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 지망생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키드밀리는 프로게이머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이었던 어머니와 제약회사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키드밀리는, 초등학교 때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 은상을 타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 1 때 자퇴를 하면서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는다.
중학생이 되면서 게임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였다. 현실 친구보다 게임 친구가 더 많았을 정도로 게임에 빠진 밀리는, 고 1 때 부모님 몰래 자퇴를 결심한다.
아버지 몰래 자퇴하고 등교하는 척하면서 매일 피시방으로 갔어요. 그러다 졸업식 날에 들켰죠 - Youtube, 장지수 채널, 2020
자퇴 후 게임에만 매진하던 키드밀리는 스타 2 프로팀 Incredible Miracle의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2010년에는 Sonny Ericsson GSL 대회 예선의 결승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입단 2년 만에 프로게이머를 그만둔다.
전 리그 우승자와 일대일로 붙었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져서 회의감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멘탈이 엄청 약해서 게임에서 질 때마다 너무 힘들기도 했고요 - 노컷뉴스 : 힙합릴레이, 2017
단지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고 게임만 하고 싶어서 프로게이머가 되기를 원했죠.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제대로 버틸 수가 없었어요. - 에스콰이어 코리아, 2018
키드밀리는 프로팀 탈퇴 후 일단 졸업장이라도 따야겠다 싶어 검정고시 학원을 등록한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친구를 만나게 된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친구. 점점 질이 안 좋아지더니 친구들까지 건드리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손절을 쳤던 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키드밀리가 무서워하던 친구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 친구가 힙합을 너무 좋아했다는 것. '이딴 노래를 듣는다고?' 생각하던 키드밀리였지만, 안 들으면 맞을까 봐 어쩔 수 없이 힙합을 따라 듣기 시작한다. 웃긴 건, 이 친구는 밀리가 진짜 힙합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안 들으면 맞을까 봐 반강제로 랩을 들었어요. 그 친구는 제가 힙합을 좋아하는 줄 알고 '사실 스윙스형한테 레슨 받고 있는데 그 형이 곧 공연해. 내가 초대해 줄게 같이 보러 가자'라고 말하더라고요. 공연에서 빈지노형의 'If I die tomorrow'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힙합이 진짜 멋있는 음악이라는 걸 느꼈고,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랩을 시작하게 됐죠. - Youtube, BIAS, 2018
이후 밀리는 친구를 따라 스윙스에게 몇 년간 랩 레슨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다.
어머니가 손댔던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은 한순간에 가난해지고, 부모님은 이혼하면서 키드밀리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은 일찍이 일을 시작해서 차도 끌고 다니는데, 자기는 여자친구한테 밥도 못 사주면서 맨날 가사나 쓰고 있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일이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랩을 관둔 키드밀리를 붙잡은 건 스윙스의 노래였다.
제가 힙합을 관두려고 할 때 붙잡아준 노래가 스윙스의 '내 뒤에 서줘'예요 - HIPHOPPLAYA,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sIo55mQWRh0
이후에는 음악에만 매진하면서 ひこう, Interstellar Travel, 아초냋넟, Californication, TN, TR 등 여러 작업물을 만든다. 그 노력의 결과였을까. 이 중 하나가 대박을 치는데 바로 [Maiden Voyage]의 수록곡 'Levitate'다.
사클에 올려놨던 'Levitate'가 노엘을 통해 스윙스의 귀에 들어갔고, 스윙스는 듣자마자 전화를 걸어서 인디고 영입을 제안한다.
그렇게 2017년 4월, 밀리는 영비와 함께 인디고 뮤직의 첫 멤버로 소개된다. '이제 인생 폈다'라고 생각한 밀리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으니 '키드밀리가 누군데?', '영비 옆에 듣보잡은 누구냐?'와 같은 반응이 주를 이뤘다. 대중들 뿐만이 아니었다. 스윙스의 지인들도 스윙스에게 '대체 뭘 보고 데려가려는 거야?', '잰 진짜 아닌 거 같아. 이번엔 네가 틀린 것 같다' 같은 말을 했으니 말이다.
