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이자 치유자인 정혜신 선생님의 책, "당신이 옳다"를 보면,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온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되며, 그렇게 되면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닌 것이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상대방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그저 비수일 뿐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옳다" p. 106.)
결국 타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모든 얘기가 바로 '충.조.평.판'인 셈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 삶 속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말들이 바로 이 '충.조.평.판'에 해당한다.
이러니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받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림책 중에서에도 '충.조.평.판'에 대한 주제를 다룬 것들이 꽤 많다.
'충.조.평.판'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해, 앞으로 그림책 네 권 정도를 시리즈로 다뤄볼까 한다.
그 첫 번째 그림책은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제발"이다.
곰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 문제가 조금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러자 사람들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한다.
"말하지 않아도 돼. 뭐가 문제인지 난 척 보면 알아."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할 때 곰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데, 이 부분이 재밌다.
의사는 약을 주고,
모자 가게 주인은 모자를 주고,
안경점 주인은 안경을 주고,
신발 가게 주인은 신발을 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다들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처방을 제시한다.
곰의 문제가 뭔지는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이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아마 곰을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곰이 자신에게 아무런 소용도 되지 않는 수많은 도움을 받은 후에 느낀 감정은, '피곤하다'였다.
그래서 드디어 작은 파리 한 마리가 곰에게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을 때도,
"아, 그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내 얘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지친 것이다. 좌절한 것이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포자기해버린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제일 가슴 아팠다.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그 답답함과 막막함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이렇게 되버리면 누구든 입을 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아이가 입을 닫게 되면, 엄마들은 아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면서,
제발 말 좀 하라고 다그치곤 한다.
하지만 아이가 입을 닫게 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말해봤자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아이는 더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말해봤자 더 지치고 힘들기만 하니까.
나는 주로 이럴 때 입을 닫는다.
말해봤자 상대방에게 빌미를 제공하거나, 상황이 더 악화될 게 뻔할 때,
말해봤자 어차피 상대방은 자기 생각만 고집할 거라는 확신이 들 때,
말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이 들 때,
말해봤자 내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을 때.
이런 패턴이 계속되면, 나는 그런 상대방과는 그야말로 피상적인 관계만을 맺게 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 아무 의미도 없는 표정,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
그저 사회적 관계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액션만 취하게 된다.
만약에 내 주변이 전부 그런 사람들로만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얼마나 팍팍하고 쓸쓸할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충고나 멋진 조언을 해주려고 고민하는 시간에,
그 사람이 힘들어하는 게 뭔지부터 물어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촉촉하고 따뜻해질까!
입을 열기보다 귀를 먼저 열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