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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라이프치히 멘델스존 박물관에 가다 (下)

by 채굴꾼

글을 들어가기 앞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이 '유럽 작곡가 박물관 기행' 시리즈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실수가 아니다. 브런치가 시리즈는 30개까지밖에 발행할 수 없다는 이상한 규칙을 만들어 놓아서 31번째 글인 이 글은 시리즈에 포함될 수가 없었다. 파니 멘델스존 헨젤에게 무척 미안하다. 아니, 이제 시리즈 완결인데 시리즈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29번 글에 30번 글 링크를 삽입해야겠다.


그러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글은 엄연히 멘델스존 박물관 기행글 2부이며, 유럽 작곡가 박물관 기행 시리즈의 일부다. 애초에 브런치가 30화밖에 발행할 수 없게 해 놓은 줄 알았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파니 멘델스존 헨젤. (출처: 위키피디아) 달아줄 만한 거창한 별명이 없어서 안타깝다. 동생에게는 '눈썹 굵은 미네르바'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파니 멘델스존 헨젤. 1805년 태어나 1847년 5월 사망한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요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커트라인인 40살은 살짝 넘겨 동생보다는 4년 더 살았지만 딱히 오래 살지는 못했다. 19세기의 여성 작곡가와 그들이 받은 억압을 이야기할 때면 클라라 슈만과 세트처럼 묶여 나오는 것 같다. 대표작으로는 피아노 독주곡 '한 해(Das Jahr)', 150년 만에 발견됐지만 발견되고 나서 40년을 동생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부활절 소나타, 그리고 Op. 11번 피아노 트리오가 있다. 그녀를 이야기할 때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는 '동생에게 가려진 비운의 천재' '억압받은 또 다른 멘델스존' 등등이 있다. 동생과는 비슷하지만 또 어딘가 다른 파니. 파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멘델스존 박물관에서는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 말한다. "... 그러면 파니는 어디에 있나요?" (...Und wo ist Fanny?)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펠릭스 멘델스존과 파니 멘델스존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됐었다. 아직 멘델스존보다 베토벤을 더 좋아하던 시절에 샀던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이라는 책에서도 파니 이야기가 꽤 나왔던 덕분인 것 같다. 펠릭스를 조사하다 보면 파니 이야기도 필연적으로 같이 나왔는데, 한동안 나는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어도 되지만, 파니 너에게 음악은 장식으로 그쳐야 한다, 네 삶과 존재의 근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적힌 파니와 펠릭스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편지를 소개해주는 글들을 읽으며 파니는 억압받은 여성 음악가군, 그리고 펠릭스와 아브라함은 당대의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파니의 전문적 음악계 진출을 막았군, 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게임을 접하고서 '정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 게임은 지금은 운영을 종료한 카카오 게임 "빵빠레"였다. 실존 음악가들을 미소녀... 또는 미소년으로 캐릭터화한 이 게임에는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도 등장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카드 이름은 "도련님 멘델스존"이었는데, 스토리에는 '멘델스존은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누나 파니와 함께 부족함 없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특히 그의 누이 사랑은 유별날 정도였다'라 적혀 있었다. 카드 속 멘델스존은 긴 금발의 미소년으로, 레이스 자보와(*jabot, 17세기쯤 초상화를 보면 남성들이 목에 달고 있는 손수건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손에 들고 있던 리본 달린 부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파니는 '정의의 수호자 파니'라는 이름을 달고, 빗자루를 들고 있는 굉장히 위풍당당한 여장부 타입으로 묘사되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뻔한 '유약하고 섬세한 멘델스존'과 '비록 시대에 억압받았지만 강인한 여성이었던 파니' 고정관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이미 멘델스존이 마냥 연약하고 흔히 말하는 '여성스러운' 속성만을 갖고 있는 작곡가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나는 이제 게임에서 묘사된 파니의 이미지에도 의문을 가지게 됐다. 아니, 그러고 보면 클라라 슈만도 똑같은 세기에 똑같이 독일에서 활동하지 않았는가. 그 시대 유명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럼 적어도 파니 멘델스존에게 가해진 억압은 다른 여성 작곡가들이나 피아니스트에게 가해진 억압과는 다른 형태의 억압이었다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모든 여성 작곡가들이 단순히 가부장적인 사고 하나만으로 억압받았다고 보는 것이 너무 얕은 해석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빵빠레' 의 인게임 스크린샷과 실제 어린 펠릭스 멘델스존의 초상화. 아, 뭘 노렸는지 알 것 같아서 짜증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보기에, 파니가 전문 음악가로 진출한 것이 늦었던 것은 단순한 가부장적 억압보다는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논문 한두 개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도, 이미 펠릭스 멘델스존을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파니가 음악계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는 것도 공정한 일은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내 눈에 보인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여성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본인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의 반대와 이미 본인이 내면화해 버린 가부장적 사회 질서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본인에게 허락된 선에서 만족하기로 결심하고 사회적 기대와 타협한 여성이었다.


파니는 자신의 남동생보다 네 살이 많았다. 1805년 태어난 아이를 보고 파니의 어머니, 레아는 아이가 '바흐 푸가를 치기 딱 좋은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마리 비고와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서 수업을 받은 파니는 어느 시점에서는 첼터가 펠릭스보다 파니를 좋아하게 될 정도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펠릭스를 매일같이 불러 피아노를 연주하라 시키며 죽을 때까지 펠릭스와의 교분을 이어갔던 괴테조차 파니가 '남자처럼 연주한다' (최상급 칭찬이다) 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전문 피아니스트로 나설 법도 하지 않은가? 왜 그런 커리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걸까? 펠릭스의 친구였던 헨리 촐리는 "만일 헨젤 부인이 가난한 이의 딸이었더라면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슈만 부인이나 플레옐 부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라고 남겼다. 당대에 여성 피아니스트라는 길이 아주 막혀 있던 것도 아니다. 당장 펠릭스와 파니 남매가 피아노를 배웠던 마리 비고도 여성이었다. 어떤 면에서 파니가 공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았던 것은 성별 문제만큼이나 계급 문제였던 것이다.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고용인'으로 살았던 하이든이 죽었던 것이 불과 1809년이었고 음악가의 지위를 본격적으로 높였던 베토벤은 파니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아직까지도 음악가를 '하인'취급하는 풍조가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던 시기였단 것이다. 여염집 여자한테 음악은 어디까지나 취미여야 했다. 아버지도 음악가였던 비크 집이랑은 케이스가 완전히 다르다. 가난한 집에서 아이돌이 나오면 '성공했네' 라 생각하지만 재벌가에서 아이돌이 나오면 '격 떨어지게...'라는 생각을 하는 느낌인 것 같다. 파니에게는 '가정을 챙기는 여성'이라는 제약과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하는 중산층 가정의 사람'이라는 제약이 동시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클라라 슈만은 첫 번째 제약을 '가정을 챙기는 동시에 음악활동도 함'이라는 초인적인 해결책으로 이겨냈지만, 파니는 그 첫 번째 제약을 이겨낼 수 있었더라도 두 번째 제약까지 이겨내지는 못했던 것 아닐까.


펠릭스의 공간에서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천장 조명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듯 방이 전반적으로 어둡다. 하얀 쉬폰 커튼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멘델스존 가문의 가르텐하우스 모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멘델스존하우스에 오는 방문객들은 보통 펠릭스 멘델스존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는 것이다 보니, 쿠르트 마주어와 파니의 이야기밖에 없는 3층까지 찾아오는 방문객은 정말 극소수이다. 잔잔히 흐르고 있는 파니의 음악 '한 해'에 따라 전시관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공간에 있는 것은 파니의 음악과 나, 그것이 전부다. 공적이고 개방된 공간, 콘서트홀이나 학교를 왔다 갔다 하던 펠릭스가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에 한정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던 파니의 인생과 연결되어 그 고요함이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했다.

파니 전시실. (출처: molitor berlin)

봄. 큰 피아노 한 대 뒤로 파니의 작업실을 그린 그림이 빔프로젝터로 스크린에 쏴지고 있다. 햇빛이 많이 들고 시원해 보이는 파니의 작업실은 사실 이곳 라이프치히가 아니라 베를린에 있었다. 저번 화에서 말했듯 멘델스존 가족은 아이들이 어릴 때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이후 펠릭스는 라이프치히로 떠났지만, 그의 두 누이, 파니와 레베카는 결혼한 뒤에도 쭉 베를린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파니와 라이프치히는 연이 깊지 못한 도시다. 그러니 파니의 박물관이 사실상 파니와 평생을 같이한 베를린이 아니라 동생의 박물관이 있는 라이프치히에 곁다리로 있다는 것 자체가 꽤나 모욕적인 일인 셈이다. 아직 독자적인 박물관을 가질 정도의 정규 레퍼토리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뜻이 되겠다. 언젠가는 펠릭스 멘델스존 재단과 박물관에 이어 파니 멘델스존 헨젤 재단과 박물관이 별도로 설립됐으면 좋겠다.