냉정하게 보면 다 할 만한 말이었다. 같은 멤버인 영비와 비교했을 때, 키드밀리는 음악적으로 보여준 것도 없었고 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비와 스윙스의 그림자에 평생 깔려있겠구나' 생각한 키드밀리는 어떻게든 음악을 통해 자기를 알리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나온 게 바로 EP 2집 [Maiden Voyage II]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의 히트곡 'Honmono'가 수록돼 있는 앨범이다. 딩고와 찍은 'Honmono'가 유명세를 얻으면서 키드밀리는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의 탄탄한 랩실력이 당연 1순위지만, 'Honmono'에서 키드밀리가 보여준 오타쿠적인 면모 역시 리스너들을 사로잡은 요소 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애니를 본다고 하면 '오타쿠다', '씹덕이네' 같은 조롱이 바로 날아왔으니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를 숨김없이 표현하는 게 오히려 리스너들을 사로잡았다. 주변인들이 뭐라하 건 간에 *먹으라는 태도, IDGAF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요. 진짜 좋아하기 때문에 숨기고 싶지 않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다고 해서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멋지게 만들면 되니까요 - HIPHOPPLAYA, 2018
두 달 뒤에는 마이크 스웨거에 출연하는데 이게 또 대박을 터트린다. 그렇게 키드밀리는 단 두 달 만에 무명에서 주목받는 래퍼로 성장한다.
하지만 정작 밀리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20대를 통틀어 손꼽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이 시절을 떠올리며 키드밀리는 답했다. 잘 곳이 없어서 길에서 잤을 정도로 가난한 시절, 유일한 버팀목은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마이크 스웨거를 찍을 때 즈음 여자친구와 이별하면서 키드밀리는 절망과 분노라는 감정의 수렁텅이에 빠진다.
당시에는 상황이 절망적이었어요. 잘 곳도 없어서 얹혀서 자고 길에서 자거나 했었죠. 작업실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사람 감정이 부정적이게 되면 다 짜증 나는 거 있잖아요. 딱 그 상태였어요 - HIPHOPPLAYA, 2018
으레 그렇듯, 이별 후에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친구들에게 걸려오는 안부 전화에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기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고찰하기도,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술에 취해 잠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키드밀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혼자가 됐다고 생각한 키드밀리였지만, 여자친구에게 집중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걸려오는 안부전화, 이어지는 술자리 속에서 키드밀리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느끼고 무언가 깨닫는다. 키드밀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음악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정규 1집 앨범 [AI, THE PLAYLIST]다.
앨범명은 앨범의 핵심 주제이자 제작 계기인 사랑의 일본어 あい, 작업한 곡을 플레이리스트처럼 모아놓았다는 의미의 PLAYLIST를 합친 것이다. 앨범아트 역시 당시 상황과 관련 있는데, 앨범 제작 당시 키드밀리 본인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앨범 커버를 자세히 보면 학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패턴밖에 없어요. 초점이 없다는 걸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 앨범을 만들었을 때 제 상태였거든요. 꽉 차있지만 목적지가 없는 느낌이랄까 - HIPHOPPLAYA, 2018
사운드적으로는 시험적인 시도가 가득한 앨범이었다. 'Why do fuckbois hang out on the net', 'Hugo Boss' 같은 하우스 사운드부터 신스로 범벅된 노래들까지. 당시만 해도 국힙씬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사운드는 아니었다.
'시험적인 사운드로 가득 차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앨범' 키드밀리가 생각하는 [AI, THE PLAYLIST]였다. 어느모로보나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키워드들이다. 키드밀리 역시 망할 거라 생각하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리드머 선정 2018 국내 랩/힙합 앨범 베스트8
2019 한국 힙합 어워즈 올해의 아티스트/앨범 노미네이트
멜론 선정 2018 명반
말 그대로 앨범이 대박을 친다. 특히 'Why do fuckbois hang out on the net'은 2018년 홍대 클럽 어딜 가던 들리는 노래가 되었다.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키드밀리의 패션스타일은 '딘드밀리룩'이라는 장르까지 만들어 내면서 명실상부 트렌드세터로 자리 잡는다.
이 정도로 떴으면 보통 다음 앨범은 dope 한 것을 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키드밀리는 정반대였다. [AI, THE PLAYLIST] 발매 두 달뒤, 어두운 것들만 모아놓은 EP 3집 [IMNOTSPECIAL]을 발매한다.
