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 위에서 만난 스승
일곱 살 키 작은 아이는 산을 두 개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학교에 다녔다. 십리 길이었다. 다섯 동무들과 해찰을 하다 보면 1교시가 끝나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선생은 급식 빵과 우유를 아이의 책보 속에 더 넣어주셨다. 다섯 살 위의 누나에게 가져다 주라는 당부와 함께.
그 해 여름, 장마는 무던히도 길었다. 폭우가 쏟아지면 논과 도랑은 물론 신작로까지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웬만한 아이들의 허리춤까지 물이 넘실거렸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도랑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 자칫 잘못하면 변을 당할 정도였다. 키 작은 아이는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물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급식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없어 슬펐다.
슬픔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선생께서는 한 시간 일찍 출근하셨다. 비옷에 긴 장화로 무장을 한 선생은 반 십리가 넘는 물길을 헤치며 산 아래까지 아이를 마중 나오셨다. 부끄러움으로 죽을 것만 같은 아이에게 선생은 등을 내주셨다.
선생의 총애는 급우들의 질투를 유발했다. 국민교육헌장 암기 대회에서 1등 한 아이를 업고 교실을 몇 바퀴나 돈 것이 화근이었다. 분위기 파악 못한 선생은 일제고사에서 올백 맞은 아이를 또 업어주셨다.
가난 때문인지, 무심함 때문인지 한 달 200원의 육성회비를 몇 달 내지 못했다. 밀린 월사금을 해결하기 위해 선생은 가정방문을 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차마 말씀하시지 못했다. 탈곡하느라 정신없는 부모를 도와 홀테로 나락 훑기만 하다 가정방문을 끝내셨다. 결국 당신께서 대신 내주셨다.
스물두 살의 아리따운 선생은 첫 부임지에서 많이도 우셨다. 학교 앞 찻길에서 무모한 용맹을 자랑하다가 하마터면 트럭에 치일 뻔했던 아이를 끌어안고 우셨다.
새 학년이 되기도 전인 어느 날, 선생은 아이를 품에 안고 울었다. 집에서부터 가까운 학교로 전학해야 한다는 교육청 결정을 들려주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이 선생의 존안을 본 마지막이었다. 쑥스러워 울 수 없었던 아이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선생을 그리워했다. 유명인들이 학창 시절 은사를 찾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다.
수소문 끝에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내가 업어준 거 기억나니?"
목이 메었다.
"꼭 찾아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꼭 와야 해. 알았지? 꼭 와. 약속해"
선생께서는 이미 여덟 살짜리 딸의 학부모가 된 나를 여전히 일곱 살 아이로 여기셨다. 첫 부임이어서였을까. 스물여섯 해가 지났는데도 키 작은 아이를, 마을을, 장맛비를 또렷이 기억하셨다.
하지만 참으로 못나게도 아직까지 선생의 존안을 뵙지 못했다. 손녀가 그 시절 내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선생', '스승'이라는 칭호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듯싶다.
지난겨울 초입에 또 한 분의 선생을 만났다. 어느 플랫폼에서 알게 된 이후 몇 달 만에 내 스승이 되어 나타나셨다. <나도 쓸 수 있는 에세이> 강좌의 강사로.
나는 선생을 일곱 살 시절에 만났던 스승처럼 느꼈다. 나와 같은 또래지만 선생은 엄마 같았고 누이 같았다. 선생께 칭찬을 들으면 빵과 우유를 주시던 그 예쁜 스승을 떠올렸다.
글을 못쓴다는 자괴감의 홍수에 옴짝달싹 못할 때 선생께서는 힘과 용기로 업어 주셨다. 당신의 일 때문에 힘든 중에도 부담스러울 늙다리 제자의 응석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상처 투성이인 제자의 글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선생께서는 남의 이목 따윈 상관없이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제자를 업어주셨다.
스물두 살의 아리따운 초임 교사보다 비록 나이는 두 배가 훨씬 넘지만 어여쁘고 귀여우시다. 당신의 속이 문드러지든 아니든 한결같이 개그 코드를 유지하신다. 그것이다. 선생의 한결같음으로 우리는 인내할 수 있었다. 테크닉이 아니라 내면의 진심으로 가르침을 베푸셨으니 우리는 계속 갈 힘을 얻었다.
일곱 살 삶에 또 한 명의 엄마였고 누이였던 스승 곁을 떠난 지 마흔여섯 해만에 스승을 만났다. 삶의 길 위에서 만난 두 번째 스승, 지영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