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트레이스 유
스포일러O
한 인물의 여러 자아를 표현하는 작품은 2026년 현재 셀 수 없이 많다. 뮤지컬 '트레이스 유'는 그런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소재로 하는 창작 뮤지컬 중에서도 고전 격으로, 홍대의 클럽 드바이를 배경으로 두 인물 우빈과 본하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나르키소스 신화는 작품 곳곳에서 차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2년 트라이아웃 이후 7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트레이스 유는 25년 12월 5일부터 26년 3월 1일까지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공연된다. 이번 시즌에 뮤지컬 트레이스 유를 처음 관극했으며, 이 글을 쓰는 현재 1n회차 관람했다.
본고에서는 뮤지컬 트레이스 유에서 차용한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나르키소스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고, 작품의 특징과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인다. 이 글은 트레이스 유 7연(오루피나 연출), 이종석 우빈과 신은총 본하 페어의 공연을 바탕으로 쓰여졌음을 명시한다.(워낙 배우에 따라 해석과 방향성이 달라지는 공연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우빈 역의 배우를 이종석 배우로만 봐서 먼저 이야기한다.)
어쩌면 다들 아는 얘기 또 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
1. 플롯과 즐거리
트레이스 유는 이중 플롯으로 메인 플롯인 우빈과 본하의 관게, 서브 플롯인 본하와 여자의 관계가 밀접하게 얽히며 진행된다. 트레이스 유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수사극의 형태를 띄지만, 플롯의 구성이 그와 상반된 형태다. 사건은 명확히 과거에 벌어졌지만, 그 근원을 추적하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부터 벌어진 문제의 원인을 찾는 <오이디푸스 왕>의 단일 플롯과 상반된 형태이며, 사실 이 작품에서 추적하는 대상은 살인의 범인보다 '본래의 자아'에 가깝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지러운 세상 깊은 곳에 갇혀있는 날 꺼내줘
홍대 소재의 락 클럽 '드바이(DEVBAI)'. 기타리스트 우빈과 보컬 본하. 매일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본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여자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 본하는 그날 이후로 그 여자 외에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다. 클럽의 벽면에는 본하가 그린 여자와 온갖 낙서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우빈은 그런 본하를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그를 달랜다. '두통약'은 우빈이 쥔 고삐와도 같다. 본하는 끊임 없이 두통약을 찾고 우빈은 그 두통약을 인질 삼아 본하를 틀어쥐려한다. 본하는 우빈에게 자신이 그 여자에게 새벽 4시에 만나자는 쪽지를 줬다고 말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본하는 노래하길 여전히 거부한다. 우빈은 그런 본하 대신 노래하고, 무대가 끝난 후 나타난 본하는 그녀를 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를 찾기 위해 클럽 드바이를 나가자고 말하는 우빈. 그들은 잠시 클럽을 나가 무엇을 해야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다시 찾아온 본하의 두통. 이번에는 우빈이 순순히 약을 내어준다. 본하가 약을 삼키자마자 우빈은 그와 연결 된 듯 두통을 느끼며 쓰러진다. 새벽 네 시. 마침내 기다리던 그녀가 비를 뚫고 클럽 드바이에 도착한다. 본하는 그녀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본하의 고백은 거절 당하고, 그의 앞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날 밤 본하의 기억엔 그녀와 자신 단 둘 뿐이었다. 본하는 그녀를 죽인게 자신이라 확신하지만 우빈은 네(본하)가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살해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완전히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그녀는 드바이에 와서 본하에게 자신이 본하의 생모임을 밝히고 살해 당한다. 본하는 우빈의 조종 아래 자신은 그녀를 사랑할 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도 없다는 진술을 한다. 진술 후 본하는 우빈과 함께하기 역겹다는 이유로 그를 떠나려하지만, 우빈은 우리는 절대 서로를 떠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둘은 같은 몸을 공유하는 두 개의 자아였기 때문이다. 본하의 기타 케이스 안에는 그동안 우빈이 숨겨놓은 약들이 가득 들어있었고, 우빈은 병원을 탈출하기 위해서 본하가 꼭 필요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빈과 본하 둘 중 하나가 그 약을 먹고 사라졌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은 함께 정신병원을 탈출한다.(아마도.)