(AI, THE PLAYLIST) 작업 당시에 앨범 두 개를 동시에 만들기 시작했어요. 정규를 하우스 노래로 채우고 그다음에 낼 앨범을 어두운 분위기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 노컷뉴스 : 힙합릴레이, 2017
비교적 어두움을 억제된 곡을 모은 게 [AI, THE PLAYLIST]고 좀 더 어두운 곡들만 모아놓은 게 [IMNOTSPECIAL]이에요 - GINZA interview, 2019
그래서일까. [IMNOTSPECIAL]에는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키드밀리의 가정사나 진지한 속마음이 담겨있다.
이번 주 금요일,
내 단독 콘서트,
아빠는 나보고 부담
될까 안 온다고,
이혼가정에서,
이렇게 커줘서 말해 고맙단 말
그땐 내가 미안해서,
대답 못했어 몰래 학교 때려
치운 거 또 사실 졸업 못한 대학
또 누나 죽었을 때 아빠 원망한 것도
fuck you 날릴 거야 난 울 엄마 돈
20년 동안 떼먹은 외가 쪽도
그깟 몇억 땜에 가족이었단 것도
다 깨버리고 법정 가는 꼴도 ... - <daddy>
앨범의 무게와 다르게 [IMNOTSPECIAL]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바로 뒤이어 나온 노래가 인디고였기 때문이다.
인디고가 대박을 치고 이어서 발매한 'FLEX'까지 차트인하면서, 키드밀리는 말 그대로 2018년을 자기거로 만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2018년 11월. EP 4집 [Maiden Voyage III]를 발매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키드밀리가 적은 앨범소개.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우울한 앨범이다. 네 달 전까지만 해도 [AI, THE PLAYLIST], 'Indigo', 'FLEX'로 최고 주가를 달리던 키드밀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음속의 심해를 보고 온 뒤'라는 설명이 붙는 앨범이 나온 것일까?
그 중심에는 쇼미 더머니 7이 있었다. Honmono, 마이크 스웨거, [AI, THE PLAYLIST], Indigo. 그야말로 폼이 최절정일 때 쇼미에 나간 만큼, 키드밀리에 대한 리스너들의 기대치도 높았다. '우승은 어차피 나플라 아니면 키드밀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Q89waTzlfo&t=21s&ab_channel=MnetTV
https://www.youtube.com/watch?v=O8A1UzLEPEU&t=47s&ab_channel=MnetTV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일까? 2차 예선이 끝나고 난 뒤 여론은 180도 바뀐다. '나플라와 경쟁할 우승후보'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족쇄가 된 것이다. 당시 힙합 커뮤니티를 들어가면 '얘가 무슨 우승후보냐', '나플라 같은 애들이 ㄹㅇ 래퍼지', '라이브 실력 바로 뽀록나네 ㅋㅋ' 같은 글들이 정말 많이 올라왔었다.
'와 얘는 차세대의 뭐다' 막 이러다가 제가 2차 때 가사를 절어요. 방송하는 그날이 사형대에 올라가는 죄수 같은 느낌이었어요. 자존감을 되게 잃었죠. - 기타치는 원숭이, Dingo, 2020
안 그래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본선 1차가 끝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키드밀리를 욕하기 시작한다. 본선 1차에서 키드밀리는 EK와 맞붙는데, 이때 EK가 준비한 곡이 'GODGODGOD'이다. 쇼미 7 최고 무대 중 하나로 뽑히는 노래 말이다.
무대 반응은 EK의 압승. 모두가 EK가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키드밀리가 근소한 차이로 EK를 이긴다. 난리가 났는데.. 당시 여론은 '실력이 아닌 인기투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람들이 제 랩보다는 그냥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납니다. - 쇼미 7 인터뷰中
승리 직후 인터뷰에서 키드밀리 본인도 이해가 안 되는 결과라고 생각을 밝혔지만, 악플과 비난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EK가 나서고 나서야 사그라들었으니 말이다.
・・・(중략) 키드밀리도 저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힙합을 사랑한다면 모든 플레이어들을 더 응원해도 모자라다고 생각해요. 욕을 할 거면 관심을 끄시던지, 악플을 달 바에는 어머니에게 카톡 하나라도 더 보내세요 - @M.b.a_ek, 2018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쇼미 7에서 3등을 차지하고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밀리에게 남은 건 현타와 허무함, 그리고 자기 의심이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키드밀리의 감정, 방송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아서 발매한 앨범이 [Maiden Voyage III]다.
