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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화 May 07. 2020

지나간 4년, 다가 올 40년 중에 뭐가 더 중요해요?

좋아하는 일을 찾았는데 전공과 다른 일이에요. 관련된 회사를 알아보는데 막상 취업을 하려니까 고민이 됩니다. 4년 동안 공부한 게 아깝기도 하고, 전공과 다른 일을 하자니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졸업을 앞둔 다른 과 남학생이었다. 어쩜 내 고민과 저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손들고 질문할까 말까 주저했는데 괜히 고마웠다. 교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을 기다렸다. 뭐라고 하실까? 힘내세요! 용기를 내세요!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걱정 말아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뭐 대충 이런 답들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학생에게는 '지나간 4년'과
'다가 올 40년' 중에 뭐가 더 중요해요?


와우! 이건 뭐지? '질문'이었다! 질문을 했는데 질문을 하셨다. 질문에 답을 하신 게 아니라 질문에 질문을 하셨다. 그런데 희한하게 답보다 강력했다.


저는 다가올 40년이 중요합니다!


질문한 학생은 머뭇거렸지만 나는 이미 대답해 버렸다. 물론 아무도 듣지 못했다. 갑자기 속이 뻥 뚫렸다. 그래, 지나간 4년이 뭐라고! 게다가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4년 동안 공부한 게 아까울 일은 없었다. 지금도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면 '건축' 보다 '응원'이라고 하는 게 마음 편하다. 건축 공부보다 응원단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질문을 받고 보니 전공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편으로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자니 불안한 마음이 앞서 전공을 핑계 대고 싶은 마음도 보였다. 다가올 40년은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극혐 하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이러겠다 저러겠다 다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지가 알아서 하게끔 도와주는 게 '코칭'이란 걸 알았다. 2006년 가을, 나의 인생 코치를 만났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인생 코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어떻게 하면 교수님처럼
코치가 될 수 있나요?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달라붙었다. 나도 코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꽤 귀찮을 수 있었을 텐데 교수님은 기꺼이 나의 코치가 되어주셨다. 그날부터 친구들이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러 도서관에 갈 때, 자원봉사 코칭을 하러 행사장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도 교수님처럼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하루는 교수님께 먼저 연락이 왔다. TV에 나간다고 하셨다. 그런데 취업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 역할이 필요하다며 함께 출연하자고 하셨다. 이건 또 무슨 복인가? 떨리는 마음도 있었지만 재밌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흔쾌히 수락하고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흑역사를 만들고 돌아왔다.


KBS 오천만의 일급비밀 출연 장면


당신의 변신을 도와드립니다!


'코치'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아직도 코칭이 뭔지, 코치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땐 더 심했다. 누군가의 변신을 도와주는 사람,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해답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코치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막막하던 스물여섯, 코칭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코칭을 통해 정말 변신이 시작되었다.


"형이 들었다는 교육이 뭐예요?"
"왜?"
"형이 좀 많이 변한 것 같아서요."
"진짜?!"
"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ㅋㅋ"


내가 변하는 걸 체험하지 않았다면 멈췄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명히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신기했다. 궁금한 게 더 많아졌다. 전문코치가 되는 과정을 알고 싶었다. 교수님께서 한 회사를 소개해 주셨다.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코칭 특강 안내가 있었다. 거금 3만 원을 내고 들으러 갔다. 수서역 로즈데일 빌딩 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국리더십센터' 간판이 보였다. 1년 반쯤 지나 매일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직원이 되었다.




지금은 코칭 시장이 레드오션이라고 한다. 2006년 코치가 되겠다고 덤빌 땐 다들 블루오션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코칭 교육을 들으러 가면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들이 많았다. 그분들께 어쩌다 그 나이에 코칭을 배우게 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코칭이 많이 알려졌을 때가 아니다 보니 주변에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좋은 교육을 들었다고 했더니 다단계에 빠진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럴만했다. 검색창에 '코치'를 치면 스포츠 코치가 검색되던 때였고 지금처럼 광고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전문적으로 트레이닝받은 1세대 청소년 코치가 될 수 있었고, 어디 가서 코칭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전문 코치가 되었다.


오늘도 인생의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이 검색 창에 고민을 쳐 넣는다. 명쾌한 해답을 얻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지만 왠지 적용하기 애매한 답을 받고 멈칫하는 사람도 많다.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자기 다운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코칭을 배운 덕분에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조금 덜 건방질 수 있었고, 조금 더 겸손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믿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알게 되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줄 수 있게 되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울지 마'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도 멋진 답을 주고 싶은 욕심에 허덕이지만 담백한 질문을 연습한다. 그날의 질문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40년 중에 14년이 지났다. 다시 한번 인생 코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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