셰즈 롱그에 앉으면 셰즈 롱그 위의 구름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파니의 '한 해'인데, 이 '한 해'는 파니가 빌헬름 헨젤에게 크리스마스에 준 선물이다. 1841년 작품이니 꽤나 원숙기에 작곡된 작품이다. 이 곡은 파니의 작품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피아노 독주곡이다. 이쯤에서 잠깐 질문 하나. 여성 작곡가의 교향곡을 떠올리라고 하면 어떤 곡이 떠오르는가? 일단 여성 작곡가를 몇 명만 대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가운데 교향곡을 떠올리라니, 두 배로 어려워졌을 것이다. 에이미 비치나 에셀 스미스, 세실 샤미나드의 교향곡을 바로 떠올렸다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여성 작곡가 두 명, 파니와 클라라에게는 교향곡이 없다. 19세기에 여성이 작곡을 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술사가 정물화나 초상화처럼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들만을 여성적인 장르로 규정하고 역사화나 신화, 전설을 배경으로 한 대규모 작품은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음악사에서도 피아노 소품, 예술가곡 정도는 여성들에게 허락된 장르였으나 극음악이나 교향곡처럼 규모가 큰 음악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마도 여성들은 감정적이라서 순간의 감성을 짧게 분출할 수는 있지만 탄탄한 구조를 짜고 하나의 주제를 끌고 나가는 힘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을 테다. 불행히도 파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1835년 현악사중주를 쓰며 파니는 동생에게 "내게는 악상을 유지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능력이 부족해. 그러니 내게는 별다른 전개 없이 단지 듣기 좋은 악상을 늘어놓기만 해도 되는 가곡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아."라고 적어 보냈다. 파니의 곡 가운데서 파니의 피아노 트리오를 가장 좋아하는 (내가 피아노 트리오 편성 자체를 좀 좋아하긴 하지만)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규모가 큰 편성으로 작곡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 편성의 곡을 잘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경험의 부족 때문일 가능성이 파니의 머리를 스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펠릭스가 자신감을 잃은 누나에게 공부하면 누구든 쓸 수 있다고 응원을 해 주었으면 참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될 텐데, 동화처럼 행복한 삶을 살며 셰익스피어의 마법 같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옮긴 펠릭스마저도 이번에는 파니의 이야기에 동화 같은 색채를 덧입혀 주지 않았다.

https://youtu.be/9yJM6dlzGOE?si=UGXzHa6on3zjXXWK

파니의 '한 해' 공연영상.

여름. 1827년과 1830년, 파니는 펠릭스의 이름을 빌려 가곡 몇 곡을 출판했다. 파니에게 구애했지만 불안정한 직장과 열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로 인해 파니의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지 못했던 빌헬름 헨젤이 이와 비슷한 시기인 1828년이 되어 스물네 살의 파니를 만나러 유학길에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은 1829년, 펠릭스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를 가로지르는 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으로 동생과 긴 시간 떨어져 본 파니는 불안했고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놓인 결혼이라는 사건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훨씬 더 큰일이었다. 파니와 펠릭스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창의력과 영감이 빠져나간다는 말을 믿었다. 내가 이야기해 놓고도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긴 한데 19세기에는 저런 말이 평범하게 받아들여졌다. 즉 파니에게 결혼은 작곡과 양립불가능한 일이었다. 세계를 누비며 견문을 넓히고 본인의 음악을 알릴 기회를 얻은 동생을 부러워하는 파니를 보고 아브라함은 편지를 보냈다.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어도 되지만, 파니 너에게 음악은 장식으로 그쳐야 한다, 네 삶과 존재의 근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는 내용으로 알려진 편지인데, 멘델스존하우스 인스타그램에 따르면 이것은 책 편찬자인 파니의 아들 제바스티안 헨젤이 아브라함의 글을 잘못 해석한 것이고,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어도 되지만, 파니 너에게 음악은 장식으로 그쳐야 한다. 단지 네 교육의 수단이자, 삶과 존재의 근간이어야 한다'가 맞는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펠릭스에게는 음악이 '소명'일 수 있지만 여성으로서 파니의 소명은 오직 가정을 이루고 결혼하는 것'이라는 요지는 변하지 않는다. 이 편지의 자세한 내용은 복도 반대편 방, 푸른 벽에 편지가 나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전시실 '파니의 코스모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쪽에 모든 편지 내용을 영어와 독일어로 깔끔하게 타이핑해 정리해 놓은 책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없는 편지내용들을 읽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실이다. 편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잘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는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 편지 속 수많은 내용들도 그럴싸해 보이지만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게 해주는 전시 레이아웃으로 인해서 마치 내가 정말 파니의 내면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빼곡한 글씨는 때로는 따뜻하다가 때로는 가슴을 후벼 판다. 후 바람을 불면 전부 날아가 버릴 연약함과 살갗을 베는 날카로움을 동시에 지닌 종이는 포근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지녔다.

파니의 코스모스 전시실. 오른쪽에 저 편지의 내용을 다 읽을 수 있게 번역과 정리가 되어 있다.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결국 파니는 빌헬름과 결혼한다. 마차 사고로 인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펠릭스는 누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했고 파니에게 결혼선물로 써 주기로 했던 곡도 써 주지 못했다. 결국 파니는 본인이 결혼식에 쓸 곡을 알아서 써 가야 했다. 10월 3일, 동생 없는 결혼식을 하며 파니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내가 파니였더라면 그토록 사랑하는 동생이 오지도 곡을 보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엄청난 서운함과 섭섭함을 느꼈을 것 같다. 음악가로서의 사형선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출생신고라는 두 가지 중대 사건에 파니가 누구보다 아끼고 (무서울 정도의 집착이 되기도 했지만) 사랑했던 동생이 오지 않았다니. 과장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펠릭스는 파니 인생의 중심이었다. 아니, 파니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중심이었다. 빌헬름 헨젤은 이 점을 꼬집는 것인지 건조하게 묘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유머러스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바로 전시실 한가운데 있는 원형 테이블 위 그림, '바퀴'이다. 10명의 인물이 바퀴 살을 이루며 그 중심이 되는 펠릭스를 감싸고 있고, 파니가 손에 헨젤의 목줄을 쥐고 있으니 그림 속 인물은 총 열두 명이다. 멘델스존 박물관에서는 원형 테이블을 한 칸씩 돌려보면 그 칸에 맞는 인물의 설명이 나오도록 해 펠릭스와 화가 빌헬름 헨젤 본인을 제외한 열 명의 인물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무척 할 이야기가 많지만, 주요 인물들 몇 명에만 집중하자. 바퀴 속의 인물들은 일명 펠릭스, 또는 멘델스존 가문의 '이너 서클'이다. 그들 삶의 중심에는 펠릭스가 있다. 펠릭스는 천재니까. 큰일을 할 아이니까.

