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어린 나이에 앞뒤 없이 뛰어든 디제이 세계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랐다. 방송국에 들어가 음악 프로를 진행하리라는 꿈은 턱없는 야망으로 느껴졌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군기 잡듯 다뤘다. 음악실을 책임 맡은 메인 디제이는 군대 선임과 같았고 이제 막 디제이에 입문한 신출내기는 몇 달 선배에게조차 깍듯해야만 했다. ‘메인(A급)’, ‘세컨드(B급)’, ‘써드(C급)’로 분류했고 나는 ‘보조’라고 불렸다.
한 때, 내 삶에 있어 디제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사건을 겪고 사람을 만나면서 삶에 굴곡이 생겼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에 디제이가 미쳤던 영향은 컸다. 그렇다 하여 디제이를 선택했던 것에 자신을 원망하거나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일을 말하기 전에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다방과 디제이에 관해 얘기를 하기로 하자.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주한 미군 방송(AFKN)은 거의 음악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서 건너온 팝뮤직은 단조로운 국내 대중가요와는 또 다른 느낌과 신선한 감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50년대 스탠더드 팝송과 비틀스(Beatles)를 필두로 한 60년대 로큰롤(Rock’N Roll) 시대를 거쳐 70년대에는 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한민국에서는 본격적인 음악다방 시대가 열렸다. 젊은이들은 팝의 본고장인 영국과 미국 음악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를 음악다방에서 들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음악다방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 같았다.
내가 디제이로 활동했던 80년대 중반에는 음악다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은 음악다방에서 만났고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음악다방은 자유를 갈망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다독이는 공간이었다. 눈부신 청춘이든, 눅눅한 젊음이든 사랑을 속삭이고 우정을 나누며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곳이었다.
디제이는 연예인과 같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디제이는 손님들에게 흠모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방송 중에 다방에 와서 뜨거운 눈길로 디제이를 바라보는가 하면 방송이 끝나기를 기다려 수줍게 선물을 건네는 팬도 있었다. 디제이가 다른 다방으로 옮기면 그를 좋아하던 단골손님들도 따라 옮겼다. 다방주인들이 인기 있는 디제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디제이에게는 팝뮤직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었다. 세 시간 방송 선곡에 국내 가요는 몇 곡 안 되었고 대부분 외국 팝뮤직으로 채워졌다. 장르에서부터, 뮤지션, 앨범, 음악에 관한 세부적 지식을 습득해 멘트 할 때 사용하는 것이 디제이의 역할이었다(요즘 방송 중에 내가 80년대 이전 음악을 소개할 때 대부분은 그 당시에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려서 한다).
언제까지라도 그 열기가 계속될 줄 알았던 음악다방에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무렵이었다. 대중들이 일상을 누리는 공간에 변화가 찾아왔다. 언제부터인가 ‘음악다방’ 간판에 ‘커피숍(Coffee Shop)’이라는 외래어가 붙으면서 손님 층이나 분위기까지 변하기 시작했다. 손님 연령대는 미성년자로 내려갔고 심지어는 중학생도 음악다방을 드나들면서 국내 가요 선곡 비율이 점점 높아져갔다. 자연히 팝뮤직을 즐겨 듣던 기존 손님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면서 음악다방은 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올림픽 금메달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 음악다방에서조차 TV를 켜달라고 요구했고 디제이는 하는 수 없이 손님 테이블에 앉아 함께 올림픽 중계를 보며 열심히 응원했다.
음악다방 손님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주인들은 경영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높은 급여의 디제이 숫자를 줄였다. 디제이들이 반발했지만 상황은 불리해지기만 했다. 더는 디제이에게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게 되자 너도 나도 방송을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서빙을 하던 사람이 디제이를 하고, 단골손님이 음악실에 앉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는 디제이가 많아졌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다방 주인이 턱도 없이 급여를 낮추겠다는 통보와도 같은 제안을 해왔고, 그것을 내가 거부하면서 더는 그 음악다방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표현하기조차 힘들 만큼 씁쓸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떡하든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해오던 음악 소개 중심의 멘트를 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손님 연령층에 맞게 감성을 자극하는 멘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개그 멘트였다. 음악 멘트 대신 당시에 유행하던 우스갯소리를 하고 난센스 퀴즈를 맞힌 손님에게 음료를 주는 식의 진행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를 쫓아낸 다방 주인이 지배인을 시켜 나를 다시 스카우트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주인들은 더 강한 것을 요구했다. 난센스 퀴즈를 맞힌 손님을 음악실에 들어오게 해 말장난과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하도록 요구했다. 손님들의 웃음을 유도해내는 유치찬란한 일은 다반사였다.
