞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배우 송강호 -

 2017 올해의 영화상 수상소감 중에서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IiLMYai1w18 캡쳐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른다.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신이 있다고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와 같다. 믿음의 영역이다. 그런데 믿음은 강력하다. 보이면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보인다고도 한다. 종교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신념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배우는 다른 것이 보일 것이다.


단 한 번의 코칭으로
단 한 번의 강의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처음 코칭을 배우고 강의를 할 때 굳게 믿었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 사람으로부터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아주 굳게.


그런데 어느 날 그 믿음이 낯설었다. 어색했다.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뿌옇게 흐려졌다. 그게 믿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지도 못하던 인간이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덤비고 15년이 흘렀다. 믿음에 익숙해졌고, 무뎌졌고, 심지어 의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운동회 때 달리기 대표를 뽑는데 한 친구를 추천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울면서 이야기하던 친구의 얼굴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니가 나보다 달리기 더 잘하잖아. 그냥 니가 나가면 되잖아. 왜 계속 나한테 나가라고 하는데?!"


친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멈칫했다. 사실은 내가 달리기도 더 빨랐고, 내가 나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겁이 났다. 부담스러웠다. 피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응원했다. 아니 떠넘기고, 밀어붙였다. 결국 그 친구가 대표로 나갔지만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친구가 달리는 모습을 보며 처음 ‘비겁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4년을 더 거슬러 가본다. 초등학교 2학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전학 왔었다. 역시나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싸움 잘하냐, 공부 잘하냐, 거기다 달리기 잘하냐도 있었다. 달리기? 싸움이랑 공부는 알겠는데 달리기? 싸움이랑 공부보다는 달리기에 자신 있었다. 어쩌다 2학년 중에 달리기를 제일 잘한다는 친구와 붙어서 비겼다. 금방 소문이 났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육상부에 스카우트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달리기를 잘하는지 몰랐다. 얼떨결에 육상부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다. 내가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뭐 하는 건지 아무 개념이 없었다. 어느 날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 육상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어릴 때 운동 잘못하면 머리만 나빠지고, 나쁜 친구들 사귀고, 우리나라에서 육상으로 잘 되기도 힘들고... 어찌 됐든 육상부를 나왔다. 재미도 없고 힘들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육상부는 아니었지만 4학년 때도 달리기는 꽤 빨랐다. 5학년 때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축구할 때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그냥 차고 달리면 아무도 쫓아오지 못했다. 달리는 것 만으로 여럿을 재칠 수 있었다.


6학년이 되었다. 5학년 때까지는 맨 뒤줄에 앉았는데 6학년이 되면서 가운데로 밀려났다. 갑자기 키가 크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상했다. 나보다 달리기가 빠른 친구들도 늘어났다. 그냥 차고 달리면 공을 뺏겼다. 달리기에 자신이 없어졌다.


달리기 대표를 뽑는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겸손한 척 다른 친구에게 나가라고 했다.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달리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 나를 앞지르는 기분이 더러웠다.


열세 살, 스스로 달리지 못하던 인간이 누군가를 달리게 하겠다고 소리쳤다. 친구가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달리기를 끝내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겁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또 열세 살을 더 먹고, 내가 변하는 건 두려우면서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덤비기 시작했다.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응원하고, 밀어붙였다. 막무가내였다. 스물여섯, 그렇게 코칭에 빠져들었다.




한 번의 코칭으로, 한 번의 강의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도 내가 하는 코칭으로, 내가 하는 강의로 가능할까?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코칭으로, 내 강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을까? 내가 과연 그런 깜냥이 되는가?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거창한 목표를 품었을까? 게다가 나는 얼마나 변화하고 성장했을까?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무기력해졌다. 결국 내가 15년 동안 한 건 뭐였을까?


어느 유명 강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어차피 자신의 강의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강의를 한다고 했다. 처음엔 직업윤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변화와 성장이 목적일 텐데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고 강의를 한다는 게 이상했다. 한편으론 그래서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편하게 강의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괜히 주제넘은 목표를 품고 혼자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뭔데 누구를 변화시킨다는 걸까? 체념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탈한 인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뭐라고... 깨달음이란 어리석다는 걸 아는 거라던데 드디어 나도 깨닫는 건가?



그런데...


도저히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집착이라면 집착이다. 욕심이라면 큰 욕심이다. 주제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래도 다시 믿음을 갖고 싶다. 의심을 넘어 확신하고 싶다. 어쩌면 그래야 많은 것들이 괜찮아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명하지도 않고 별 영향력 없다는 것, 수입이 많지도 않다는 것, 실력도 고만고만하다는 것, 왠지 실패한 인생 같기도 하다는 느낌을 자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믿고 싶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 사람으로부터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믿었던 건 내가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런 변화가 많아지면 결국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변하는 걸 도와준 사람처럼 나도 누군가 변화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5년이 흐르면서 믿음에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의심하기 시작한 건 나의 변화가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단 한 번의 코칭으로
단 한 번의 강의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다시 이렇게 믿고 싶다.

설사 그렇게 되든 말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코칭하고, 강의하고 싶다.

그리고

연기하고, 노래하고 싶다.


트로피가 가치가 있다면
(세상을 바꾸는)
그런 의미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 배우 송강호 -

 2017 올해의 영화상 수상소감 중에서



트로피는 없지만 꼭 트로피가 있어야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애써 오래전에 받은 트로피 같은 사진들을 찾아봤다. 청소년 강의를 할 때 받았던 오래된 사진을 찾았다. 다시 편지를 읽었다. 목에서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다시 믿기로 했다.

내가 하는 단 한 번의 코칭, 강의, 노래, 연기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저에게 코칭을 받고,
저의 강의를 듣고,
저의 공연을 보고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송강호 선배님 감사합니다.

곧 같은 작품에서 뵙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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