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데카브리
1825년 젊은 귀족 장교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데카브리스트의 난.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뮤지컬 <데카브리>는 동료 데카브리스트들을 배신한 검열관 '미하일'과 농노 출신의 정서관 '아카키', 귀족주의로 무장한 '알렉세이'로 대표되는 세 가지 입장과 상황을 적절히 섞은 역사픽션이다. 2025년 9월 10일부터 2025년 11월 30일까지 NOL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공연된 뮤지컬 <데카브리>의 역사 배경과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김찬종 배우의 아카키를 고정으로 타 배역의 모든 배우를 관람했다.(총10회) 사실 캐릭터에 대한 분석보다는 배경 역사 설명에 가까운 글이 될 것 같다.
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교육의 세계사 수업을 듣다보면 러시아는 교과서의 2/3 부근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사에서도 갑자기 대한제국 말미에 이름을 들어내는 나라인 만큼 러시아는 세계사에서도 비슷한 위치다. 유럽이 중세라는 중앙집권의 암흑기를 지나, 절대 왕정이라는 근대의 초석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러시아의 이름을 꺼내놓는다. 러시아의 유럽화를 진행했던 로마노프 왕가의 표트르 대제가 그 주인공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유럽화 시키고 싶었고, 그 발판으로 유럽을 본딴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직역하면 표트르 대제의 수호 성인, 성 배드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에 대한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은 이름 자체로도 독일식이다. (상트 = 성 / 페테르 = 베드로 = 표트르 / 부르크 = 독일식으로 '도시'라는 뜻)
이 이름은 훗날 러시아가 독일과 대조국 전쟁(제 2차 세계대전)을 벌일 때 한번 더 논란이 되어 바뀌기도 한다. 아무튼, 핀란드와 인접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늪지대로 도시를 세우기에 알맞은 땅은 아니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는 많은 농노들을 활용해 땅에 말뚝을 박고, 그 위로 도시를 세우는 강행군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사람이 죽어나가지만 국가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세운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문학의 황금세대의 주역 중 하나.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데카브리>는 표트르 대제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로 부터 시작한 이야기다.
2. 데카브리란?
데카브리(Декабрь)는 러시아어로 12월을 뜻한다. 데카브리스트라는 이름은 귀족장교들이 12월에 거사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파생된 명칭이다. 데카브리스트는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프랑스에 다녀온 젊은 귀족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유럽을 강타한 자유주의의 물결에 동참해 입헌군주정과 농노제 폐지 등을 주장하는 봉기를 일으켰는데, 실패로 끝났다. 뮤지컬 <데카브리>는 그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실패로 끝난지 10년 후의 이야기를 그린다.
3. 러시아는 사실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데카브리>는 원작 <외투>와는 많이 다르다. 주인공 중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특성의 일부를 빌려왔을 뿐, 두 작품에 등장하는 아카키는 나이도, 외모도, 성격도 다르다. 이 둘이 비슷한 것은 바로 '낡고 해진 외투'를 입고 다닌다는 것. 니콜라이 고골의 생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작품을 그가 살아서 봤을 때 뒷목잡고 쓰러졌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서를 사랑하고 외투를 맞출 돈이 없는 머리 벗겨진 원작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농노들의 독서 모임을 주최하는 혁명가로 바뀌었으니까. 정치권과 엮이고 싶지 않아했던 고골이 봤을 때는 기가 찰만한 각색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어쨌든 작중에 등장하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순박하고 젊은 청년이다.
"살짝 멍청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인재. 생각없고 불만도 없네."
상관이 보는 아카키의 이미지는 이렇다. 농노 출신답게 말 잘 듣고 생각 없고 불만도 없는 존재. 작중 배경은 1835년으로 유럽은 나폴레옹을 몰아낸 직후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상업혁명 또한 진행된 근대의 초입.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했다는 단적인 예시는 1789프랑스 혁명이다. 보편 윤리와 천부 인권이라는 개념이 자리잡힌 시기도 이 쯤이고, 그보다 조금 먼저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며 산업화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유럽 끝자락, 동쪽의 러시아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수혜를 얻지 못했다. 유럽이 계몽주의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을 때,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제도 아래, 영주와 영지, 농노가 존재했다. 이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반포하기 이전까지 러시아는 농노제라는 중세에 멈춰있었다.
