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1일, 생애 마지막 퇴근을 했다. 회사원이라는 역할은 끝났다. 2010년 4월 1일,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잠들기 전에는 늦잠이나 실컷 자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눈이 떠지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희한하게 더 말똥말똥 했다. 오늘부터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라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과감한 도전과 선택을 축하 받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 진짜 그만 뒀다. 오늘부터 프리랜서다!]
돌아오는 답으로 ‘잘 했다!’, ‘멋있다!’, ‘대단하다!’를 예상했다. 응원과 격려, 내심 부러움을 기대했다. 그런데 실제로 온 문자들은
[안 속는다!]
[재미없다]
[일해라]
비장한 나의 메시지가 만우절 장난인 줄 알았나보다. 2010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백수가 되었다.
서른 살이었다. 프리랜서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배우가 되기로 했다. 각오는 비장했고, 현실은 비참했다. 배우로서는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졌고, 강사로서는 강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렇게 해서 될까?’하는 두려움이 반복 됐다. 자신감과 두려움에 이랬다저랬다 미친놈 같았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는 거 아니냐며 나를 달랬다. 그러다 또 막연한 두려움에 미칠 것 같았다.
어쩌다 강의가 들어오면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자칫 강의를 망치면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 강의 준비에 몰입을 하면 화장실에 갔다 오는 시간도 아까웠다. 잠깐 자리를 뜨는 사이에 몰입의 끈이 끊어지는 게 싫었다. 그 때의 시간들이 익숙해져서 요즘도 5시간 이상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예사다.
‘시작은 어떻게 하지?’
‘이 화면을 띄워놓고 무슨 얘기를 할까?’
‘이 장면에서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청중들이 이 대목에서 어떤 반응을 할까?’
‘횡설수설 하는 거 아닌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마지막 멘트는 뭐라고 할까?’
고민은 끝이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꼬리를 찾을 수 없는 꼴이 될 때 까지. 강의 준비를 끝낼 때는 ‘이 정도면 됐어!’ 보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였다.
유독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 날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일부러 화장실에 갔다 와도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왠지 모를 초조함, 그 때다. 뭔가 스쳐지나 갔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몰랐지만 얼른 붙잡고 싶었다. 이 기분은 뭐지? 기분 탓인가?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강의도 공연이다!
이거다! 강의를 준비하는 내가 오디션을 준비하는 배우 같았다. 그 초조함, 간절함, 막막함, 두려움, 설렘, 이 미친 기분들이 오디션을 준비할 때와 같았다. 순간 초능력 같은 엄청난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신비한 연결고리를 찾았다.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 강의와 공연이 다르지 않다! 전달하고자 하는 강의 내용은 대본이다. 강사인 나는 곧 배우다. 배우이자 작가, 연출, 감독이다. 대본도 내가 수정한다. 이번 강의는 어떤 장르로 연출할 지 고민한다. 정해진 강의 시간은 공연 러닝타임이다. 내가 ‘컷!’을 외치고, 내가 ‘오케이!’를 외친다. 청중과 분위기에 따라 의상도 달리 한다. 무심코 활용하던 동영상도 새롭게 연출한다. 음악은 정해진 순간에 나와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의상감독도 음악감독도 전부 내가 된다. 강의가 공연이 되는 순간 강의 자료는 소품이 되었다. 강의 화면은 무대 디자인이다. 나는 강사를 연기하는 배우이자, 강의를 연출하는 감독이다. 비록 프로 연극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아무도 나를 배우로 인정하지 않을 때지만 나는 배우였다. 강의라는 일이 설레는 공연이 되었다. 청중은 관객이다. 강단은 무대고, 나는 1인 기업이 아닌 1인 극단이다. 강의가 공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의 일상이 작품처럼 다가왔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무대다.
‘강사’라는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한 노력이 곧 연출이다. 강단에 서는 순간 강사라는 역할에 몰입하는 것은 연기와 같다. 우리는 삶을 연출하고, 역할에 몰입하는 연기를 한다. 그야말로 메소드 연기다. 인생 연출은 세상을 무대로, 삶을 아름다운 예술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