관계가 주가 되는 플롯은 '그 여자와 본하는 어떤 관계인가?'부터 시작해 결국 '우빈과 본하는 어떤 관게인가?" 까지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우빈과 본하가 한 사람이라는 것. 결국 관객의 호기심은 어떤 자아가 여자를 죽였느냐를 넘어 둘 중 누가 본체의 주도권을 쥐었는가?로 이전된다.
트레이스 유는 결말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공연이다. 배우들의 의지에 따라 드바이(정신병원)을 탈출하기도, 자아 자체가 소멸하기도 한다. 이는 좋게 말하면 다양한 시도를 볼 수 있고 나쁘게 보면 연출이 책임을 완전 회피해버린 결과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오첨트유(오늘 처음 만드는 트레이스 유)의 성격은 분명 공연의 흥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구본하는 오이디푸스일까?
소포클레스의 불멸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단일 플롯과 수사극이라는 특성, 운명의 굴레라는 주제 아래 현재까지 읽히는 고전이다. 뮤지컬 '트레이스 유'에서는 제2주인공 본하의 특성에 오이디푸스 왕을 차용했다. 크게 존속 살해 모티브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것이다. 신화에 밥 먹듯 나오는 존속 살해 모티브가 굳이 오이디푸스를 연상하는 이유는 가사에 내포된 의미와 그의 작품의 전반적 흐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세상 모두 잠들어 두 발 머리 거꾸로
황금 빛을 흔들어 두 눈 깊이 찌르고
위 가사는 트레이스 유의 넘버 <미친 밤>의 가사로, 노골적으로 오이디푸스의 특성을 보여준다. ‘세상 모두 잠들어 두 발 머리 거꾸로‘ 이 가사는 오이디푸스의 탄생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의 부모는 그들과 아들에게 메어진 운명의 굴레를 뿌리치고자 오이디푸스 태어나자마자 두 발목이 꿰어 깊은 산 속 나무에 메달아 버린다.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그때 한 목동에게 구조되는데 이 시점이 오이디푸스의 긴 생애의 시작. 즉,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 빛을 흔들어 두 눈 깊이 찌르고' 이는 오이디푸스의 최후를 의미한다. 소포클레스는 신화를 비극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단죄하는 과정을 새롭게 그렸다. 작품 말미에 오이디푸스는 눈 앞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을 원망하는데, 결국 그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멀게 한다. 그 뒤로 스스로를 테바이에서 추방하고 평생 떠돌아다니다 사망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플롯이라는 개념을 처음 확립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찬한 비극다운 비극이다. 플롯은 스토리의 배열로, 시간과 관련 없이 작가의 의도대로 배열된 희곡의 구성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플롯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플롯의 처음-중간-끝이 긴밀하게 연결될 때 관객이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 왕>의 플롯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되짚어가며 문제의 원인을 찾는 수사극 형태로 하나의 이야기가 전체를 지탱하는 ‘단일 플롯‘의 성격을 띈다. 이 작품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언급한 플롯의 형태로 살펴보자면 이렇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 닥친 전염병과 자연재해를 해결하기 위해 신탁을 받는다. 이유와 해결방법은 테바이의 오염을 쫓아내면 된다는 것.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에게 테바이의 전 국왕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적하게 된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그 살해자를 찾아내 엄벌하겠다고 공표한다. 이 일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불러오지만 그는 쉽사리 진실을 내놓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그를 조롱하자, 테이레시아스는 오히려 오이디푸스를 비난하며 천륜을 저버렸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예언자의 말을 힌트 삼아 하나 둘 사건의 실마리를 풀자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나아가 오이디푸스의 인생에 드리워진 운명을 상기시킨다.
과거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은 그를 방랑의 길로 이끌어 테바이에 닿게 한다. 테바이에 도착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시민들의 재앙이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추고, 테바이의 왕좌에 오른다. 마침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남은 라이오스의 아내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 코린토스의 왕 랍다코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신탁으로부터 해방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지금, 예언가 테이레시아스가 그 신탁을 다시 언급했다.