[Maiden Voyage III]는 쇼미더머니 7을 촬영하면서 만들었어요. 그때의 감정에 따라 만든 곡을 모아놓은 앨범입니다. 방송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것, 악플과 비난을 보고 괴로웠던 것. 제 감정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방송 종료 직후 관심도가 가장 높을 때 발매해서 제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 GINZA, 2019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보통 앨범의 마지막에 수록되는 'Outro'가 1번 트랙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 중 가장 공감되는 해석을 가져와봤다.
'Outro'에서 'ABYSS'까지 이어지는 트랙 순서는 심해로 서서히 가라앉는 키드밀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Outro'이후 자기과시적인 얘기만 하던 키드밀리는 'ABYSS'에서 유명세와 큰돈을 쫓아온 결과, 이제 나는 수압에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죠.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Outro'가 첫 번째에 위치한 건, 다시 수면으로 OUTRO 하겠다는 키드밀리의 메시지를 담은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사에 따라 트랙을 재구성한다면 아래처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Duracell(쇼미 시작) → CLOSE!(돈과 유명세를 좇는 것에 대한 의구심) → Xanny(*까 난 틀리지 않았어) → Beluga, KOCEAN(자존감 절정) → ABYSS(압박감) → Outro(탈출)
[Maiden Voyage III] 발매 이후 2019년 3월까지. EP 5집 [L I F E] 발매 전까지 키드밀리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쇼미더머니 이후의 삶이 키드밀리에게는 너무 큰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사람들이 조금 무서워진 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밖에 안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졌어요. - 10Q, AP Alchemy, 2019
쇼미더머니 전후로 키드밀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집, 차, 시계 그리고 생각까지도 말이다. 몇 달 만에 몇 년 치 경험을 한 번에 느낀 키드밀리는, 한순간에 바뀐 자신의 삶을 [L I F E]에 담아낸다.
짧은 순간 안에 많은 게 바뀌었고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 안에서도 몇 년치 경험을 한 번에 느낀 요즘이에요. 그런 삶을 앨범에 가감 없이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앨범 소개 보면 딱 근황이라고 적혀있거든요. 그거 말고는 더 할 얘기가 없는 앨범입니다. 메시지 적으로는요. - 10Q, AP Alchemy, 2019
[L I F E] 발매 후에는 여러 행사를 다니면서 행복한 2019년을 보내나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앨범 반응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옛날처럼 하고 싶은 음악을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대부분 '이 새끼 방송 나오니까 음악이 변했다', '순해졌다', '옛날 모습 어디 갔냐'더라고요. 그러니까 위축되고 자신감 없어지고. 그렇게 2018, 2019년을 남들 반응 신경 쓰고, 자신을 의심하면서 보냈어요. - 기타치는 원숭이, Dingo, 2020
키드밀리는 예전부터 칸예와 에이셉 라키를 좋아한다고 밝혀왔다. 모두 실험적인 음악을 하면서도 퀄리티 있는 음악을 선보이고, 앨범마다 스타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키드밀리도 앨범마다 새로움을 추구한 것이지만, [L I F E]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정규 1.5집 [Beige 0.5]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규 2집이 아닌 1.5집인 이유는 곡 수가 10곡을 넘지 않기 때문이에요. - GQ Korea,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R7M03SekAXo&ab_channel=KidMilli-Topic
이전 앨범과 달리 [Beige 0.5]는 싱잉의 비중이 큰 앨범이다. [L I F E]보다 변화가 훨씬 두드러질 정도로 말이다. 넬이나 새소년 같은 밴드 음악을 좋아해서 이전부터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이 그 기회였다고 한다.
보기 좋게 리스너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싱잉랩으로 가득 찬 앨범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멋진 척'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전까지 제가 내놓은 음악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매사에 아니꼬운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나니까 의식적으로 더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어요. 어느 순간 내 옷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딱 현타가 오더라고요 - Allure Korea, 2020
어느 순간부터 멋진 척하고 싶지 않았다. 멋진 척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항상 멋진 사람이 아니니까. 언젠가는 내 민낯도 사람들에게 닿지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원재라는 사람과 키드밀리 사이의 괴리감 없이, 진정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정말 멋진 것이니까 - Eyesmag, 2020
이전까지 자기가 내놓은 음악이나,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미 형성된 캐릭터에 맞추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는데 어느 순간 내 옷이 아니라는걸 깨달은 것. 그래서 팔로워가 줄 건, 악플이 달리 건 신경쓰지 않고 이제는 나다운 거, 최원재다운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결과적으로 멋져보이려고 노력했던 이전 앨범들과는 다르게 [Beige 0.5]에서는 최원재라는 사람의 민낯이 잘 드러난다. 무대 위의 키드밀리가 아니라, 20대 중후반에 선 최원재라는 사람의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앨범 커버를 자세히 보면 'ㅗ' 모양인 걸 알 수 있다. '왜 이런 것만 내?', '왜 감성충이 된 거야?', '왜 why do fuckbois hang out on the net 같은 노래 안해줘?' 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란다.