멘델스존 박물관의 '바퀴'.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파니에게도 다를 바 하나 없었다. 파니의 남편 될 사람은 빌헬름 헨젤이었지만 파니의 삶의 중심은 아주 오랜 기간 펠릭스였고 그 관성을 벗어나는 데는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때 파니를 '칸토어'라고 부르며 자신이 쓴 모든 곡을 파니에게 보여주며 조언을 구하던 펠릭스는 어느새 파니를 앞질러 버렸다. 가르쳐주던 파니와 배우던 펠릭스의 관계는 역전됐고 파니가 집안을 돌보는 법을 익히는 동안 펠릭스는 세상을 돌아다녔다. 1829년 파니가 펠릭스에게 쓴 편지들은 지금 이 둘이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 관습이던 낭만주의 시대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보면 남매 사이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하고 강렬한 표현들로 넘쳐난다. "펠릭스, 나는 무척이나 지금 차분해. 네 초상화를 내 옆에 두고 있어, 하지만 네 이름을 적으며 네가 눈앞에 거의 보일 정도가 되니 눈물이 나와, 너도 마음 깊이는 울고 있겠지만, 나도 눈물이 나와. 사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을 수 없다는 걸 알아 (...)" 이런 굉장히 격렬하고 감정적인 편지들 말이다. 그러면서도 파니의 편지에서는 꾸준히 '너는 바쁘겠지만' '이런 걸로 네 시간 뺏고 싶지 않지만' '네 말이 다 맞겠지만' '내가 너무 감정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신경 쓸 필요 없는 헛소리지만' 같은 말들이 등장해 펠릭스에게 본인의 감정은 비이성적이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점을 어필하는 듯하다. 편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불안감은 1829년에 정점을 찍고 나중에는 파니가 본인의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게 되면서 가라앉는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파니에게 펠릭스는 두려운 존재였던 것 같다. 1846년 파니는 펠릭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웃고 싶다면 마음대로 웃어도 좋지만,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두려웠던 것만큼이나 마흔이 된 지금 내 남동생들이 두려워, 아니 정확하게는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라고 쓴다. 파니에게 펠릭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권위의 상징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관념을 담은 '삼종지도'에 따르면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 말을, 결혼한 뒤에는 남편 말을, 늙어서는 아들 말을 따라야 한다는데 파니에게는 펠릭스가 남편보다도 훨씬 큰 권위를 가진 남자였던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느냐, 그건 파니와 빌헬름 헨젤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빌헬름 헨젤이 파니에게 생일선물로 준 가위의 도안.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가을. 빌헬름 헨젤은 파니를 정말 사랑했다. 일단 전시실에 있는 아기자기한 가위 도안만 봐도 사랑이 뚝뚝 넘쳐흐른다. 빌헬름 헨젤이 파니에게 줄 생일선물로 직접 도안을 그린 것인데, 아쉽게도 지금 도안을 따라 만들어진 가위는 남아 있지 않으나 아내를 위해 커스텀 제작한 가위를 선물해 주는 것부터가 보통 사랑해서는 나오기 힘든 생각이다. 그뿐인가? 헨젤은 파니의 음악활동을 전혀 막지 않았다. 막긴 무슨, 오히려 권장했다. 그 시대 남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아브라함은 파니가 작곡을 하는 것도 썩 반기지 않았고 펠릭스는 파니가 작곡은 계속하되 출판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면 빌헬름 헨젤은 아내가 공개적으로 연주도 하고 출판도 하기를 바랐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아침마다 파니의 피아노에다가 오선지를 놓아주고 저녁까지 작곡을 하라고 권유까지 하고 나갔다는데, 빌헬름 헨젤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한 분야에서 보수적이라고 다른 분야에서도 보수적이라는 법은 없는 건지, 아니면 아내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도 강했던 건지. 파니는 결혼 뒤 가족의 전통인 일요음악회를 이어갔고 작곡활동도 드문드문 이어갔지만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다 보면 작곡활동을 할 시간이 얼마나 날지는 모르겠다만.) 종종 찾아오는 슬럼프에 정말 자신이 결혼한 탓에 영감이 찾아오지 않는 것인가 좌절하기도 했다. 파니는 본인은 철저히 주부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으면 만족하고 모든 곡은 일요음악회의 살롱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고 싶은 욕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837년, 아버지는 이미 1835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출판을 허락해주지 않은 야속한 동생은 라이프치히에서 신혼생활을 즐기느라 정신없을 때 어머니 레아는 펠릭스에게 파니가 자기 곡을 출판하게 설득을 해 보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파니의 어머니와 남편은 모두 파니의 곡 출판에 찬성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레아가 딸들이 결혼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이 딸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재능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서였다고도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펠릭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누나에게 곡을 출판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어요, 그건 제가 가진 생각과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이전에 이미 이 이야기를 길게 했었고 제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출판이라는 것은 굉장히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출판된 작품의 작가라는 이름을 평생 지고 싶을 때에만 해야 하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제가 아는 누나는 작품의 저작자로서 이름을 남기고 싶은 성향도 없고 그런 소명을 타고난 사람도 아녜요. 누나는 출판 같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정숙한 숙녀고, 음악계나 대중은 생각지 않고 집안을 돌보죠. 출판은 누나를 이런 의무로부터 방해할 뿐이에요."
파니의 '한 해' 자필보. 그림은 모두 빌헬름 헨젤이 그려준 것이다. (출처: Furore Verlang)

물론 펠릭스는 이 편지 내용은 절대 파니에게 전하지 말고, 파니가 정말로 출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면 하게 놔두라고, 하지만 자신이 긍정적인 신호나 응원을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파니가 뭐 바보인가? 파니는 알았다. 동생의 침묵은 묵인이 아니라 거부임을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파니가 출판을 하고 싶은 욕구는 동생의 거부와 저울에 달았을 때 그리 무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파니는 1837년 출판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계속 살롱에서 본인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살롱의 개념은 현대에는 체감이 잘 되지 않는다. 살롱은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 중간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말 친구들끼리 모여서 연 이벤트라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나 오갈 수 있는 콘서트홀과는 또 다르다. 멘델스존 연구가 래리 토드는 출판만 안 했을 뿐 파니는 이미 살롱을 통해서 충분히 잘 알려져 있었다는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마지막 전시실의 미디어 전시, '일요음악회'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파니의 살롱에는 무려 리스토마니아를 한창 몰고 다니던 시절의 현역 스타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같은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게다가 파니가 출판을 하게 된 계기도 1846년 베를린 출판사로부터 먼저 출판 제의를 받아서인데, 이름이 아예 없는 작곡가라면 출판사가 먼저 컨택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파니는 1846년 출판을 하고서 '내가 출판을 '하겠다'라고 마음먹어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출판을 '하게 됐다'가 더 맞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음악회를 아주 기술 좋게 운영하고 손님을 초청하고 연주회를 진행하는 데서는 충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이 원하는 '시대에 억압당한 주체적인 여성 음악가의 저항'이라는 그림이 나오지만, 적어도 출판 문제에 있어서 파니는 상당히 유보적이었다. 살롱이 정확히 음악계에서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현대 사람들은 알 길이 없으니 파니가 정말로 '사적 공간에 억압되어 있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겠다.

멘델스존하우스의 '유명인들과 사진을 찍어 보세요' 코너. 모두 파니의 일요음악회에 온 사람들이었다.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아무튼 그런 교착 상태가 지속되던 1839년, 헨젤 가족은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번에는 열 살 아들 제바스티안 루트비히 펠릭스 헨젤을 데리고서 말이다. (눈치챌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바흐와 베토벤과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을 합쳐서 이름을 달아주었다. 파니의 작명 센스도 참...) 비록 모기에 너무 많이 물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였고 이탈리아의 진한 커피는 파니가 목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파니는 이탈리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펠릭스가 이탈리아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사람과 음악은 혐오스럽다고 했던 것과 달리, 파니에게 이탈리아는 영감의 원천이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특히 당시 로마대상 수상자여서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유학 중이던 사를 구노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는데, 구노는 파니의 재능에 무척 감탄했다. 파니도 구노를 싫게 보지 않았고, 나중에 구노가 펠릭스 멘델스존과 만났을 때 펠릭스는 '아, 그쪽이 우리 누나가 얘기해 줬던 '미친놈'이시군요?' 하고 인사했다고 한다. 아마 파니의 솔직하고 가감 없는 성격을 고려했을 때 좋은 쪽으로 한 말이었던 것 같다. 파니는 구노에게 바흐의 음악을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지금 구노의 가장 유명한 곡 가운데 하나가 바흐의 선율을 쓴 '아베 마리아'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십 년 전 동생 펠릭스는 십 년 전의 로마대상 수상자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이탈리아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파니는 로마대상 수상자와 이탈리아에서 끝내주는 시간을 보내고 온 거다. 구노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인정은 늘 본인 음악에 자신이 부족하던 파니에게 큰 힘이 되었고 파니는 이후로도 종종 이탈리아 시절을 그리운 듯 회고했다. 이탈리아 풍경을 그린 그림 앞에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에서는 파니가 이탈리아에서 지내며 남긴 일기들과 기록들을 읽어볼 수 있는데, 남편, 아들과 함께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생각보다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다가 웃기도 하고, 펠릭스에게 '이탈리아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요리' 추천을 받아서 먹기도 하고,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난 덕분인지 정말 끝내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젊은 구노. (출처: 위키백과)

겨울. '겨울' 전시실은 대부분이 설명문과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어 조금은 심심한 곳이다. 그나마 헨젤 가족의 숟가락 여섯 개 정도만이 파니가 가지고 있던 원래 물건들이고 대부분은 복제품들이다. 파니가 갖고 있던 물건의 대부분은 베를린에 남아 있을 테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박물관의 운영 주체는 파니가 아니라 펠릭스 멘델스존 재단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멘델스존 박물관이 언제나 그렇듯이 정보량은 많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파니는 조금씩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여전히 자조적인 어투긴 하지만 이제는 동생에게 괜찮은 곡은 하나도 못 쓰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재능인데, 자신은 설령 만들어내는 것들이 별 볼 일 없는 것일지라도 뭔가를 시도하는 재능은 있는 것 같다는 편지도 보낸다. 베를린 라이프치히 거리 3번지에 있는 본인의 살롱은 물론이고, 여섯 차례 동생을 방문하러 라이프치히에 방문하며 1843년에는 베를리오즈를, 1846년에는 슈만 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물론 파니는 베를리오즈가 라이프치히 사람들의 신경을 죄다 건드려 놓고 다녀서 펠릭스가 뒷수습을 하느라 진땀 빼야 한다고 적어놓았으며 베를리오즈를 그다지 좋아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클라라와의 만남은 어땠을까?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궁금해할 것 같다. 동시대에 살았고 각각 유명 작곡가의 아내와 누나인 데다가 그 두 유명 작곡가도 막역한 친구지 않던가? 파니 쪽이 클라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클라라는 파니에게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품었다. 다만 파니의 털털하고 다소 필터 없는 (...) 말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클라라는 파니에게 좀 거리감을 느꼈다고 한다. 파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클라라는 무척 아쉬워하며 파니가 더 오래 살아서 더 친해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1843년 잠깐 만났다가 제대로 교분을 맺게 된 1847년 무렵 파니와 클라라는 둘 다 피아노 트리오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클라라는 자신의 피아노 트리오를 파니에게 헌정할 계획이었다. 클라라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당장이라도 인쇄소에서 나올 내 피아노 트리오를 그분께 헌정했는데 이제 그분이 이 세상에 안 계신다니-! 우리 남편이랑 나랑 둘 다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몰라.'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일 파니가 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만남이다.

https://youtu.be/SLhoZxcN8I0?si=qnr1g7ZrkkN7LN_k

파니 헨젤 피아노 트리오.