이오카스테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버린 아들과 그에 얽힌 비극적인 신탁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할 아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그 신탁으로부터 평생을 도망쳤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잉태된 아들은 출산 하자마자 발 뒤꿈치를 밧줄에 꿰어서 산에 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 노인에게 구조되어 옆 국가, 코린토스의 왕에게 입양된다. 그리고 지금.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자 남편의 자격으로 자신 앞에 서 있다. 모든 신탁을 이루어졌다. 그럼, 이제 심판의 시간이다.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를 테바이에서 추방한다. 한 때 테바이의 영웅이었던 그는 한 순간에 추락하고, 테바이는 또 다른 혼란에 빠진다.
<오이디푸스 왕>은 현재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밝히며 진실을 찾는다. 스토리가 시간 순서대로의 이야기라면, 플롯은 작가가 보여주는 대로 따라가는 이야기다. 즉, 오이디푸스는 작품의 전사가 현재를 만드는 형식이다.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한 모든 행동이 결과적으로 운명을 실현시키는 인과적 행동이라는 비극. 인간을 둘러싼 운명의 수레바퀴를 보여준다. 완전해 보이는 인물이 몰락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사소한 성격적 결함(하마르티아, Hamartia) 때문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영웅이 사소한 결점 때문에 몰락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모든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이런 플롯은 관객을 사건 속으로 끌어들여, 흥미를 유발하고 종내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오이디푸스라는 개인의 비극을 통해,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리며 비극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우울의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는 뜻이다.
하지만 트레이스유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는 영 재주가 없다. 여자를 죽였다는 것 자체가 작품 말미에 등장하고, 그 전까지는 클럽 드바이라는 공간에서 노래하고 실랑이하는 장면이 거의 전부다. 궁금하다면 자첫러를 잡고 그들에게 트레이스 유 후기를 물어보자. 10명 중에 8명은 가사도 안들리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후기를 내놓는다. 트레이스 유는 작법 상으로 시작과 끝이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이 아니며, 관객의 완전한 몰입을 필요로하는 극도 아니다. 라이브 밴드와 락이라는 장르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무게를 둔 작품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구본하는 오이디푸스인가?를 살펴봤을 때, 나는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고 싶다. 이는 그 둘을 이루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모두 포함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즉, 오이디푸스와 구본하는 상황만 같고 취하는 태도는 반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늘 선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한다는 신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신이 그에게 내린 예언은 신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자신의 의지가 오히려 절대적인 신의 영역에 겁 없이 도전장을 내민 꼴인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정해진 운명과 맞서 싸우려다가 부지 간에 신적인 것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꼴이 되었고 그 결과 그가 통치하는 테바이는 그로 인해 고통 받게 되었다.
박수미.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자유의지와 저항정신." 국내석사학위논문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4. 강원특별자치도
오이디푸스가 대내외적으로 완전한 선의 수호자를 자처했다면 구본하를 구성하는 데에 선의 의지 따위는 없다. 구본하는 오히려 신을 버린 현대인으로 보인다. 신화의 시대가 저물고, 지금에 왔을 때, 굳이 신이 없다고 미쳐버리진 않을테니까.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영웅이라면, 구본하의 역할은 드바이의 보컬 정도다. 둘은 그만큼 지고있는 책임도 행동도 다르다. 자신의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테바이에서 추방하는 오이디푸스와 자신의 역할인 보컬마저도 여자 때문에 포기 해버리는 구본하. 그에게 신의 질서를 지키는 것 따위도 크게 관심가는 일은 아니다. 후반부의 넘버 날 잡아줘에는 본하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만약에 그 어떤 신이 내가 너를 사랑한 죄로
세상을 파멸시켜도 난 너만을 사랑할거야.
여기서 언급하는 '죄'를 천륜을 배반하는 일, 즉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해석해보자.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인물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오이디푸스의 추락도 이 운명의 질서를 거스르려했다는 것이 시발점이니까. 그렇다면 본하는, 이 벌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혹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과 같다.