사람들은 키드밀리하면 2018년 딘드밀리룩 시절만 떠올려요. 사람은 항상 변하는데, 제가 그 시간에 멈춰있기를 바라더라고요. 저를 진정 사랑하고 아끼신다면 그때의 저도 저고, 지금의 저도 저라는 걸.. 저라는 사람도 항상 변한다는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 Youtube :GROOVL1N, 2020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21년 4월. 대망의 [Cliché]가 발매된다. [Maiden Voyage III]부터 [Beige 0.5]까지. '멈춰있는 래퍼'가 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한 키드밀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중들의 대답은 '그냥 하던 거나 해'라는 반응뿐이었다. 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음악적 시도도 해보고 그랬는데 돌아오는 피드백은 '왜 그런 거 하냐'는 말이더라고요. 이러면 내가 새로운 걸 할 가치가 있는 건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건가? 재밌으려고 했던 건데 그게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오니까, 그래 옛날에 하던 대로 돌아갈게. 알았으니까 니들이 원하는 그거 내가 할게. 이런 느낌이죠. - ELLE Korea, 2021
앨범명이 [Cliché]인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클리셰 한 것으로 돌아가겠다'가 이번 앨범의 핵심이기 때문.
헤어스타일 역시 2017-2018년을 연상시키는 스타일로 돌아온 모습이다.
[Cliché] 앨범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트랙 순서가 스트리밍 사이트와 CD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Cliché]의 프로듀싱을 담당한 드레스(dress)와 키드밀리 사이에 트랙 순서에 대한 의견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는 스트리밍의 특성에 집중했다. 첫 곡에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지 못하면 아무리 잘 만든 앨범이라도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앨범을 끝까지 듣게 만들기 위해, 재미위주로 트랙 순서를 구성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키드밀리는 앨범에 담긴 이야기를 대중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순서를 짜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견차로 인해 스트리밍 사이트와 CD의 트랙 순서에 차이가 생긴 것. 결론적으로는 키드밀리도 드레스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여, 대중들이 많이 찾는 스트리밍의 트랙 순서는 드레스의 의견을 따랐다.
그럼 키드밀리는 이번 앨범에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8834xmN-VoM&ab_channel=KidMilli-Topic
이야기의 시작은 'Leave My Studio'이다. 번아웃이 온 키드밀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L I F E] 발매 이후 키드밀리는 예전처럼 음악이 재미있지는 않아졌다고 말해왔다. 재밌자고 시작했던 음악인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음악을 계속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 전에. 키드밀리는 왜이렇게 번아웃이 온 걸까? 그 답은 이어지는 트랙 'Face&Mask'를 들어보면 유추할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하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요즘에는 '음악은 직업인데, 직업은 다른 거로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음악을 할 때 별로 즐겁지 않은데, 그러면 굳이 음악을 하는 게 맞나?' 이런 생각이 머릿 속에 자리잡고 있어요. - HIPHOPLE, 2021
'Face&Mask'에서 키드밀리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씬의 민낯부터, 예술가라는 단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까지 전부 털어놓는다. 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인맥힙합과 정치질을 해야했던 씬의 과거*, 그렇게 성공을 했어도 '그게 예술이냐?'라며 돌을 던지는 대중들. 키드밀리는 되묻는다. '그럼 대체 예술이 뭔데?', '성공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예술가가 아닌 거야?', '작업물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돌아오는 건 없던데? 니들이 예술이 아니라고 까내리는 노력이 더 유명세를 만들어주던데?'
*키드밀리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단지 과거 한국 힙합 씬이 그랬다는 것이고, 가상의 인물을 통해 과거 한국 힙합 씬과 예술가라면 누구나 겪는 고충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한다.