잠깐 다시 1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846년은 파니에게 중요한 해였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베를린 출판사에서 파니의 곡을 출판하고 싶다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파니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동생과 상의하지 않고 곡을 출판해 버린 뒤, 펠릭스에게는 자신이 곡을 출판했다고 통보한 것이다. "다른 일이라면 남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랐겠지만 이 문제만큼은 네 축복을 받고 싶었다" (1846년 무렵 멘델스존이 음악계 전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이미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음악가에게서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뭔가 그 이상의 복잡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 쓴 파니는 펠릭스의 외교적인 답장을 받는다. 앞길을 축복하며 힘든 일은 전혀 없기를 바란다는 '숙련된 동료' 로서의 편지였다. 물론 파니도 알고 있었다. 펠릭스가 진심으로 본인을 축하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말이다. 어쩌면 파니는 그 답장을 받고서 '그래 이렇게 그냥 상의 없이 출판해 버리면 펠릭스는 마뜩잖아하면서도 축하를 해 줬을 텐데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파니는 전문 반주자로서도 대중 앞에 모습을 몇 차례 드러냈고, 일요음악회에서는 비록 '끔찍하게 낯을 가리는 바람에' 잘 되지는 않았지만 바통을 들고 동생처럼 지휘자가 되어 보기도 했다.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다. 동생도 주저하면서도 일단은 음악활동을 인정해 줬고, 남편이야 파니의 '한 해' 악보에 삽화를 하나하나 넣어줄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 아니던가. 비록 꾸준히 파니에게 곡을 출판하라 말해 줬던 어머니는 1842년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지만, 이제 아들도 어느 정도 컸고 음악계에 커넥션도 생긴 파니는 '야심은 없다'라고 말하고, 곡이 어떤 평을 받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꾸준히 자신의 곡을 출판해 나갔다. Op. 7번까지 말이다. 1847년 파니는 평소처럼 일요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해 펠릭스의 칸타타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에 감각이 없어졌다. 이전에도 이미 이런 증상을 몇 차례 겪었던 파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속 연습 현장을 모니터링했다. "무척 아름다운데!" 하고 옆 방에서 외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몇 분 뒤 바로 전신에 감각이 없어졌다. 파니는 "엄마처럼 뇌졸중이야" 하고 말했고, 30분 뒤 그대로 사망했다. 클래식 역사를 통틀어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은 찾기 힘들다. 별다른 징후도 없다가 잠자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 자신의 부모님들처럼 파니도 그렇게 죽었다. 어머니 레아가 죽었을 때 파니는 어머니처럼 평화롭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꼭 그렇게 된 셈이다. 파니의 죽음은 이후 몇 년간 멘델스존 가족이 연쇄적으로 겪게 되는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불과했다.


이 뒷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누나의 사망 소식을 접한 펠릭스는 소리도 못 내고 기절했고, 가족들과 함께 마음을 추스르려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러면서 멘델스존의 현악사중주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악사중주 6번, 별칭 '파니를 위한 레퀴엠'을 썼다. 그러나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뒤에도 건강이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한 달 정도 사경을 헤매다가 11월 4일 사망한다. 1846년 11월 14일, 파니는 자신의 생일에 펠릭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고 펠릭스는 '내년에는 꼭 누나 생일 같이 보내겠다'는 약속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1847년 11월 14일에는 둘 다 죽어서 저세상으로 갔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https://youtu.be/I9LvDatOFyw?si=fW9y6V4amdS4sYN7

멘델스존의 현악사중주 6번, '파니를 위한 레퀴엠'.

한편 파니를 너무나도 지극히 사랑했던 남편 빌헬름 헨젤은 어찌 보면 펠릭스보다 더 많이 괴로워했다. '한 해' 외에도 부부는 서로의 곡에 그림을 그려주고, 서로의 그림에 곡을 붙이는 식으로 함께 작업해 왔었다. 심지어 빌헬름 헨젤은 몇몇 그림에서 아내 파니를 모델로 삼아 그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아내가 죽고 나서 빌헬름이 화가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몇 장의 스케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빌헬름 헨젤은 폐인처럼 살다가, 1861년 교통사고 환자를 도우려던 중 사고에 휘말려 사망한다. 파니의 아들 제바스티안 헨젤은 1884년, 멘델스존 가족의 편지와 일기를 모아 멘델스존 가족의 역사를 정리한 '멘델스존 가족'을 출판했다. 나도 이 책을 읽어 봤고 지금까지도 귀중한 자료로 삼고 있다. 물론 어머니 파니를 너무 보수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놓았다는 비판과, 일부 자료를 삭제하거나 수정했다는 의혹이 있지만... 가족 이야기라면 원래 좀 그렇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이해해 줄 만하다.


그렇게 파니의 죽음까지 함께하고, 앞서 언급한 '일요음악회' 영상을 보고 나면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방이 남아 있다. 별 건 아니고, 1840년대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어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각 연령대와 성별을 위해서는 옷이 한두 벌 정도씩만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살짝 아쉬운 점이지만 그래도 썩 재미있는 공간이다. 2022년 친구와 같이 갔을 때는 두 멘델스존에게 별로 관심 없던 친구가 이곳 옷을 입어보고 사진 찍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데만 한 20분 정도를 썼던 것 같다. 멘델스존 박물관에서 주기적으로 올려주는 사진을 보면 어린아이들도 옷 입어보기 체험은 늘 즐기는 듯하다. 다른 쪽 벽에는 파니의 일요음악회에 왔던 유명인사들이 그려져 있는데, 자코모 마이어베어 (1791~1864, 프랑스의 극음악가), 클라라 슈만, 프란츠 리스트 정도가 눈에 들어온다. 음, 래리 토드 씨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유명인사들을 알고 살았던 파니를 출판 전에 무명 음악가였다고 하는 것은 큰 실수 같다.

멘델스존하우스의 1840년대 옷입어보기 체험.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이제 세상을 먼저 떠나 버린 두 멘델스존의 이야기를 다 봤으니, 잠깐 본관에서 나가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올 때가 됐다. 건물을 나오면 건물 뒤쪽으로 펼쳐진 작은 정원이 있다. 원래 수영장이 있었던 공간이라고 하는데, 멘델스존하우스 측에서는 2026년까지 멘델스존이 살던 때 그 모습 그대로 수영장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고개를 앞으로 쭉 뺀 멘델스존 동상은 슬쩍 무시하고, 멘델스존 음악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장이 났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스피커도 무시하고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우리 목적지다. 전시명은 Die unbekannte Schone, 영어제목은 The beauty in the shadows, '숨겨진 아름다움' 정도가 되겠다.


보통 멘델스존 전기를 읽다 보면 세실이 지나가듯 한 페이지 정도 언급된다. 대충 '한편 1836년 멘델스존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착하고 참한 그야말로 이상적인 현모양처 세실 장 르노를 만난다. 세실은 예쁘고 순종적이었으며 멘델스존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무지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둘은 1837년 결혼해 멘델스존이 죽을 때까지 보기 드물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하며 슬하에 다섯 아이를 두어 모범적인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정을 이루었다. 이는 작곡가가 필요로 하는 안정과 새로운 가족 틀 안에서의 소속감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런 느낌으로 나온다. 그 뒤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아내하고 크게 싸우거나 둘 중 한쪽이 불륜이라도 하면 그 이야기가 나와서 존재감이 생기는데 별로 안 싸우고 뒤에서 묵묵히 남편 내조를 해 주다 보니 정말로 존재감이 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멘델스존 가족 구성원들을 전부 다 알아보고 나서도 세실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은 오래도록 하지 않았다. 멘델스존 박물관에서도 이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서, 2024년 6월 세실을 다루는 이 상설 전시를 신설했다! 아예 오프닝 멘트가 "십 년간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의 동반자였고, 그를 내조했으며 다섯 아이를 낳아줬고 완벽한 가정/사회적 환경을 구축해 줬음이 분명한 여성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잘해봐야 멘델스존의 전기에서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음악적 재능과 평범한 지성을 가졌고 엄청나게 아름다우며 온화한 성정을 가진 여성 정도에서 그친다. 좀 더 깊이 파고들어 세실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아볼 만한 충분한 이유다." 일 정도다.