아무튼,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제대로 된 민중 계몽없이 이뤄진 독단적인 형태의 혁명이라 실패했다는 앞선 언급을 바탕으로 뮤지컬로 돌아와보자.이런 민중의 무지를 인지하는 '미하일'은 데카브리의 주인공으로,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서 죽어간 농노의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말뚝>을 연재한다. 그 또한 젊은이의 객기가 있던 시절이다.
"자유라는 게 낯설기만 한 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거야."
하지만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가담한 귀족 장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사형당한다. 미하일은 데카브리스트들과 긴밀한 관계이며 <말뚝>의 작가라는 이유로 심문을 당하고, 거기서 차르 직속의 비밀 경찰조직 제 3부에 들어올것을 강요받는다. 자신이 쓴 말뚝을 불에 태우며 과거를 묻어버린 미하일은 10년간 엘리트 검열관으로 살아가지만 그의 앞에 자신이 전부 없앴다고 생각했던 '말뚝'이 나타난다.
그 말뚝이 나타난 장소는 다름이 아닌 아카키의 책상. 그 즉시 미하일은 그 책을 들고 아카키의 거처로 향한다. 마침 잃어버린 말뚝을 찾고 있던 아카키에게 미하일은 이 책의 출처를 묻고, 버려진 책 더미 속에서 찾았다는 대답을 듣는다. 미하일은 그 책을 비난했던 사람과 똑같은 말로 자신의 책을 깎아내리며 충성과 불온 중에 그 책은 지금 불온이라고 이야기한다.
뒤의 내용은 대충 짐작이 가는 그대로다. 아카키는 과거 청년의 미하일이 원했던 것 처럼 <말뚝>을 통해 민중을 개몽시키고 있었고, 도시 아래 말뚝으로 박혀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국가 권력에 희생당한 농노들을 기억한다는 집회를 주도하려고 하고,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미하일은 아카키를 돕는다. 그리고 미하일이 뼛속까지 자신과 같은 귀족이라고 생각했던 알렉세이는 친구의 배신에 그만...(후략)
4. 외투의 의미는 신분이다.
앞서 <데카브리>의 인물들은 러시아의 계층을 대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각자의 특성은 당시 러시아. 특히 로마노프 왕가의 심장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구성하는 단적인 예시로도 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정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가진 방대한 땅의 특성에 있다. 완전한 중앙집권 체제가 들어서기 어려울 만큼 큰 대륙을 가진 러시아의 왕정은 수도와 그 부근에만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우리는 당시 러시아를 볼 때 수도의 귀족과 지역 유지들의 사정이 완전 달랐던 것을 감안해야다.