두 손을 놓치지 말고
하늘 위로 날아 올라가
작품의 전반에 걸쳐 본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을 날아 오르거나, 바다 물고기가 산을 기어오른다거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구본하의 마음은 이미 신의 질서에 동조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유아기 아동이 동성 부모에게 적개심을 느끼고 이성 부모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참으로 안타까운 건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를 때 동침한거지, 알고 나서는 자신의 눈을 직접 파버렸다는 점이다. 구본하는 다르다. 자신이 오이디푸스라도 사랑을 계속하겠다는 것. 여기부터 구본하는 이미 오이디푸스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다. 무엇보다 신과 대적하겠다는 자세, 참 연극 뮤지컬에 알맞는 인물상이지 않은가?
존속 살해 모티브로 넘어가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한다. 누군가는 지나가던 사람을 살해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문제를 내놓을 수 있겠으나, 그때는 그게 그리 문제되는 일도 아니었을 뿐더러 쌍방폭행으로 시작한 문제였다는 거다. 오이디푸스는 사실 효자다. 가만히 있으면 왕자로 지내다 물려받을 코린토스를 떠나온 이유도 신탁처럼 천륜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니까. 폐륜아가 되지 않기 위해 떠나온 길에서, 폐륜아가 되었다니 측은한 일이다. 그렇다고 라이오스는 오로지 피해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좁은 길에서 오이디푸스의 마차와 라이오스의 마차가 대치했을 때, 먼저 채찍을 휘두른 것은 라이오스였다. 그리고 라이오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살인자였다는 사실. 테바이는 땅 자체가 저주받았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해보기로 하자.) 아무튼 오이디푸스는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까지 최악의 남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랑의 길이 오이디푸스를 운명의 끝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그리스 비극의 재미있는 점이다.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반면 구본하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진짜 구본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구본하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구본하가 죽인건 엄마다. 작품 상으로는 우빈이 죽였다지만, 어쨌든 그 둘은 같은 인물이니까. 결론적으로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를 죽인거다. 점점 구본하가 오이디푸스일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구본하가 오이디푸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이디푸스한테 아주, 실례일 수 있다.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구본하와 달리 오이디푸스는 자만심이 조금 강한, 안타까운 사람일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사는 내내 신의 질서를 지키려했다.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영웅이다. 구본하는 신의 질서따위 지킬 생각 없는 사람이다. 둘은 명백히 다른 특성의 인물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에서 끌어온 소재로 만들어진 인물이 구본하라는 점은 참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 이우빈은 나르키소스일까?
사랑이란 덫에 걸린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느 소년
운명처럼 만난 그 얼굴을 찾아 맹세했어 영원토록 너만 사랑하리
이우빈의 첫 번째 솔로 넘버, <어느 소년 이야기>는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이종석 우빈 한정일지도 모르지만.) 우빈은 '유성처럼 빛이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느 소년'이라는 가사를 부르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이 노래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제스쳐다. 프로그램북의 해설에 따르면, 이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빌려 우빈과 본하가 서로 분리될 때를 표현한 넘버다.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인데, 이 소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있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의 어머니에게 그가 자신의 얼굴만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소년으로 자란 나르키소스는 그에게 구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냉소적으로 대했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매번 상처를 입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르키소스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한 사람이 복수의 여신을 찾아가 '그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해주세요.' 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신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나르키소스가 다니는 샘물에 마법을 걸었다. 그렇게 나르키소스는 강물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강물 속의 사람은 그가 입을 맞추려고 하면 계속 사라졌다. 나르키소스는 몇날며칠을 강물 앞에서 사랑에 빠진 그 얼굴을 바라봤자먼 이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탄에 빠진다. 불가능한 사랑에 한참을 슬퍼하던 나르키소스는 끝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판본에 따라 그곳에서 아사했다거나 물 속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뮤지컬 트레이스 유에서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이 사랑에 빠진 상대가 있는 물 속으로 빠져 죽었다는 버전을 차용한 것 같다. M2.어느 소년 이야기에서 언급한 나르키소스의 최후는 가사를 통해 확인하자.