세실 멘델스존 바르톨디, 멘델스존의 아내. 종종 파니 멘델스존이라고 이 사진을 갖다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니는 유대계다. 파란눈일 수 없단 말이다. (출처: 위키백과)

가르텐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가운데 세실의 앨범을 재구성한 작은 책이 놓여 있고 정면에는 세실과 펠릭스가 그린 멘델스존 부부의 신혼집, 루르겐슈테인스가르텐의 거실 풍경이 있다. 전체적인 그림체는 펠릭스의 그림체지만, 자세히 보면 그림에 있는 카를과 마리, 그리고 세실 본인은 세실이 추가한 것이다. 짙은 푸른색 벽과 화려한 카펫이 아주 인상적인 인테리어다. 멘델스존하우스 본관에서 보고 나왔던 것보다 살짝 더 화려한 커튼이 창살을 약간 가려 나무 창살이 십자가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 가르텐하우스 전시실은 아주 영리한 배치를 통해 양쪽 벽으로도 그림 속의 푸른 벽이 연장되게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신혼집의 단란하고 따뜻하며 섬세한 분위기가 전시실 전체로 이어지는 듯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 아름다운 전시실이었다. 가운데에 의자 하나만 있었으면 두배로 좋았을 것 같다.

세실 전시실 내부. 공간을 정말 멋지게 만들었다! 너무 유아틱한가...? 그렇다면 내 취향이 유아틱한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멘델스존하우스)

세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둘 다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펠릭스와 세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프랑스어가 적혀 있고 둘의 결혼식도 프랑스어로 진행됐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프랑스어가 더 익숙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별 볼일 없는 집안의 목사였고 어머니는 명문가 자제였다. 아버지는 1819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두 살의 세실을 두고 사망한다. 세실의 어머니는 23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 세실의 부모님이 결혼할 수 있던 것은 부계와 모계 둘 다가 위그노교도, 어떤 면에서는 비주류였다는 점이 한몫했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유대계라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서도 세실과 결혼을 할 수 있던 것이 세실 집안의 이런 비주류적인 성향 때문이었다고도 추측한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 살던 멘델스존의 친구 페르디난트 힐러는 "적어도 일부 서클에서는 천재성과, 교양과, 상냥함, 부 거기에다가 명문가 출신에 유명세까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귀족 집안 출신 여자를 탐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그 일부 서클의 말들은 조금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라고 남겼으니, 개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유대계라는 점이 얼마나 큰 결점으로 작용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유는 몰라도 둘은 별다른 가문의 반대 없이 결혼했다. 사실 펠릭스는 멘델스존 4남매 (파니, 펠릭스, 레베카, 파울) 가운데 유일하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결혼하기도 했다.


29편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멘델스존 부부의 연애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보자. 1836년 펠릭스는 친구 요한 네포무크 셸블레 (Johann Nepomuk Schelble, 1789~1837... 그러니까 펠릭스 멘델스존과는 무려 20살 차이다.)가 앓아눕자 성가대 지휘 대타를 뛰어주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가 성가대의 소프라노 세실을 만났다. 세실은 처음에 펠릭스가 '부루퉁하고 다가가기도 어려운 까칠한 성격에 실크 나이트캡을 쓰고 끝없이 푸가를 치는 노인' 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세실보다 무려 28살이 많은 선생님 대타로 선생님의 친구가 온다고 하면 보통 그 선생님의 친구도 비슷한 나이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온 것은 한창 팔팔할 나이, 이십 대 중반의 세련된 청년이었다. 처음에 세실은 펠릭스가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엄마를 좋아한다 (...) 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세실 집에 발도장을 찍었고 정작 집에 와서는 세실보다 세실 엄마하고 이야기를 더 많이 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실이 착각을 참 많이 하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마음이 통했고 9월 9일 약혼을 한 뒤 3월 28일 춘삼월에 결혼했다. 전시실 가운데 놓여 있는 세실의 앨범에 실려 있는, 펠릭스가 친구 클링거만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한 구절을 읽어 보자. "나처럼 스물일곱이나 먹은 남자가 진심전력으로 사랑에 빠져 있다는 건 엄청난 불명예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 나이가 됐으면 성숙한 태도와 침착함과 삶의 균형... 그리고 또 뭔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내게 있는 거라곤 세실을 향한 커다란 사랑과, 그녀와 함께 있고자 하는 열렬한 마음뿐인걸. 비웃고 싶다면 비웃어도 좋아."


와, 그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표현이 난무한다. 둘이 얼마나 달콤한 결혼생활을 즐겼는지 적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독자분들이 지겨워하며 글을 꺼버릴 것 같기 때문에 자세히 적지 않겠다. 이제 펠릭스와 세실을 묶어주었던 '음악'과 '미술' 이야기를 해보자. 세실이 음악에는 재능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펠릭스가 여동생 레베카에게 보내는 편지 때문일 것이다. 레베카가 그래서 자기 올케 될 여자는 음악적 재능이 있냐고 묻자 펠릭스는 "전혀. 그래서 좋은 거야"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일단 파니랑 비교했을 때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긴 했을 것이다. 보통 누구라도 파니와 비교하면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펠릭스가 세실을 '성가대'에서 만났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세실이라고 아주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펠릭스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이그나츠 모셀레예스도, 남편 펠릭스 멘델스존도, 시언니 파니 헨젤도 세실에게 곡을 헌정해 줬다. 또 펠릭스도 숙련된 합창단 지휘자로서 종종 세실에게 보컬 레슨을 해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뿐인가, 사실 세실도 피아노를 잘 쳤다. 그 시대 여자들의 교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단지 남편이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니까 남편 앞에서 안 친 것뿐이다. 이미 결혼하기 전부터 세실은 '그분 앞에서 감히 피아노를 어떻게 칠 용기가 나겠냐' 며 굉장히 겸손하다 못해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던 듯하다. 펠릭스가 1840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아내가 자기 작은방에서 보낸 이틀 동안 우리 결혼생활 전체를 통튼 것보다 더 많은 음악을 연주한 것 같아요. 그리고 세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내 방에서는 세실이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 같네요."라고 보고했다.

세실이 펠릭스가 듣지 않을 때 피아노 치는 것을 선호하자 아쉬워하는 펠릭스의 마음을 1834년 초상화를 웃지 않게 바꿔놓아 표현했다. (출처: 멘델스존하우스 인스타 릴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실이 음악보다 좋아하는 것은 그림이었다. 화가 남편을 둔 음악가 아내 파니는 화가 아내를 둔 음악가 남편 펠릭스 부부에게 서로가 서로의 '더블 카운터포인트' 그러니까 '이중대위법', 서로 반대면서 맞물리는 존재들이라고 말을 했었다. 세실은 어릴 적부터 무척 내향적이었고 사교의 장소나 무도회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세실 가족의 초상화에서도 세실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전문화가 에두아르드 마그누스가 세실의 꽃 그림을 갖고 싶어 할 정도였다. 펠릭스와 세실이 친해진 것도 그림을 같이 그리면서였고, 펠릭스가 "세실의 재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봐. 세실이 베네디크 부인에게 그림을 한 장 그려줬을 때 세실의 재능이 대단하구나, 색을 정말 잘 쓰고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물을 잘 꿰뚫어 보는구나 하다는 걸 느꼈어."라고 말하게 할 정도였다. 남편 펠릭스가 수채화 전공이었다면 세실은 수채화도 수채화지만 유화를 탁월하게 그렸는데, 전시실에도 원본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신 다양한 식물 그림들을 프린트해 액자에 넣어 놓았다.

오른쪽의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연필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것이 세실이다. (출처: Papik pro)

전시실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게 세실이 그린 꽃과 식물 그림들이며 전시실 가운데의 앨범도 왼쪽에는 세실의 그림, 오른쪽에는 편지나 다이어리 글을 넣은 형태다. 전시실을 꾸민 많은 액자 속 그림들은 초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세실의 식물 그림들로, 수틀에 놓은 자수처럼 화려한 꽃들이 벽을 타고 피어나는 것만 같다. 이때까지는 세실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은 알아도 세실의 그림을 제대로 볼 기회는 없었다. 때문에 세실의 그림을 직접 눈앞에서 본다는 건 세실이 어떤 관념 속의 현모양처가 아니라 잘하는 것도 있었고 좋아하는 것도 있었던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줬다. 그리고 나도 에두아르드 마그누스처럼 세실의 그림을 한 장 뜯어서 갖고 싶어졌다. 멘델스존하우스에서는 세실 그림엽서모음을 팔아도 좋을 것 같다.

