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훈련소 훈련일지 - 1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늑장을 부렸다.
'아, 정말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네'
논산 훈련소로 가는 날이다.
서른,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시작한 군 생활.
꿈과 목표를 위해 쉴 새 없이 달렸고,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국방의 의무는 나의 목표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 가야 하는 군대.
차량 전복사고로 생긴 디스크 파열 덕분에
사회복무요원으로서, 3주 훈련소에 다녀오면 되었다.
현역이나 직업 군인 분들에 비하면 짧은 3주지만,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고통은 상대적이지 않다, 안타깝게도.
전날 가위도 쓰지 않고 이발기만 사용해
밀어낸 삐뚤빼뚤한 머리를 보며 칫솔을 움직였다.
슬픈 노래 가사들이 튀어나온 디스크를 따라 흘러내렸다.
시계를 보니 11시, 슬슬 어머니의 차가 도착할 시간이다.
오늘 아침처럼 3주가 지나간다면 좋겠다.
제발, 제발.
가는 길 내내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훔치셨고,
할머니께서는 오래간만에 보는 진풍경에 농담을 던지셨다.
'얘, 예전엔 부모님 떠나면 조교들이 욕하고 그랬어~'
애써 웃음 지으며 더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지인과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를 보냈다.
그래, 유난도 떨 수 있을 때 떨어야지.
논산과 연무대라는 글자가 표지판에 보일 즈음
어머니는 갑자기 운전이 서툴러지기 시작했다.
급커브를 하거나 내비게이션을 못 보는 등 몽롱해지셨다.
눈물이 눈앞을 가리고, 온갖 생각에 잡아 먹히신 듯
두려운 눈동자를 보이셨다.
다행히도 안정을 취하시고 나아지셨지만.
주차장에 도착하니, 온 동네 빡빡머리들은 다 모인 듯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PX를 오가는
부모님들이 보였다.
드디어 시작된 입소식.
800명의 까까머리 남자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이곳이 아니면 절대 못 볼, 보기도 싫은 광경이겠지.
어색한 경례와 가족들과의 짧은 인사를 마친 뒤
부모님들이 귀가하시고 의자에 앉아 설문조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조교들은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방부 보안어플로 카메라를 차단 및 각종 어플을 설치한 뒤
시작된 생활관 배정, 이 순간에 나의 3주가 결정될 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배정되는 순번은 현재 앉아있는 가로줄 대로였다.
내 양옆에는 덩치 큰 친구들이 앉아있었기에
가방 속 취침용 귀마개를 움켜쥐었다.
훈련소로 들어가는 길은 정말 길었다.
이 길을 다시 걷는 날은 수료하는 날이겠지.
캐리어의 망가진 바퀴와 땅을 번갈아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생활관과 새로운 나의 식별 번호.
27 교육연대 8중대 2소대 9 생활관 133번 훈련병.
이젠 이름 석자 대신 이 번호가 나를 대신한다.
입던 옷을 내려놓고 보급품을 받으러 강의장으로 이동했다.
ROKA 수건, 러닝, 속옷, 트레이닝복, 그리고 양말을 받았다.
그 외 생필품도 많지만 충분한 듯 부족했다.
첫날 저녁은 고추장찌개 (건더기가 거의 없는) 쌀밥과
청포묵무침, 섞박지 정도였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27 연대가 몇 없는 케이터링을 하는 교육연대라고 한다.
식당에 입장하기 전 손을 씻어야 하고 같은 생활관끼리
식사하도록 해야 했지만, 아직 모두가 식판만 보고 먹는다.
다들 실감이 안나는 눈치다.
부조리들이 많이 개선된 지금은 초중고 수련회와 비슷하다.
지금 세대와는 다르겠지만 약간의 윽박지름과 명령들.
명확히 다른 점은 2박 3일이 지나도 집에 못 간다는 것.
창 밖으로 들리는 군화, 구령, 그리고 군가 소리.
입으면 모자라 보이는 생활복들에 기가 눌린다.
주변엔 온통 빡빡이다.
화가 억눌렸거나 조심스러운 소, 중대장들.
그리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있을 훈련소 분대장들.
우리의 하루와 그들의 하루는 다르게 흐를까.
내 생활관 자리는 문에서 가장 먼 이층 침대 1층이다.
바로 옆에는 방을 데우는 라디에이터가 있다.
생각보다 컨디션은 준수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운동, 책, 그리고 글을 열심히 써야지.
생각보다 지내기 좋지만, 어린 친구들은 다소 상기되었다.
사소한 마찰과 다툼은 피하는 게 좋겠지.
우리 생활관은 129번부터 143번 훈련병까지 지낸다.
대략 14명에서 16명 정도의 인원이 지내는데,
약간 자존심이 강할 것 같은 친구 외에는 다들 순해 보인다.
물론, 지내고 봐야 알겠지만 물건을 훔쳐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 수 있으니 모든 물건에 이름과 번호를 적어두었다.
그럼에도 잃어버리긴 하지만.
저녁 8시 즈음 샤워 준비 후 목욕탕으로 향했다.
대중목욕탕에서 냉/온탕이 없는 규모로, 다들 어색하게
사회의 거품과 때를 씻겨낸다.
샤워물품을 다 챙긴 줄 알았는데 정작 수건을 안 챙겼다.
이미 알아챘을 땐 너무 늦었고 빌리기도 내키지 않아
샤워타월로 물기를 털어낸 후 옷을 입었다.
생각보다 러닝과 속옷, 생활복은 편하고 좋다.
전쟁터에서도 편하도록 고안한 걸까, 제대로 털지 않은
물기도 금방 마르고 신축성도 좋다.
더욱이 짧은 머리의 편리함도 알게 되었다.
물기를 털면 90%의 물기가 사라진다.
다만, 눈가에 흐르는 건 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다.
우리가 가고 나서도 몇 달, 혹은 1년 이상을 지내야겠지.
내겐, 부담감 없이 지낸다면 어지간한 기숙사보다 좋았다.
첫날밤 미세한 조명이 켜진 생활관 불빛에 적응할 즈음
불침번으로 일어났다.
시간도 2시부터 3시, 기가 막히게 피곤할 시간이다.
경작서로 불리는 경계작전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교대했다.
근무수칙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잠자러 들어간 132번을 보며
여기서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느꼈다.
책, 프로틴 가루 등의 생필품은 넉넉하게 가져오는 게 좋다.
아마 며칠간은 주변 훈련병과 대화하기 어렵겠지.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다 서서히 친해져야겠지.
첫날의 종합적인 소감은 '생각보다 좋다'였다.
예의를 벗어나는 행동만 아니라면 관리자 모두가 친절했다.
뭐, 아직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않았으니 그러려나.
불침번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눕혔다.
어서 자고 일어나 내일을 맞아야지.
하지만, 이 생각이 끝나기도 전 2일 차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