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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May 10. 2020

"그건 안돼, 내 잡(Job)이 없어지잖아"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기 - 지나치게 솔직한 그들

외국계 기업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 토론을 통해 업무를 진행한다. 나 역시도 이런 일이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있을 줄 알았다. 입사 전까지는


"그건 안돼, 내 잡(Job)이 없어지잖아"


귀를 의심했다. 외국계 제약회사에 취업을 하고, 본사 직원과 회의를 할 일이 있었을 때였다.


처음이었다. 이런 도발적인 말은


아닌 척, 자유로운 척했지만 나도 뼛속까지 한국인인 탓에, 뭐라고 부탁을 저런 개인적인 사유로 거절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당당하게?


처음엔 이게 외국계 문화인가, 이래도 되는 걸까 했다. 돌고 돌아 경력도 신입도 아닌 채로 외국계 커리어를 시작했기에, 낯선 것 투성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자유로운 문화는 직함 대신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금세 적응했는데

회의 혹은 요청에 대한 답이 저렇게 허를 찌를 때, 어디까지를 조크(JOKE)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처음엔 정말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다. 



나름 유명한 외국계 제약사. 미국에 본사를 둔 회사부터, 영국, 스위스, 프랑스, 독일 회사, 그리고 일본에서 시작해, 글로벌 회사로 발돋움한 회사까지, 국적 참 다양하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업한 곳은 병원이었다. 종합병원 약국은 입사일자에 따라 ‘서열표’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모든 의사 결정은 서열표 순서대로.


4년의 종합병원 생활을 마치고, 간간이

알바 약사로의 삶을 이어가다 재취업한 곳은 중견 제약회사. 영업사원만 공채로 선발하는데, 두 차례 진행했던 신입사원 교육에서 ‘여자’인 신입사원은 매번 2명이었다. 전체 40명 중 2명.


5%. 

제약업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지원자가 적었는지, 딱 그만큼만이 필요 인력이었는지 몰라도, 나머지 95%의 형님 문화는 끈끈했다. 우스갯소리처럼 전해지는 제약업계에 대한 카더라가 그 독특한 선 후임 문화 때문에,  또 다른 군대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밀레니얼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이었지만, 병원을 다니면서도 '(성균관) 한량'이라 불릴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나도, 만으로 5년을 넘어가는 직업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버렸는지, 본사 친구의 말은 그야말로 

"왓.... 더...... "  


임원이 아니어도, 막 입사한 신출내기여도 외국계 기업에서 업무를 시작한 이상 본사를 만날 일은 생각보다 많다. 작게는 물건 하나 사는 사소한 순간마저. 내선번호 하나가 고장 나면, 그 업무는 본사와 내선전화 계약을 맺은 브리티쉬 텔레콤과 해결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브리티쉬 텔레콤은 영국 말고, 인도에 있다. 


값싸고, 영어 좀 한다 하는 구 영국 식민지, 현 개발도상국 들에 업무를 위임한다.

인접지역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계열사 구조조정의 스케일이 대륙을 넘나들고, 비용절감의 단위가 달러라는 것이 다를 뿐, 사람 사는 일, 아니 기업을 굴리는 일을 결국 비슷했다. 
(가능하면) 저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입사 전 막연하게 본사와의 미팅하면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우뚝 선 본사 건물을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본사와의 미팅은 늘 그렇게 고상하거나 격식이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화로 메일로, 때로는 화상 회의로 랩탑 속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만 듣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대화의 내용은 대개 을 오브 을 인 변방의 소국 '코리아'라 매번 사 달라, 도와달라 읍소하는 일 들이 대부분이요, 고객의 불만을 침소봉대해서 다른 나라보다 한국 꺼 먼저 해결해 달라고 어필하는 고상하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다. 

  


그날도 그랬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담당자를 찾아 문의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국도 대리점이나 사무소 말고 본사, 혹은 윗분들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외국계 기업도 다 사람이 일하는 곳 일 뿐, 환상 같은 건 없다. 

단지 더 넓고 더 많은 지역에 사무실이 흩어져 있고, 그래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선, 시차라는 괴물도 이겨내어야 한다는 것이 좀 다를까. 


회사의 효율화 전략에 따라 한데 뭉친 아일랜드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동료의 출근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 땅에 머무르는 고객님께는 송구하지만, 양해를 부탁하며. 


"이렇게 매번 너를 기다려야 하다니, 힘들어. 간단한 일들은 직접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될까? 매뉴얼이라도 만들어 주면 지사에서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을까?" 

그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놉, 그건 안돼, 내 잡(Job)이 없어지잖아. 고객에게 불편을 설득하고 기다림을 가르쳐"


응? 진심인가? 


동료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하는 한국인에게, 고객에게 불편을 설득하고 기다림을 가르치라니. 

그런데 그 이유가 뭐라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근무하는 이름만 아는 동료의 고용안정성이 이유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까진, 외국계 기업이라는 그들만의 리그 안에 들어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여야 했다. 


웃으며 끝난 회의였고, 이번엔 나도 원하는 것을 얻었다. 빠르고 손쉽게. 

혹여 매뉴얼을 내놓으라고, 혹은 더블린 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까 봐 두려워서였는지, 단순히 농담이었는지는 지금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아마 반반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보다 많이 뻔뻔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먼 나라 이름만 아는 동료들도, 한국의 친구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백세시대라는데, AI가 많은 업무를 대체한다는데, 물리적 거리와 시차를 해결해주는 새로운 산업들이 나타난다는데, 내 일은 안전할까를 걱정하는 평범한 직장인 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짧은 영어지만, 그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Korea First를 외치며, 무조건 빨리빨리 해달라고 졸라대는 떼쟁이가 되기도 한다. 개화기 조상님들께, 노란 머리에 코쟁이라 불렸던 그들도 그렇게 냉정하지만은 않다. 정말 바쁜 거 아는데,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하고 인정에 호소하거나, 그들의 도움 요청에 가끔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하고, 단체 메일엔 대답하지 않는 것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똑같으니, 받는 사람과 나라 이름을 바꿔 가며 똑같은 메일을 수십 번 보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다 보면, 


물리적으로 먼 곳에서, 다른 시간을 살면서도, 기술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들도 내 동료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그들의 농담에 쫄지 않는다. 짬이 좀 생긴 덕분이랄까. 


그러니, 


외국계 기업 채용 공고에서 MNC(Multi National Company) 근무 경력 필수라는 공고를 본다 해도 쫄지 마시기를. 
외국계 기업이 국내 굴지의 기업들 보다, 더 좋아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놓고 선수 돌려 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이 곳에서 일을 새로이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단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에 느슨하게 연결된 내 동료가 있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때로는 언어마저 다르지만 함께 일해야 하는 동료이기에, 그런 업무 방식(에서 오는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감히 말한다. 6년 전 가을의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연봉, 정규직 같은  현실의 안락함 대신, 다소 모자라지만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던 무모함을. 그날의 시작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층 넓고, 깊어진 내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비록 지난주에 갑자기 프로젝트 론칭 당기자고 했어도, 그래서 내일모레부터 줄곧 회의여도 이해하자. 

그나마 한국 시간에 맞춰서 회의를 하느라 무려 이스트 하노버의 친구들이 이번에는 야간 근무를 선택해줬으니 말이다. 


유럽이고, 미국이고, 한국이고. 

직장인이 일하는 것, 그거 한치도 다르지 않더라. 




현실은 쌓여있는 서류, 늘 켜져 있는 노트북 그다지 다를 것 없다. 회사가 다 똑같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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