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화 May 02. 2020

한석봉 위인전 부작용 치유기

출처: 네이버 어린이 백과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불을 켰다. 떡의 굵기는 일정하고 가지런했다. 그러나 한석봉의 글은 형편없었다. 어김없이 한석봉은 엄한 어머니께 혼이 났다. 명필을 키워낸 어머니의 인상적인 교육 장면이다. 오늘 이 미담에 딴지를 걸어본다. 한석봉 위인전을 읽고 생긴 오랜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 자식을 키우는 어머님들은 다소 불편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참 독한 엄마다. 오죽하면 불을 끄고 떡을 썰 생각을 했을까? 한석봉은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손을 베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을 것이다. 당연히 집중하기 힘들다. 그런 것 따위 핑계 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엄마 손에 피가 나든 말든 글만 잘 쓰면 되는 건가? 한석봉이 걱정했다는 근거는 어디 있냐고? 위인전에 그려진 한석봉은 그럴만한 캐릭터다. 나름 배우로서 분석한 결과다. 근거가 될 만한 사례가 또 있다.


너는 하라는 글 연습은 안 하고
냇가에 나와서 놀고 있냐?!


그날도 엄한 어머니가 한석봉을 꾸짖는다. 한석봉은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놀고 있던 게 아니었다. 한석봉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먹과 종이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글 연습을 하기 위해 종종 냇가로 갔다. 붓에 물을 찍어 바위에 글 연습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 한석봉을 보고 어머니는 ‘또’ 크게 꾸짖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아이를 혼낸 격이다. 물론 의도야 아름답지만 분명한 착각이다. 그러나 한석봉은 반항하거나 해명하거나 대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를 걱정했다.


내가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가난해서 먹과 종이도 못 사주는 어머니는 얼마나 미안하실까?
그래 어머니 마음이 아프지 않게 말하지 말자.


한석봉은 침묵을 택했다. 이 얼마나 속 깊은 대처인가? 어릴 적 나에게 이 일화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의 부작용도 시작되고 말았다.


역시 위인은 다르구나.
정말 속이 깊구나.
저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구나.
진정한 효자란 저런 모습이구나.


한석봉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집도 꽤 가난했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일로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아주 어릴 적 다짐이 아주 오랜 시간 이어졌다.


고등학생 때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배경을 알게 되었지만 학교에서 특정 문제집을 사라는 강요가 많았다. 분명히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수업 시간에 문제집을 가져가지 않으면 선생님께 맞았다. 한 학기에 몇 권씩 문제집을 살 형편이 아니었던 나는 쉬는 시간마다 문제집을 빌리러 다녔다. 내가 샀던 문제집은 딱 한 권 밖에 없었다. 그 한 권이라도 열심히 풀면 성적이 오를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학교에서 이것저것 사라고 할 때마다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혹시라도 이야기하면 어머니께서 돈을 빌리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어쩌다보니 반장이 되었다. 그런데 2학년 반장들만 일본에 탐방을 가는 행사가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학교의 전통이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도 가고, 일본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학교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비용을 개인이 내야 했다.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서 말씀드렸다. 우리 집은 그럴 만한 돈이 없으니 대신 부반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결국 일본 탐방은 부반장이 갔다. 들뜬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던 00의 표정이 선명하다. 애써 쿨한 척 잘 다녀오라고 했지만 엄청 부러웠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엄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너무 마음이 약해서 손해 보는 일이 많은 분이셨다. 나는 한석봉과는 다르게 반항도 많이 하고 말대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돈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도 나름 속 깊은 효자라는 착각도 했다.


부작용이라고 부를 정도의 증상(?)은 침묵에서 발견됐다. 혹시 상대에게 상처가 될 것 같은 말, 상대가 민망할 것 같은 말, 상대가 오히려 나에게 너무 미안해할 것 같은 말들은 하지 않는 나를 보았다. 조심스럽고 배려하는 태도는 좋지만 지나치게 염려가 많은 것은 불편하기도 했다. 게다가 모든 판단은 나의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틀리는 경우도 많다. 혼자 배려하는 줄 알고 착각하기도 하고, 침묵으로 인해 종종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때로는 좋은 의도로 포장해서 '그냥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하는 회피로 이어지면 마음 한편에 짐이 쌓이는 기분도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한석봉 위인전에서 엄청난 가르침을 얻었다고 믿고 살았다. 그러나 문제는 한석봉이 위인도 아닐뿐더러 한석봉의 태도와 어머니의 훈육방식도 배울 게 못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석봉은 글씨만 잘 썼을 뿐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식수준도 낮아서 관리직을 뽑는 대과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처리도 못하고 성격에 문제가 많았다.

(참고: https://ppss.kr/archives/84360)


그러고 보면 한석봉 어머니의 훈육 성과도 대단할 게 없으니 불 끄고 떡 써는 이야기에 그리 감탄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서운 엄마한테 혼날까 봐 억울한 얘기도 못한 건 얼마나 가슴 아픈가? 위인전이라 아름답게 포장되었겠지만 긍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한석봉 위인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진실이 무엇이든 배려하는 마음은 배우되 지혜롭게 표현하는 것도 함께 하고 싶다.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어떻게든 부모를 만족시키고 싶은 자식의 마음, 그 선한 마음들이 진실되게 표현되고, 상처없이 공유되면 좋겠다. 위인전의 단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사례 너머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싶다. 한석봉씨 안녕히 가십시오.





 

매거진의 이전글 꿈을 좇은 지 딱 10년째 되는 날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