'Face & Mask'는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른 장르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뭔가 랩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뜨는가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저 때는,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요. 이 사람이 인맥질을 하고, 정치질하는 게 ‘블로우 업’ 하는 방식이었거든요. 쉽게 말해서 사람들한테 ‘베깅(구걸)’을 한다고 그러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런 현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앨범을 듣는 사람들은 제 이야기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요. 그건 앨범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의 몫인 거죠. 저는 이해를 시키고 싶진 않았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예술이란 단어에 대해서 너무 무겁게 보는 거 같아요. 경계한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로 너무 싫어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 음악이 뭔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뭔데? 음악은 스포츠야? 아니잖아요. 동요를 만드는 것도 예술이고, 예술은 그냥 예술이에요. 그런데 아티스트를 아티스트라 칭하는 건 쉬운데, 예술가는 왜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어야 하냐는 거죠. 생각보다 예술가는 거창하지 않거든요. 그냥 떡볶이 만드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떡볶이 만드는 사람은 거창하지 않고, 예술가는 왜 거창해야 하지? 이런 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차별이고, 평등하지 않은 거잖아요.
예술을 하니까 그냥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데. 예술은 예술이라 했다고 ‘이 새끼 예술병, 되게 거창한 척하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거죠. 사람들이 오그라드는 이야기를 못 참는 거 같아요. 뭐 그런데 이해는 해요. 저도 그랬고,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그라드는 말 하면 못 참잖아요. 예를 들면 프로포즈 할 때 오그라드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환경에서 크고, 크다 보니 그런 걸 인정하지 못하는 거 같고요. 물론, 저도 그럴 때가 많고 그렇죠. 그래도 저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 HIPHOPLE,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cNUip3RNTa8&ab_channel=KidMilli-Topic
어쨌든 키드밀리는 누가봐도 성공한 래퍼가 됐다. 만나는 사람마다 밥을 사줄 수도, 마시지도 않는 비싼 술을 시킬 수도, 목걸이, 반지를 10개씩 찰 수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물질'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게 남는 건 물질이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치가 바뀐 목소리는 현재의 제가 옛날의 저에게 말하는 느낌을 의도한 거예요. 옛날의 저는 너무 멍청하게 돈을 썼거든요. 결과적으로 그런 식으로 돈을 쓰니까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사람들이 나를 찾던 순간을 값지게 보내지 못했던 것 같아서 그런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했어요. - HIPHOPLE, 2021
그리고 'Cliché'를 통해 랩을 시작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생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말이다.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키드밀리는 결국 아무리 많은 돈, 좋은 집, 차, 시계를 가지고 있어도 남는 건 '사람'과 '사랑'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과연 큰 돈이 나한테 뭘 줄 수 있는가? 좋은 옷, 차, 집 끝.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더라고요. 뭔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니까요. 알게 모르게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제 눈에 보였었어요. 그래서 결국 저에게 남는 건 사람과 사랑뿐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죠. - HIPHOPLE,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gPcpTNsU-qU&ab_channel=KidMilli-Topic
'Blow'의 마지막은 엄마와의 통화로 끝난다. 그 후 이어지는 트랙들*은 전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앞선 고민과 경험 끝에 결국 사랑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Midnight Blue>, <Outro>, <Citrus>
자신감 넘치고, 돈을 많이 벌었던 'VISION 2021', 'Bittersweet'을 넘어서 'Blow'로 오면서 지금 저의 생각과 가까워지도록 가사를 썼어요. 사랑밖에 남지 않은 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HIPHOPLE, 2021
키드밀리의 인생을 담아놓은 [Cliché]는 리스너들에게 큰 호평을 얻었다. 그의 실력은 두말 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키드밀리의 진정성있는 이야기가 리스너들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키드밀리라는 사람을 더 이해하고 싶은 리스너라면 [Cliché]는 필수로 들어보길 권장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놓은 앨범이니 말이다.
5월 30일 발매 예정인 정규 2집 [BEIGE] 프리리스닝 세션이 얼마 전 진행됐다. 선공개곡 '추월'과 'BORA'만 들어봐도 감탄이 나오는데, 프리리스닝 후기를 보니 기대감이 더 올라갔다. '찢었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Cliché] 이후 2년 만에 정규 2집으로 돌아온 키드밀리.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어떤 랩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