세실의 그림 중 한 점.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그림은 남편이 죽고 나서 세실의 몇 안 되는 삶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당장 남편이 죽자 눈앞에 닥친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무엇보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고 죽어버린 것이 큰 문제였다. 때문에 언제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문제라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은행가, 펠릭스의 남동생 파울이 후견인을 맡아 문제를 처리했다. (참고로, 파울 멘델스존-바르톨디는 멘델스존 4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아 조카들을 맡아 키우기도 했으며 로베르트 슈만이 죽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클라라 슈만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클라라는 대부분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했지만 파울의 도움만은 받아들였다.) 두 번째 문제는 남편이 남긴 유산의 일부가 되는 미출판 곡들이었다. 여기서 세실은 '그가 쓴 곡 가운데 아주 일부만이 대중을 상정하고 쓰인 것으로 경제적이거나 상업적인 이유만으로 출판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동시에 '혼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며 본인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멘델스존의 지독한 완벽주의자 성향을 생각해 보면 난 세실의 선택이 맞았을 것이라고 본다.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 조차도 생전에 마음에 들지가 않아서 출판하고 있지 않던 곡 아니던가. 세실은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자기 생각보다 펠릭스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실의 앨범을 천천히 넘긴다. 1836년 아직 썸을 타던 시절부터 1853년 세실이 죽을 때까지 17년의 기록이 담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삶의 한 조각을 뜯어내 앨범에다가 붙여놓은 듯한 기분이 든다. 몇 가지 인상적인 편지 내용을 옮기며 '숨겨진 아름다움' 전시 소개를 마무리하겠다.

박물관의 세실 앨범. 왼쪽에는 세실의 그림, 오른쪽에는 세실의/세실에 관한 편지나 일기내용을 실었다.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펠릭스가 마침내 새 그랜드 피아노를 받았어요. 소리가 아주 훌륭해요. 펠릭스는 하루 종일 앉아서 그 피아노를 치는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더라고요.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할 텐데, 할 수 있는 한 미루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어떤 종류든 끔찍하다고 불평을 해요. 저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만일 제가 펠릭스처럼 재능이 있었더라면 저는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재능을 즐길 수 있게 해 줬을 텐데 말이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이의 연주를 듣기를 바라는데요." (1838년 11월 29일)
"나무에서 시든 이파리들이 떨어지고 이 시기가 되면 온 세상이 차가운 회색빛으로 변해지만, 아직 '그이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안 했어요. 오히려 정반대로, 옛 잠언들과 함께 남았다고 나를 가엾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적응했어요.'라든가 '아이들이 있으니 시간이 금방 가요.'라고 답하곤 해요. 물론 둘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펠릭스, 정말로 보고 싶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멈출 수가 없어요." (1845년 12월)
"기억들로부터 도망치지 않아요. 오히려 그 기억을 찾아 헤매죠. 주님께서는 매일매일 그이가 가슴 찢어지는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 내게 가르치려 했던 것을 잊으라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언제나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치유돼요." (1852년 11월 3일)

세실은 펠릭스의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선별해서 이 세상에 내놓았고, 세실 뒤에도 많은 이들이 펠릭스 멘델스존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나, 20세기 초반 음악평론가 버나드 쇼의 비판으로 인해 멘델스존은 점점 잊혀갔다. 물론 나치가 연주금지를 한 것도 큰 문제였지만, 나치가 없었다 하더라도 멘델스존의 음악은 꾸준히 하향세를 걸었을 것이다. 다시 멘델스존의 인기가 반등하게 된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무렵이었다. 그 반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지휘자 한 명이 멘델스존하우스에 있다. 바로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1927~2015) 다. 3층으로 올라가면 초상화의 향연이었던 멘델스존하우스에서 갑자기 고화질의 노인이 등장한다. 인터내셔널 쿠르트 마주어 인스티튜트, 멘델스존을 사랑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이다.

쿠르트 마주어. (출처: 멘델스존하우스)

쿠르트 마주어는 1927년 7월 18일, 현재는 폴란드 지역이지만 당시에는 독일의 지역이었던 Brieg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에도 불구 마주어의 가족들 가운데 사망자는 없었고, 마주어도 징집되었지만 부대원 150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27명 중 한 명이 되었다. 46년부터 48년까지 마주어는 멘델스존이 세웠던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서 작곡, 지휘와 피아노를 배웠지만 할레잘레 오페라에서 발레 반주자 역할을 제의 받자 중퇴했다. 이후드레스덴 필하모닉과 동독의 Komische Oper에서도 일했지만, 마주어가 가장 유명세를 얻었던 것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였다. 무려 1970년부터 1996년까지 26년을 카펠마이스터로 있었다. 이후에는 뉴욕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등에서 지휘자로 있었지만 마주어의 이름에 평생 따라다니는 직책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카펠마이스터다. 벌써 뭔가 좀 느껴지지 않는가. 아주 진한 멘델스존과의 연관성이 말이다.


마주어는 자서전에서 "멘델스존이 삶과 예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했을 때, 나는 이 통일성을 무척이나 깊게 느꼈고 그에 맞게 처신하고자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멘델스존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할 때 훌륭한 음악을 쓰면 인격도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 믿었고-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티치아노는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등-반대로 혐오스러운 음악을 쓰는 사람은 인격도 형편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딱 지 같은 곡 쓰네'라고 생각하게 하는, 인생과 곡이 일치하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답다. 쿠르트 마주어도 멘델스존의 이 말을 무척이나 마음에 새기며 살아서인지, 동독에서 살았고 동독 유력자와 직접 연결되는 내선번호가 있을 정도로 친했지만 동독 정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독일 사회주통일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런 마주어의 행보는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사건으로 연결됐다.


1989년, 그때까지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던 마주어는 풀뿌리 조직이 주최한 '거리의 음악 페스티벌'이 폭력적으로 경찰에 의해 진압당하자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마주어는 "갑자기 거리의 음악가들이 평화롭게 시위를 하려 한다고 잡혀가는 걸 보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주어는 시민운동가들과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동독 정치인들과도 연락을 취하며 평화로운 해결을 모색했다. 시위에 나오는 동독 시민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정부에서는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며 폭력 진압을 암시했다. 10월 7일, 동독 국가 건립 40주년 행사의 반대편에서 주최된 반정부시위도 진압당했고 사람들은 영상을 공유하며 분개했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는 2000명이 평화시위를 위해 운집했고 68000명이 교회 밖에 모여들었다. 마주어는 시민단체와 지역 정치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양측에서 폭력진압 반대 성명서를 내게 했다. 집회 참석자들이 아우구스투스플라츠 (현재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위치한 광장이다)에 도착하자 마주어는 게반트하우스 문을 열고 도시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했다. 마주어가 무려 호네커(당시 동독 주석)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경찰들은 폭력진압에 머뭇거렸고, 라이프치히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의 평화시위를 시발점으로 해 정확히 한 달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내가 이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멘델스존하우스 홈페이지를 확인하다가 쿠르트 마주어 인스티튜트 소개 페이지에서 어떤 게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89년의 가을-라이프치히의 거리에서"라는 제목의 게임인데, 인물을 선택해 라이프치히의 폭력 사태를 막는 게임이다. 나는 당연히 쿠르트 마주어를 선택해서 플레이해 봤는데 여러분들도 다양한 인물로 플레이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11월 기자회견 중의 '라이프치히 6인조'. 이 여섯이서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네 번째 사람이 쿠르트 마주어다. (출처: BR-Klassik)
게임 배너. (출처: 독일 역사 박물관)

Autumn 89 – On the Streets of Leipzig -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게임 링크다.)


이후 마주어는 대통령 후보로 나와달라 (!)는 요청까지 받지만 평생 음악계를 떠나지 않았고, 80년대 중반에는 29편에서 언급된 멘델스존 동상을 복원하는 주축이 되었다. 91년대에는 현재의 멘델스존하우스 건물을 복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인 국제 펠릭스 멘델스존 재단의 회장이 된다. 그럼 멘델스존하우스가 91년까지는 비어 있었냐. 그렇다. 중간에는 무슨 페인트 회사였는지 사진사 암실이었는지로도 쓰이고, 덕분에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물론 건물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긴 했다. 1944년의 폭격으로 인해 라이프치히 기차역부터 멘델스존하우스 사이에 남아 있는 폐허가 아닌 건물이 한 채도 없어서 기차역에서 멘델스존하우스가 바로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어찌 보면 '행운아' 펠릭스 멘델스존의 가호를 받은 건물이었던 거다. 쿠르트 마주어의 이런 노력은 1997년 멘델스존하우스 개관으로 결실을 맺었다. 내가 멘델스존하우스를 볼 수 있던 건 모두 이분 덕이었던 거다. 뉴욕 필하모닉으로 간 이후부터 마주어 씨의 행보에 대해서 내가 평가를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멘델스존의 유산을 지키는 데 있어서 이분만큼 내가 감사하는 사람은 없다. 유명한 곡 몇 곡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잊혀 있던 멘델스존의 곡들, 예를 들자면 현악교향곡 같은 곡들의 리코딩을 남겨 준 것도 이분이다. 정말 멘델스조니안으로서는 눈물이 난다.

