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 노고단

지리산

by 뮤즈 윤담

구름 속 노고단


지리산의 웅장함에 빠져 넋을 잃었던 나흘간의 일정은 매력적이었다. 가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리산에게 남기고 남원에 들러 상경했다. 차량도 드물고, 인적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물 좋은 호젓한 동네에서 낙원의 일상을 보냈다.

이번 여름휴가는 노고단에 오르는 꿈에 설렘이 컸다. 지리산 일대와 근접 해 있는 어디든 가깝게 다녀 올 수 있는 좋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노고단에서 삼사십 분 떨어져 있는 곳의 숙소는, 주변이 고요했고 사방이 지리산의 산새를 안고 있었다. 수려한 지리산의 산하와 달리, 주변은 수수하고 인근의 발길이 없는 조용한 동네였다.

광활함, 여름햇살, 여름공기. 뜨거운 태양.

지리산 자락에 내린 첫 느낌은 이러했다. 신선하고 상쾌한 것들에 들숨 날숨을 고르며 지리산을 느꼈다.

첫날, 두리번거리는 마음으로 가볍게.

도착하니 오후 네 시. 지고 있는 석양이 우리와 마주했다. 짐 정리를 끝내고 가까운 화엄사와 수락폭포에 들렀다.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화엄종 중에 가장 큰 사찰이다. 저녁 공기를 들이쉬며 절 내부를 둘러보며 산책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라 석등의 백미라 하는,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이었다. 국내에 현존하는 석등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석등이다. 석등은 장중하며 세부 조각이 섬세하고 뛰어나 통일신라 석조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화엄사 전경을 둘러보는 사이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으로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국수가 맛있는 집'의 이름에서 국수를 좋아하는 나를 불렀다. 온화해 보이는 아주머니는 엄마의 손길처럼 국수를 말아냈다. 동네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주인아주머니의 삶의 얘기를 듣는 재미가 정겨웠다. 깜깜해져가는 밤에, 주변의 밤 냄새에 마음이 녹아들었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지나고 피곤함이 몰려왔다.


둘째 날, 설레는 노고단 속으로.

노고단의 명성을 짐작케 하는 수려한 산하, 가파른 절벽, 절묘한 경관들에 경이로울 뿐이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돌계단이 시작 될 때는 되돌아가고 싶은 심기였지만, 노고단의 풍광에 포기 할 수 없었다. 오르는 내내 그림처럼 수려함이 펼쳐져있다. 구름이 산허리에 닿아 시야가 온통 구름에 덮여있다. 광활한 지리산의 산새가 드러나지 못 한 게 얄미웠다. 노고단까지 젖 먹은 힘을 다해 올라갔지만 하얗게 덮은 구름이 눈앞을 가리고 있다. 구름에 앉아 있는 듯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게 펼쳐있는 지리산은 구름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몇 달 내내 쨍쨍하다가 그날 처음으로 이렇단다. 머리로 그려오던 굽이굽이 산등성이도, 아름다운 지리산 모습도 구름에 쌓여 한 치 발 앞도 보이질 않는다. 아! 이럴 수가.

노고단에서 내려오자 조금 전의 먹구름은 억수 같은 폭우로 내리고 산장에서 비를 피하느라 휴식하며 감사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노고단 정상을 정복 했다는 뿌듯함으로 구름 속에 가려진 노고단을 용서하기로 했다.

호젓하고 깜깜한 밤길이 평화로웠다.

셋째 날, 가을이 좋은 피아골에서 여름을 즐기다.

흐렸던 어제와 달리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지리산은 선명했다. 모든 걸 껴안고 호령하듯 위엄도 있었지만 나의 가슴에 화답하는 양 말을 걸어온다. 대답했다. 네가 좋다고. 너와 말하려 왔다고. 인근마을의 아침은 적막했다. 생기 있는 도시의 번잡함이 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고요함이었다. 도로변의 수목들이 여름 햇살 사이로 무성한 진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눈이 부시다. 여유로움이 편안한 아침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어울리는 전원의 풍경이다.

지리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아골 계곡은, 지리산을 에워싸고 가운데 파묻혀 있어 물 흐르는 소리만이 메아리친다. 발을 담그니 발이 시리다. 바닥에 송사리들이 보이는 거울처럼 맑은 물속에서 남편은 헤엄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한다. 신선놀음이 별거더냐. 지리산의 정기를 내 뿜듯 폭포의 줄기가 시원하게 뻗어 내린다. 몸 안에 있는 묵은 찌꺼기들이 녹아내리는 듯 후련하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는 와온해변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끈적이는 소금기가 바람 타고 피부에 기분 좋게 닿았다.

단아한 항구가 쓸쓸하게 해변을 지키고 있다. 아기자기한 항구의 표정이 소박하게 예뻤다. 고기잡이 어선들이 고즈넉하게 구석에 매여 있다. 노을이 내리려는 어스름한 시간에 해는 머리를 감추고 바다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노고단에서의 아쉬움이, 지는 노을도 못 보는 서운함으로 이어졌다. 해변에 어울리는 예쁜 카페는 외로워 보인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주인이 직접 염색한 작품들로 형형색색 스카프와 모자가 진열 되어 있다. 초록색 벙거지모자를 하나 사고 커피 한 잔에 몸을 풀고 여수밤바다로 마지막 행선지를 옮겼다. 버스커버스커라는 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여수 밤바다. 여수구 해양공원은 은빛 물결로 빛을 이루고 여수 밤바다의 색채가 오색찬란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불야성을 이룬 주변에는 즐비하게 늘어선 낭만포장마차가 여행객들의 밤을 흥겹게 했다.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흥과 분위기에 젖어 다소 과한 음식 값도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계곡에서 해변으로, 마지막을 밤바다의 흥과 정취에 맘껏 취한 셋째 날의 일정은 환상이었다.

마지막 날, 지리산을 떠나며.

떠나는 날 아침은, 분주하며 아쉬운 마음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남원에 몇 군데 인상적인 곳에 들렀다. 맛있는 밥집과, 인상적이었던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갖가지 귀한 재료들로 채워진 영양돌솥밥이, 맛보다 그 집의 향기가 좋아 다시 오자고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의 정성들여 지어내온 영양돌솥밥의 맛과 인품은 그대로였다. 허리가 굽어 바로 서지도 못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강인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돌솥밥을 지어 식탁까지 손수 내어오는 정성어린 손길은 여전히 고왔다. 작은 체구에도 힘이 있어 보였고, 그 연세에 일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지리산의 3박4일의 여정은 잔잔하고 소박했다. 수려하고 광활하며 바람과 구름의 길을 따라 노고단 정상을 바라보며 걷던 길을 기억 하게 한다. 가파른 절벽과 돌계단이 그리운 매력적인 노고단이, 가을에 온다더니 왜 안 오냐고 부르고 있다.

지금쯤 노고단과 피아골의 가을은 얼마나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을까.

작은 여행에 웃고 즐거워하며,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가족들과 바쁜 일상에 쫓겨 사는 도심에서 탈출하여 맑은 정기와 숨을 쉬며 함께 한 나흘간의 시간이 귀할 뿐이다. 대자연을 지으시고 보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더 감사했던 노고단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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