손님들과 주인들은 금세 싫증을 냈다. 나는 어느새 디제이가 아닌 MC가 되어 있었다. 마이크를 들고 음악실 밖 손님이 앉아있는 홀에 나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금세 유명 인기인이 되었다. 아마추어 밴드 공연에 MC로 섭외되었고 가라오케 술집에서까지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구자처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사명처럼 여겼다. 거역할 수 없는 변화의 물결에서 그렇게라도 디제이의 명맥을 잇는다는 자부심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몸부림이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도 나도 개그 디제이의 대열에 들어섰고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더 자극적인 표현들이 난무했다. 욕설이나 음담패설을 팝 뮤직의 가사와 연결시키는가 하면 손님을 불러내 영화 속 대사를 성인용으로 바꾸어 연기하도록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님의 이동은 점점 심해졌다. 어느 다방에 더 웃기는 디제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어린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가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유치한 몸짓을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소재는 바닥을 드러내고 나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눈길이 더는 과거 디제이를 바라보던 동경의 시선이 아니었다. 내가 유치한 우스갯소리를 할 때 그들은 비웃음을 날렸고, 비난을, 욕설을 보냈다. 하루는 욕설을 한 손님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그날,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던 날에도 나는 타락한 디제이가 되어 손님들의 웃음을 쥐어짜느라 갖은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꽉꽉 들어차던 손님은 어디로 갔는지 빈자리가 많았고 있는 사람들마저 내 개그 방송에 시답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쉬어가기 위해 음악을 내보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음악실 유리를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술 취한 남자가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야, 소양강 처녀 한 번 틀어봐라.”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디제이를 해오던 몇 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다방 주인이라 해도 음악을 신청할 때에는 메모지를 이용했는데 그 불문율을 깨고 구두로, 그것도 반말로 신청을 하다니 나는 거의 충격에 빠졌다. 그를 노려보자 욕설이 날아왔다. 동료들이 깜짝 놀라 달려와 그를 말리며 자리로 데려갔다.
“너, 왜 그래? 디제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야, 뭔 저런 새끼가 디제이야? 여태 하는 거 안 봤냐? 저게 디제이야? 디제이가 저래도 되는 거야?”
음악 소리가 작게 들리는 음악실에 앉아 있던 내게 그 말소리는 너무 또렷하게 들려왔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나는 알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몰랐다.
밤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마냥 걸었다. 좀 전에 다방에서 들었던 독설이 뇌리에서 확성기로 말하듯 울렸다. 한참을 걸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전에 방송했던 음악다방 앞에 와 있었다. 지하에 있는 곳이었는데 입구 계단 위 바닥에 작은 스피커를 설치한 다방이었다.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스피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개그 방송을 하면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듣는데 가슴이 아려왔다. 음악이 끝나고 디제이의 멘트가 들려왔다. 내가 처음 디제이에 입문했을 때 나를 아껴주던 선배의 멘트였다.
“비 내리는 쓸쓸한 밤입니다. 요즘엔 저처럼 방송하면 인기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손님이 없나 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좋아서 디제이가 됐고 이렇게 진행하려고 열심히 공부했고, 지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걸요. 아마 십 년 후에도 저는 이렇게 방송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가슴이 쓰렸다. 입술이 떨렸다. 눈물이 솟구쳤다. 내 영혼의 전락에, 다른 사람이 떠나고 난 길을 쓸쓸히 홀로 가고 있는 선배를 향한 미안함에 울음이 났다. 어쩔 수 없다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위해 온 내가 비겁하게 여겨져 눈물이 났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디제이와 음악다방은 80년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음악다방과 디제이 역사의 몰락에 디제이들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고 여겼다. 누구보다도 내가 그렇다는 자책을 수도 없이 했다. 그 시절 내 타락의 세월은 두고두고 회한이 되어 삶을 지배했다. 그 후로 30년, 40년째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디제이들을 보면서 자책은 더 크고 짙어졌다. 뻔뻔하다고 비난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음악감상카페를 차린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쓸쓸히 퇴장해야 했던 정통 디제이의 방송이 다시 존재하는 공간을 꼭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내 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속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요즘에도 카페 손님은 질문한다.
“어떻게 이런 카페를 할 생각을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