멘델스존 하우스 전시 중. 멘델스존 하우스 얘기 말고도 전후 평화콘서트, 멘델스존 갈라 이야기나 쇼스타코비치가 볼펜으로 선물한 악보도 볼 수 있다. (출천: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마주어가 세운 멘델스존 바르톨디 재단의 로고다. 음표와 플랫 기호를 사용해 멘델스존의 M과 바르톨디의 b를 표현했다. (출처: 위키백과)

어떤 기사에서는 이것이 시나 정부의 도움은 거의 없이 자신의 카리스마만으로 마주어가 일구어낸 일이라고 말한다. 실로 외로운 싸움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주어는 1999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차 대전 후, 많은 음악가들이 라이프치히로 와 그[멘델스존]의 이미지를 복구하려 애썼습니다. 나는 그가 무척이나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나는 그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에 언제나 매혹당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를 더 알리고자 애썼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죠. 많은 사람들은 이 도시 제일의 음악가는 바흐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둘은 잘 어울리는 상호보완적인 작곡가들입니다.


바흐가 없었다면 멘델스존도 없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지금의 라이프치히 음악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단원의 80% 이상이 멘델스존 음악대학 출신이었고, 지휘자가 관객들을 등지는 지금의 관행도 멘델스존이 만든 만든 것이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것도 멘델스존이 한 일이다. 멘델스존보다는 바흐로 훨씬 유명한 도시지만, 나는 지금의 라이프치히 예술계에는 바흐보다 멘델스존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그 점을 알아봐 주고 나보다 한 발 앞서 멘델스존을 위해 평생을 바쳐 싸웠다는 것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마주어 씨가 멘델스존에게 그랬던 것만큼 헌신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아, 여기서 잠깐 리스트의 곡 부제를 빌려와 볼까.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쿠르트 마주어 전시실. (출처: 멘델스존하우스)

2024년 6월, 멘델스존하우스가 문을 닫을 때까지 정신없이 박물관을 구경하던 멘델스존 오타쿠 두 명은 쫓겨나듯 허겁지겁 폐관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는 해가 지기 전에 29편의 멘델스존 동상을 구경해야 했다. 멘델스존 동상은 바흐 동상의 반대편쯤에 있었다. 지도를 보면 바흐 동상 (new)와 바흐 기념상 (old) 그리고 멘델스존 동상이 ㄴ자 모양으로 각 꼭짓점마다 있다. 기단 높이 약 4미터, 멘델스존 동상 자체 높이 2.8미터, 총 6.8미터의 동상이었다. 꽃이라도 가져다가 놓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멋들어지게 토가를 차려입은 멘델스존 위로 웃자란 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소에는 토가를 입는 시대 사람도 아닌데 토가를 입혀 놓으면 징그러워하는 나였지만 멘델스존에게는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이 동상이 게반트하우스 앞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아쉬움에 살짝 시무룩해질 뻔했으나 지금의 게반트하우스에는 모양이 다소 이상하긴 해도 또 다른 멘델스존 조각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치가 무너뜨리고, 쿠르트 마주어가 다시 세운 멘델스존 동상.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도로 맞은편에는 멘델스존이 오르간 콘서트를 열어가면서 자금을 모아 온 바흐 기념물이 있었다. 아니, 뭐랄까, 새로 만들어진 바흐 동상이나 멘델스존 동상은 그렇지 않았는데 어쩐지 이 옛날 바흐 기념물은... 좀 웃겼다. (미안, 멘델스존!) 일단 생각보다 너무 작았고, 기념물 주변으로 아무도 못 들어가게 펜스가 쳐져 있었다. 보존을 해야 하니까 당연한 일인데, 바흐 전신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집 같은 것 안쪽에 바흐 흉상이 집어넣어져 있는 형태라서 아무리 봐도 바흐가 기둥에 봉인당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청동이 비싸니까 돌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나 보다. 없는 살림에 바흐 기념물은 또 만들어 주고 싶던 멘델스존의 정성이 느껴져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흐를 부활시키고 도시의 음악 지평을 새롭게 바꿔놓은 멘델스존, 그 멘델스존이 최초로 세운 바흐 기념물, 그리고 지금의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유명해진 스타 바흐까지 세 개의 기념상들이 있으니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아, 나는 라이프치히가 정말 좋다! 라이프치히에 담겨 있는 역사가 너무나 좋다! 잊힐 뻔한 바흐를 지켜낸 멘델스존, 그런 멘델스존을 지켜낸 쿠르트 마주어, 그리고 쿠르트 마주어의 기억을 지키는 멘델스존하우스... 나는 이 기억하는 이들의 고리가 너무나 좋다. 지금도 멘델스존하우스는 멘델스존의 정신을 투철하게 지키고 있다. 휴무일 없이 매일 박물관을 운영하고, 내가 찾은 모든 박물관 인스타그램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박물관과 멘델스존에 관한 사실을 홍보하며, 파니의 정신을 이어 일요음악회를 개최하고, 멘델스존 음악대학의 학생들이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며, 멘델스존이 바흐를 발굴해 냈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들추어내고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통념을 더 깊이 파고든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멘델스존하우스는 단순히 멘델스존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는 박물관이 아니다. 멘델스존하우스는 멘델스존과 파니 헨젤, 세실 멘델스존과 쿠르트 마주어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는 박물관이다. 그리고 나의 어깨를 툭툭 쳐서 내게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를 가르쳐주는 박물관이다.

최근 유명한 바흐 동상과 멘델스존이 모금을 해서 세운 첫 바흐 가념비.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박물관은 그런 곳이어야 한다.


마무리는 좀 가볍게 해 보자. 언제나처럼 멘델스존하우스 인스타그램을 눈팅하고 있던 나는 새벽 두 시 무렵 새로고침을 하다가 멘델스존 박물관이 새로운 게시물을 올린 것을 보게 되었다. 2024년 8월 20일, 멘델스존하우스가 방문객들이 남겨준 방명록을 정산한 영상이었다. 아니, 그런데 영상 썸네일에 뭔가 익숙한 그림이 보이는 것 아닌가?! 거짓말 안 하고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영상 오른쪽 위에 있는 건 영락없이 내가 남겨 놓고 간 방명록에 같이 그려 놓은 멘델스존 캐리커처였다! 이로부터 2개월 전에 올라온 베를리오즈 박물관 방명록에는 내가 그려놓은 베를리오즈가 없어서 서운하던 참이었는데 멘델스존 박물관에서 이렇게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박제해 주다니... 역시 나는 멘델스존 박물관에 제대로 코 꿰인 것 같다. 이런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니까 여러분들 모두 박물관에 가면 꼬박꼬박 방명록을 남겨두기를 권해드린다. 박물관 기행의 작은 행복이다. 박물관은 우리의 관심으로 유지된다. 그러니 박물관이 방문객에게 감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멘델스존의 정신을 담고 있는 박물관에서 내게 방문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걸 보니 멘델스존이 직접 고맙다고 인사를 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멘델스존 씨!

왼쪽은 내가 적어놓고 간 방명록의 멘델스존 그림. (출처: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 오른쪽은 멘델스존하우스 인스타그램에서 올려준 내 방명록 속 멘델스존!

최종 평가

명칭: 라이프치히 멘델스존하우스 (Mendelssohn Haus Leipzig)
운영시간: 연중무휴, 10:00~18:00. 단, 12월 24일과 12월 31일에는 오후 3시에 닫는다. 아니... 그럼 정말로 다른 휴일에도 안 쉬냐고? 정말로 안 쉰다... 무서운 박물관이다... 따로 보수공사 공지가 없다면 운영 중인 것이다.
입장료: 성인 10유로, 할인가 8유로
사이트 링크: Home | Mendelssohn Haus Leipzig

1. 도시 접근성: ★★★★

1편 참고. 라이프치히의 접근성은 훌륭하다.


2. 도시 내 접근성: ★★★☆

역에서 약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다. 바흐하우스랑은 10분 정도 거리인 듯하다. '링'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데, 가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아 천하의 길치인 나도 한 번만에 가는 길을 외워서 휴대폰 없이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라이프치히에 와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 갈 텐데, 그 게반트하우스에서 3분 거리다. 게반트하우스와 멘델스존하우스 사이 큰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를 건너는 게 좀 까다롭다는 것만 빼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3. 소장품: ★★★★

4점을 줄까 3.5점을 줄까 많이 고민했다. 결국에는 4점을 주었다. 많은 전시품들이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뭐야 이건?' 하는 생각이 잠깐 들 수도 있는데, 1층 컨베이어벨트에 소장품을 많이 때려 박아놓은 데다가 위층에도 식기, 카를의 옷, 멘델스존의 편지, 방문카드, 머리카락이 있지 않던가. 그리고 출입 제한이 되어 있는 세실의 방, 멘델스존의 서재 등의 가구는 모두 멘델스존 가족이 실제 소장하고 있던 가구들을 가지고 온 것이니까 '티가 나지 않지만 4점'이라는 표현이 가장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앞의 슈만 박물관이나 리스트 박물관처럼 소장품에 압도되는 박물관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 두고 싶다. 그리고 박물관 자체의 규모에 비해서는 소장품이 적다고 느껴질 수 있다. 절대적 숫자로는 적지 않은데, 상대적으로는 적게 느껴질 수 있을 듯하다.


