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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화 May 05. 2020

왜 하필 '뮤지컬'이었을까?


Dream List

1: 뮤지컬 배우 겸 코치


"나 뮤지컬 배우 할 거야."
"뭐?"
"뮤지컬 배우가 될 거라고."
"니가?"

연극, 영화도 아니고 ‘뮤지컬’ 배우였다. 10년 넘게 노래방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놀라 자빠질만했다. 게다가 회사까지 그만두고 도전하겠다고 하니 당연한 리액션이었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무식한 놈이야. 그렇게 덤비기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멘토코치님이 하신 말씀이다. 설마 욕을 하시는 건 아니겠거니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냥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될 거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




"태화야, 넌 뮤지컬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헉! 뮤지컬을 하면 안 된다고? 처음 음감 테스트를 하고 들은 말이다. 뮤지컬은 어려울 것 같으니 연극이나 영화를 알아보라고 했다. 얘기하던 음악감독님의 표정과 말투가 선명하다. 듣고 있던 나의 표정과 마음도 생생하다. 앉아있던 자세, 의자의 딱딱함, 가슴속 막막함이 또렷이 기억난다. 온몸의 땀구멍으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란 걸 그때 제대로 알았다. 절망의 3초가 흐르고 입을 뗐다.


그래도 뮤지컬을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나요?




2010년 3월 31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Dream List 1번의 '코치'는 이루고 나왔다. 이제 뮤지컬 배우 차례다. 서른 살 봄, ‘다시 시작하기’를 클릭한 것처럼 인생이 리부팅되었다.


4월 1일 아침, 만우절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하루아침에 회사를 때려치운 걸로 들으면 대단히 과감한 결정 같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무식하고, 음악적 재능도 없는데 겁까지 많은 사람이군. 그러니 단박에 뮤지컬 배우에 도전한 건 결코 아니다.


그럼 시작은 언제라고 해야 할까?


2008년 12월 3일, Dream List 1번에 ‘뮤지컬 배우 겸 코치’라고 적었을 때?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니까... 2006년에 들었던 리더십 수업 때? 리더십에 관심이 생겨서 수업을 신청한 건 2002년 응원단장 경험 때문이니까 그때 같기도 하고... 건축과로 입학하긴 했지만 연극영화과에도 원서를 넣었으니 2000년이 시작일 수도 있겠다. 이건 뭐 어디까지 거슬로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10년 넘게 찔끔찔끔 꿈틀거리다 서른 살에 겨우 꿈의 틀을 마련했다.


2008년 12월 3일 미니홈피에 업로드했던 Deam List


2006년에 수강했던 리더십 수업 <셀프리더십과 비전 만들기>


몇 번의 오디션으로 당장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버티자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지금은 박호산 배우로 유명해진 박정환 형도 그랬다. (당시는 개명하기 전이다.) 소주 한잔 하던 날 팔씨름을 하듯이 팔꿈치를 대더니 주먹을 꽉 지고 말했다.


"태화야, 대학로는 버티는 곳이다."


회사를 그만 두고 도전하겠다고 하던 날, 박호산 배우에게 받은 싸인


나름 버틸 준비는 했다고 생각했다. 틈틈이 코칭을 하면서 돈을 벌고, 오디션을 보러 다닐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돈을 아껴야 했다. 다이어트도 할 겸 세 달 동안 주로 감자와 당근으로 끼니를 때웠다. 돈암동 시장에서 2천 원어치씩 장을 보고 오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6월에는 월드컵 응원 알바를 뛰며 그야말로 '버텼다'.


가끔 강의나 코칭을 해서 돈을 버는 날에는 참치캔을 땄다. 나름 고기반찬을 먹는 자축 이벤트였다. 요즘도 참치캔을 보면 반사적으로 성북동 원룸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정도는 무명 배우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 고생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이야기하는 나도 담담하다.


2010년 봄, 일기장에 그렸던 당근


2010 남아공 월드컵 응원 알바


정말 고생스러운 건 배고픔이 아니었다. 돈이 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거였다. 정신이 허기지고 가난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버거웠다. 그들은 결단을 내린 나에게 힘이 되기보다 짐이 되었다. 걱정과 염려는 불신의 다른 말이다. 그들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선의로 포장된 의심이었다. 좋아하는 일일 뿐 잘하는 일은 아니니까 취미로만 하라고 했다.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 같다고도 했고, 부잣집 자식도 아닌데 돈은 어떻게 벌거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꿈은 돈의 반대말쯤 되는 것 같았다. 초연하고 싶었다. 스스로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의지할 것은 꿈 밖에 없었다. 나의 능력은 믿지 못해도 나의 꿈은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왜 하필 뮤지컬이었을까?


지금도 이유를 모른다. ‘그냥’이다. 스스로 가장 진실한 답이다. 꿈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누군가를 왜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이유가 없는 것처럼.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질 때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나에게 꿈이 그랬다.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흔이 되어서도 새로운 꿈을 꾼다. 2008년 ‘뮤지컬 배우’라고 썼을 때처럼 또 누군가는 비웃고 말릴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나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시작은 매일 다시 시작된다.


Dream List 2020 ver.

1.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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