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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상 May 27. 2016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

2054년 워싱턴,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범죄자를 단죄하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은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다.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범죄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 범행을 저지를 사람까지 미리 예측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크라임 특수경찰이 미래의 범죄자들을 체포한다. 프리크라임 팀장인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미래의 범죄자를 추적해내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프리크라임에 최대한의 열정을 기울이는 것은, 6년전 자신의 아들을 잃은 아픈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만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앤더튼은 프리크라임 감사를 위해 연방정보국에서 파견된 대니 워트워(콜린 파렐)와 사사건건 대치하는 가운데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믿을 수 없는 살인을 예견한다. 그것은 바로 앤더튼 자신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범행 장면. 이제 프리크라임의 모든 시스템이 앤더튼을 추격한다. 앤더튼은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직접 미래의 피살자를 찾아나선다. 자신이 저지를 범죄 현장에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앤더튼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드러나고, 앤더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견된 희생자가 나오는데. 이제 그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가...

(cf. 네이버 '마이너리티 리포트' 줄거리)



1년 전에 들었던 소비자 심리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영화.
지금도 브랜드들이 IP나 개인 정보, 핸드폰 번호, 인터넷 쿠키 자료 등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맞춤형 광고를 하지만, 미래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만 스캔해도 맞춤형 광고를 할 것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언젠간 실현될 광고 수법을 말씀해주셨다.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프리크라임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꿔치는 수술을 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가지고 옷 쇼핑을 하러 간 존은, 쇼핑몰 기계가 존의 눈을 찍고 바로 "야캬모토 씨, 또 찾아주셨군요. 신상품 좀 둘러 보시죠."라는 말을 듣는다.

난 이런 맞춤형 광고가 언젠가 실현될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다양하고 최첨단의 광고 수법들 또한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 했을 수법들이었을 것이니, 미래에는 더 굉장한 광고 형태가 등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그를 안 죽여. 누군지도 몰라.



이 영화의 명장면을 하나 고르자면 단연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본인의 미래를 본 존, 하지만 존은 '난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 미래 예언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넓게 보자면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들 중 가장 재능 있는 예언자인 아가사는 미래 예언에서 보았던 방 앞에서 '돌아가자'고 재촉만 할 뿐이다. 아가사는 미래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


둘은 앞으로 다가올 예언된 미래를 함께 맞이할 것이다. 둘은 서로를 
안고 있지만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미래와 운명은 과연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 결과는 관측에 의존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란 용어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설명한 이론으로,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있는 고양이의 생존 여부를 이용하여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상자 속 고양이의 생존 여부는 그 상자를 열어서 관찰하는 여부에 의해 결정되므로 관측행위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 사고실험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cf.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용어 설명 중, '상자 속 고양이의 생존 여부는 그 상자를 열어서 관찰하는 여부에 의해 결정되므로'를 이 영화에 맞추어 인용해보겠다.


존이 살해자가 된다는 미래 예언의 확정 여부는 그 미래의 시간이 현실로 다가온 후 일어나는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존에게 예언된 살인자의 운명은 현실화될 것인가?
존 본인은 이 운명을 절대 거부한다. 존은 살인자 운명에 대해 대항하며 "나는 그를 안 죽여.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라고 '예정된 미래'에서 불과 몇 분전에 말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향해 총을 집어 든다. 존의 강력한 의지, 거부, 대항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 '미래'가 되니 과거 존이 다짐하고 다짐했던 의지는 순식간에 변질되고 말았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You can choose.)



존이 총을 쏘려 할 때, 아가사가 한 말이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라고 하며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던진다. 물론 아들을 먼저 보내고 큰 슬픔에 빠져있는 존에게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는 결정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범인을 살해하느냐, 안 하느냐는 결국 존의 자유의지가 반영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보편적으로도 시행할 수 있는 규율을 본인에게 적용하여 그 속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여러 선택들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모든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에 존 또한 ―머리 꼭지가 돌 것 같은 분노와 복수심이 불 타올랐지만― 이성과 자유의지를 통해 결국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운명론적 대 개척론적


우리의 운명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운명론적과 개척론적 중 어느 하나도 굴복시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영화의 굉장한 이점은, 우리를 상상과 생각에 푹 빠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만약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면, 우린 사유의 즐거움을 느낄 여유도 없을 것이다. 영화가 주는 교훈과 영화가 던져주는 문제에 직면해보자. 그리고 고민에 흠뻑 빠져보자. 영화를 감상하고 끝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운을 느끼며 딜레마적 문제에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도 꽤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쓰는 여자의 더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시다면.

http://blog.naver.com/colday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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