4. 언어 지원: ★★★☆

이게 정말 희한한 케이스인데... 영어 텍스트랑 독일어 텍스트가 둘 다 지원되기는 한다. 그런데 영어 텍스트의 내용은 독일어 텍스트보다 간략하다. 왜 그런 걸까? 박물관에서 제공해 주는 오디오가이드는 펜... 모양으로, 각각의 전시물에 있는 오디오 스티커에 가져다 대면 센서를 통해 펜을 감지하고 오디오가이드가 제공된다. 영어 오디오가이드는 내용 누락 없이 깔끔하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오디오가 귀찮고 텍스트가 편한 내게는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었다.


5. 가성비: ★★★

할인 시 8유로, 할인 없을 시 10유로다. 딱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적정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조금 더 저렴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눈물이 난다.) 일요콘서트는 별도 가격으로 책정해서 할인 시 14유로, 할인 없을 시 정가 18유로다. 연간이용권은 30유로인데, 벌써 멘델스존하우스를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 나는 멘델스존하우스에 24유로를 기부했고... 혹시라도 유럽여행을 또 갈 일이 생긴다면 진지하게 연간이용권을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고 싶을지 누가 아는가.


6. 규모: ★★★★☆

완벽한 4성급의 규모이다. 다만 2016~2017 시즌 2층에 파니 전시와 마주어 전시가 추가되었고 2024년에는 세실 전시까지 추가된 걸 보면 얼마나 더 확장될지 모르는 박물관이다. 30년쯤 뒤에 갔을 때는 아이제나흐 바흐박물관이나 반프리트 바그너 저택만 한 규모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그런 희망을 품어 본다. 그리고 규모 자체는 4성급이지만, 전시 볼륨이 무척 빽빽하고 정보량이 많다는 점에서 0.5점을 추가했다. 나와 내 멘델스존 오타쿠 친구처럼 멘델스존에게 미쳐 있는 사람들에게는 3시간도 모자란 박물관이다. 오디오가이드를 다 들으면 약 파니와 쿠르트 마주어 인스티튜트 포함 1시간 30분~2시간 정도의 관람시간을 매기면 좋을 듯하고, 파니 전시의 미디어스테이션이나 쿠르트 마주어 전시의 만화 등 모든 체험을 즐기고 온다면 2시간~2시간 30분 정도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내부만 깔끔하게 둘러보고 가이드는 따로 듣지 않는다면 30분이면 충분하다.


7. 상호작용: ★★★☆

1층 멘델스존이 살던 아파트먼트가 제일 상호작용이 없는 공간이다. 0층에는 전설의 이펙토리움, 멘델스존 전곡 라이브러리 등이 있고 2층에는 쿠르트 마주어 만화 (아직 제작 중이긴 하다) 나 '바퀴' '파니의 코스모스'처럼 같은 전시 내용도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1840년대 의상 및 사진 찍기 체험은 음악사에 관심 없는 사람도 좋아하는 것 아닌가! 제법 박물관과 상호작용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박물관과 똑같은 내용을 설명해도 캐비닛 서랍을 열어서 설명을 확인한다든가, 책을 펼쳐서 페이지를 넘긴다든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시 구성이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놓았다.


8. 굿즈: ★★★☆

진짜... 하... 잘 뽑는 건 아니다. 작곡가 박물관들이 전체적으로 굿즈를 정말 못 뽑는다. 하지만 처참한 수준도 아니긴 하다... CD, 당연히 많이 팔고 있다. 쿠르트 마주어 전집을 불과 160유로에 팔고 있다. 20만 원만 들고 가서 사고 싶다. 또 멘델스존에 관한 다양한 저술들도 팔고 있다. 기본은 됐다는 소리다. 그리고 오르골도 판다. 2022년에 갔을 때는 허름한 수동오르골만 하나 있었는데 2024년에 다시 갔더니 태엽자동오르골이 생겼다. (역시 발전하는 박물관이다!) 덕분에 바흐 오르골과 세트로 맞춰 왔다. 또... 휴대폰 줄도 팔고, 펠릭스와 파니 컵도 팔고 (이런 건 정말 왜 파는지 모르겠다!) 펠릭스와 파니 흉상도 판다. 이 흉상들, 크기가 큰 것도 아니면서 46.5유로라는 흉악한 가격을 자랑한다. 파니는 옷을 입혀 놓고서는 펠릭스는 홀딱 벗겨 놓았다. 아니, 좀 예쁜 흉상 만들어서... 옷도 입혀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멘델스존 서명을 새긴 연필도 팔고 있고... 이외에도 소소한 것들은 있다. 그나마 내가 마음에 가장 들었던 굿즈 두 개를 소개해 보자면 하나는 펠릭스 멘델스존 서명이 있는 편지칼. 2022년 2월에 샀던 굿즈인데 6개월간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날아오는 편지를 하나하나 개봉할 때마다 편지칼을 쓰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멘델스존의 수채화 엽서북...인데, 진짜 비싸다. 10만 원 아래면 사야지, 하고 봤더니 155유로, 115유로. 아니 이건 비싸도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수채화 그림 도록이랄까, 그게 사이즈가 크긴 해도 무슨 20만 원을 하냔 말이다! 그래서 안 사고 나왔다. 그림 개별 엽서도 파는데 한 장당 약 8유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싸다... 전체적으로 굿즈가 비싸다... 엄청 예쁘게 뽑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그럭저럭 많이 있으니까 3.5점 준다.

내가 구입한 멘델스존하우스 굿즈.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긴 한다.


9. 큐레이팅: ★★★★

얼핏 보면 인생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 같지만 분명히 테마가 있다. '여행' 테마라든가, '교육' 테마라든가, '일상' 테마라든가. 아, 참고로 이 큐레이팅은 멘델스존의 음악보다 멘델스존이라는 사람에게 훨씬 집중을 하고 있으므로 작곡가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맞지 않는 큐레이션일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꼭 맞는다!

방 하나에 멘델스존 가족의 전통을 살려서 일요음악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 것, 합격. 멘델스존 서재를 그대로 복원한 것, 합격. 그러면서도 전시 공간은 확보해 놓고 하나하나의 전시물에 자세한 설명과 배경이야기를 덧붙이는 것, 합격. 작은 방들에는 전시 테이블을 여러 개 가져다 놓는 대신 보면대 위 책자를 두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 합격. (책자를 쓰는 건 좁은 공간에서 많은 정보량을 전달할 때 아주 좋은 선택이다) 파니 전시실에서는 천장 조명을 약하게 쓰고 상대적으로 어두운 공간으로 만들어둔 것도 합격, 세실 전시실에서는 세실이 그린 그림이 벽으로 연장되는 것처럼 연출해 놓은 것까지 합격. 합격, 합격, 합격, 죄다 합격이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면 몇 개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테다...


10. 총평: ★★★★

어서 멘델스존과 사랑에 빠지라고 설득하는 박물관.

최대 장점: 사람 눈물 나게 하는 큐레이팅, 큰 규모와 무지막지한 정보량

최대 단점: 굿즈가... 비싸다... 뭔가 전체적으로 비싸다.

추천 여부: O


아참,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귀국 후 나는 주기적으로 멘델스존하우스 인스타그램을 확인하고 있다. 2024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펠릭스의 여자들' 이라는 카드뉴스로 멘델스존과 관련이 있던 열두 명의 여성을 소개하는 카드뉴스를 올렸고 2023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멘델스존이 그린 수채화를 업로드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멘델스존 가족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일화를 풀어 주었다. 가장 최근 올라온 게시물은 4일 전 게시물로, 'Felix Fun facts' 라는 새로운 코너가 운영될 예정인지 카니발 시즌에 멘델스존은 뭘 하고 있었는지를 추적해서 올려 줬다.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Das Museum unter der Lupe" (박물관 들여다보기 정도의 느낌이다) 로, 각각의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를 짧은 릴스로 만들어서 올려준다. 여러 박물관을 다녀오며 누차 이야기했듯 무엇을 전시했느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그 무엇의 맥락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이다. 멘델스존하우스는 그런 면에서 아주 탁월하다. 7월 10일에는 라이프치히 거주민들에게 멘델스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진행한 인터뷰 릴스도 올라왔다. 홍보까지 놓치지 않다니. 정말 대단한 박물관이다. 그러니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멘델스존하우스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Instagram 링크를 눌러 멘델스존하우스 계정을 팔로우해보는 건 어떨까?


예고: 에필로그. 박물관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었는가? 그래서 제일 좋은 박물관은 어딘데? 혹시나 질문이 있다면 답글을 달아주시기를. 에필로그에서 충실한 Q&A로 돌아오겠다.


31. 에필로그

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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