소년의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물 속에 빠져 버려 깊이 가라앉았어
이우빈은 나르키소스다. 본하가 여자(생모)를 사랑하는 것 처럼 우빈은 본하를 사랑한다. 처음에는 대체 우빈이 본하를 어떻게 사랑하는거지? 라는 의문을 품었다. 나르키소스 신화를 거창하게 인용하면서, 관객이 그 신화와 우빈의 이야기를 완전히 연결짓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 보니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빈이 본하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선의 방향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본하는 시종일관 상수 벽에 그려진 여자의 낙서(이하 그녀)를 바라본다. 넘버, '아름다운 그녀'에서 본하는 우빈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난 점점 더 특별해져. 내 시간을 멈추는." 가사와 함께 무대 위 배우를 보면 각자 사랑하는 대상의 방향으로 서 있다.(내 두 눈은 그녀만 보고, 내 두 발은 그녀를 향하네.) 이때 시선의 방향은 우빈 > 본하 > 그녀 순서로 나타난다. 이런 시선은 본하가 여자를 만난 후 부르는 넘버 '날 잡아줘'에서도 같은 순서를 보인다. 무대 가운데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자(관객석)를 바라보는 본하 뒤로 우빈이 보인다. 우빈은 객석을 보지 않고 시선을 위로 둔 채 손을 뻗는데, 꼭 누군가의 손을 갈구하는 형태다. 그 위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던 우빈은 사라지기 직전 '널 사랑해' 라는 가사를 부르며 시선을 무대 가운데 서 있는 본하로 돌린다. 명확한 표현이다. 우빈은 본하를 사랑한다.
이우빈이 나르키소스라면, 자연스럽게 본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앞선 글을 보았을때,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진 것은 우빈이니까 우빈이 본체다. 라는 주장을 펼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둘 중에 진짜 본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가사는 물 속의 소년이 물 밖의 소년에게 하는 말이다.
"소년의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나의 손을 잡아줘 난 네가 필요해."
공연 초반 넘버에 등장하는 이 가사는 후반에 가서 우빈이 본하에게 하는 대사로 또 다시 등장한다. 병원을 탈출하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다는 말. 넘버 나를 잡아줘에서 위를 바라보며 손을 뻗는 동작은 파란 조명을 받아 더욱 우빈이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필자는 나르키소스적 특성이 전부 이우빈에게 쏠려 있다고 생각한다. 물 밖과 안의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의 주체가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는 뜻이다. 이우빈에서도 오이디푸스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구본하에게서도 나르키소스적 특성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4. 후기
트레이스 유는 완성도 있는 공연이 아니다. 긴밀한 플롯의 연결도 없고, 대부분의 중요한 힌트를 넘버로 해결해버린다. 그 가사마저도 밴드세션 소리에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처음 관람했을 때는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갔지만 모든 사건의 시작이 '이게 이렇게 시작된다고?'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첫 후기가 정말 별로 였는데, 지금까지 많이도 봤다. 고로 이 글은 작품을 객관적으로 본 글이라고 하기엔 크게 무리가 있다. 약먹으면 사라지는 너는 나. 나는 너. 그리고 엄마가 죽었다. 핵심 갈등이 이것 뿐인 공연이 무려 400석가량의 극장에서 올라가는 데 이제 유감은 없다는 뜻이다.
대체 이 공연의 무엇이 사람들을 회전의 길로 이끄는가? 퍼포먼스적인 부분과 오늘 못 보면 오늘의 엔딩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런 이유로 너무 과열되어 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지만, 사랑했던 공연은 절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후회는 없다. 모든 관객들이 반짝반짝이(입장 밴드)를 들고 정신과 약 이름을 외치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그들과 동화된 모습이 참 놀라웠다. 홍대 최고의 락클럽 드바이라는 곳에서, 고대 그리스를 떠올릴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강력하게 추천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보러 오시길.
끝.
참고도서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김대진, 민음사.
토마스 불핀치, <그리스 로마 신화>, 손명헌, 동서문화사.
25-26시즌 뮤지컬 <트레이스 유> 프로그램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