우선 알렉세이로 대표되는 귀족(특권층)은 여전히 러시아 밖의 발전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차르 아래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식의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중 제3부의 경찰들은 '차르는 신의 질서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데, 미하일이 이 문장에 굴복한 사람이라면, 알렉세이는 이념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기름기가 신선한 따뜻한 외투를 사 입을 수 있을 정도의 특권층이다. 그리고 그 외투를 미하일에게 선물하며 자신과 미하일이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 미하일은 데카브리스트로 대표되는 혁명파였지만 체제에 순응한 자다. 하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변화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아카키는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를 대표한다. 그는 농노출신의 9등관으로, 낡고 헤진 누더기같은 외투를 입고 다닌다. 이는 알렉세이와 미하일의 비싼 외투와 대비되며, 갈등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소재이기도 하다. 알렉세이(귀족)와 아카키(농노)의 대립은 외투에서도, 인물상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반면 미하일은 그 사이 어디쯤에 서서 계속해서 갈등한다. 작품은 외부의 갈등과 미하일의 내면적 갈등이 같은 템포로 진행되는데, 이 지점을 볼 때 외투가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과거를 덮어버릴 것인지, 계몽된 그들과 함께할 것인지. 미하일의 갈등은 외투에서도 나타난다. 털가죽이 달려있지않은 첫 번째 코트는 화려하진 않지만, 권위적이고 귀족적임이 분명하다. 알렉세이가 선물한 두 번째 코트는 예비 참의관 후보인 그의 입지를 뒷받침해주는 장치다. 세 번째 외투는 아카키와 같은 소박한 외투로, 미하일은 농노의 편에 서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두 번째 털 코트에서 소박한 외투로 겉옷을 바꾼다. 결말부, 원래 입던 첫번째 코트를 입고 등장한다. 아카키가 끌려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깨달은 미하일은 마침내 말뚝 12월호를 완성하며, 자신의 외투를 땅에 펼치듯 내려놓는다. 자신을 감싸는 정신적 추위와 압박에서 벗어난 표정의 미하일은 그렇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데카브리>에서 외투는 계급의 상징이자, 미하일의 족쇄같은 존재다. 니콜라이 고골의 원작 <외투>에서는 계급적 특성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한 번 정도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보다 고골의 소설은 짧아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4. 그래서 아카키가 일으킨 농민 혁명은 실제로 있었을까?
1급 반역죄로 감옥에 갇힌 아카키는 미하일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세나츠카야 광장에서 죽은 농노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벌인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앞선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달리 픽션으로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는 1905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혁명하기 전까지 자잘한 농민 봉기가 있었을 뿐, 어떤 조직화된 움직임은 보이지 못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난게 1825년이니까 자그마치 80년간 그 계몽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1905년 이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급격화된 변화를 맞는다. 유럽 국가들 중 근대화에 가장 뒤쳐진 러시아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만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과 대적하는 패권국으로 성장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줄여서 소련이라는 국가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급격한 혁명이 불러온 새로운 국가도 유토피아일 수는 없었다. 이후에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뮤지컬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을 이야기하며 계속해보도록 하자.
5. 순수 문학이라는 모순성
미하일의 <말뚝>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다 죽은 농노와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이 된 아들은, 도시 아래 말뚝이 되었을 아버지가 있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청년의 발자취는 이내 얼어붙은 도시의 추위와 땅 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비명소리에 엉망이 된다.
"도시의 첨탑이 매마른 아버지를 찌르진 않았을까. 청년은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청년의 인상은 찬양에서 점점 의심으로 변한다. 미하일이 심문실에 끌려가서 받는 질문도 비슷하다. "사상글인가?" 라는 질문. 여기에 미하일은 순수 문학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솔직히 얼머나 당황스러운지 모르겠다. 여기에 선행되어야 할 질문은 순수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오랜기간 예술을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저항이 아니라도, 예술은 선동에 있어 가장 효과 좋은 방법이다. 직관적인 그림과 이야기,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데올로기를 불어넣기 충분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수문학'이라는 미하일의 변명이 얼마나 구차한지 알 수 있다. 문학은 시의성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순수문학이라는 미하일의 변명은 '충성 아니면 불온'이라는 당시의 이분법에 따라 묵살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민중을 계몽시키겠다는 의도로 쓴 <말뚝>을 순수 문학으로 포장하는 미하일의 대사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인 글을 순수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어쩌면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은 미하일의 인물 특성을 살려주는 대사가 될 수 있겠지만, 이 대사가 이후 아카키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는 것이 문학의 존재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문학이 가진 선동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인물의 입을 빌려 순수 문학을 논하는 것. 나는 순수문학이 사상글이라는 오명을 벗기위한 도피로 쓰인다는 점이 좀 안타까웠다. <말뚝>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 데카브리는 작품 전반을 걸쳐 문학이 가진 힘에 대해 역설한다. 문학을 통해 자유에 대해 알게된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무섭다는 말을 내놓는다. 이 말을 객석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순수 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재밌었으니까, 데카브리가 재연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