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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Nov 09. 2022

고스톱 돈 따려고 하나?

어머니와 매일 통화를 한 지 2년 차에 접어들며 한 가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습관은 우리의 모자 관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통화가 거듭될수록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이야깃거리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이야기라면 꺼내지 않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내 미러링 전략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잔소리 공세를 견디다 못한 나는 잔소리를 잔소리로 맞받아치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가 지나치게 쏠쏠했다. 야식 드시면 안 된다. 운동하셔야 한다. 맵고 짜게 드시지 말고 담백하게 드셔라. 건강검진 받으셔라. 나 결혼하는 것 기다리지 말고 어머니 재혼하셔도 된다. 만나는 분 없으시냐. 나한테 교회가라고 잔소리하시더니 피곤하다고 예배를 빼먹으시면 되겠냐. 전에 없던 스트레스를 받은 어머니는 잔소리의 위력을 깨닫고 내게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서로의 잔소리를 땅바닥에 내려놓자는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자, 이제부터는 비무장이야.


 그 결과 우리의 통화에는 안전한 이야기만 남았고, 대화는 매일 같은 굴레를 돌게 되었다. 날씨, 일, 식사. 일정한 대화거리들이 끝나고 나면 잠시 마가 떴다. 뭐라도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말해야 할지는 몰라서 서로 전화기만 붙들고 있다가 곧 돌아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들어가라. 그럼 나도. 들어가세요. 뚝. 그렇게 무정한 평화가 반복되면서 나는 어머니를 탓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잔소리가 아니면 고작 이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며 우리 관계의 계산서를 슬쩍 어머니 쪽으로 밀었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지나친 관심으로 서로를 할퀴지 않는 이 정도의 거리감을 지키는 것이 원숙한 모자지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오판이자 오만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광주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막내 이모가 사는 고흥에 놀러 가자고 했다. 딸 많은 집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인 막내 이모를 유독 좋아했다. 첫째 이모는 어려워했고 둘째 이모와는 늘 투닥거렸는데, 막내 이모만 만나면 어머니에게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고흥에는 자주 가시니까 다른 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도 완강하게 고흥만을 고집하던 것도 다 막내 이모가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흔드는 이모의 모습이 보였다. 이모는 얼마 전 아들을 장가보내고 이제는 좀 놀아야겠다며 새로 뽑은 차를 끌고 친히 픽업을 나왔다. 어머니는 이모를 보자마자 인사도 거르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졸랐다. 이모는 운전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곧 까짓 거 그러자며 차에 타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는 누가 언니인지 모를, 손위 아래가 바뀐 것 같은 케미가 있었다. 이모는 네비에 더듬더듬 나로 우주센터를 찍고 불안한 주행을 시작했다.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의 이름은 나로2대교. 육지와 내나로도를 잇는 나로1대교의 속편인 영 심심한 이름이었다. 다리 위를 지나는데 조수석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이모에게 질문을 건넸다.


 "나로호를 왜 여기서 발사하게 됐는 줄 알아?"


 나는 이모가 지금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이야기는 이따 하자고 어머니를 말렸지만, 이모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설명을 시작했다. 나로호 발사대가 설치될 후보지가 몇 곳으로 추려졌을 때 조건이 다들 고만고만했다. 지반이나 발사각도, 안전 문제를 모두 고려했을 때 압도적으로 탁월한 곳은 없었다. 그중에서 고흥이 최종 선정된 건 다름 아닌 이름빨이었다.라는 이야기.


 "높을 고 흥할 흥. 높은 곳에서 흥한다는 뜻이 마음에 쏙 들었던 거지."


 거기까지 말하고 어머니가 이모 쪽을 바라보자 이모는 재미있다는 듯 대답했다. 


 "근데 망했네? 고흥군이 아니고 고망군이네. 고망군."


 나는 뒷좌석에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놀랐다. 첨단의 극을 달리는 우주산업의 영역에서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점치듯 했다는 이유에서도, 그 이야기의 진위가 의심돼서도, 나로호가 3번째 발사에는 성공했으니 사실은 망한 게 아닌데 다들 이렇게 망했다고 기억한다는 사실 때문에서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러워서였다.


 "근데 그게 고흥 잘못은 아니야. 고흥이 한자로 쓰면 높을 고 흥할 흥이 맞지만 원래 뜻은 그렇지 않았거든. 옛날에는 여기가 고이 마을이었어. 고이가 괴, 그니까 고양이라는 뜻이었는데, 한자음만 빌려다가 고이 부락이라고 썼대. 그게 바뀌고 바뀌다가 고흥이 된 거지."


 눈을 반짝거리며 썰을 풀어놓고 있는 어머니의 생소한 모습. 내가 알던 어머니의 여러 모습 속에 저런 모습은 없었다. 더군다나 지적 대화라면 내가 환장해 마지않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째서 한 번도 어머니에게는 이야기를 시도해보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단순하고 심심한 사람이라 이런 이야기해도 모를 거라고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음표의 갈고리 끝이 날을 세우고 내 미간을 겨눴다. 문제지 앞장의 스무 문제를 모두 풀고 만족스럽게 성적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실은 뒷장에 다섯 문제가 더 있는 스물 다섯 문제짜리 시험이었던, 그래서 기대와 다른 형편없는 점수가 적힌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었다.


 우주과학센터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우주과학관으로 입장했다. 나는 잠시 산책을 하겠다며 따로 걸어 나왔다. 과학관 바로 아래에는 바닷가가 붙어있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끝에서 끝이 닿는 조그마한 해변이었다. 물때가 한창이라 깊은 곳까지 바닷물이 들이닥쳐 있었다. 방파제에 앉아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데 이모가 다가왔다.


 "어머니는요?"

 "조금 더 둘러보겠대. 엄마랑 잘 지내? 요즘도 잔소리 많이 하니?"

 "아뇨, 요새는 그냥 서로 포기한 것 같아요."

 "그래? 평생 싸울 줄 알았더니. 똑같은 사람들이 원래 싸우잖아."

 "에이 저랑 어머니랑은 다르죠."


 이모는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짓더니 바닥을 툭툭 털고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언니 어렸을 때 얘기해줄까? 언니가 어렸을 때는 진짜 너랑 판박이였어. 공부도 엄청 잘했어. 반에서 손가락 안에 들었거든. 지금이야 그냥 아줌마지만, 그때 언니는 좀 멋있었어. 아는 것도 많고 잘하는 것도 많았거든."

 "어머니 가요?"

 "그럼. 언니가 대학도 단번에 붙었는데 할머니가 안 보내준 거야. 너네 할아버지 노름빚 때문에 집안 형편이 별로 였거든. 위로 언니들도 다 대학을 안 가기도 했고. 뭐 사실 언니들은 보내준다고 했어도 못 갔을 거야. 공부랑은 거리가 멀었어 다들. 너네 엄마만 억울했지. 근데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뜬금없이 나를 대학에 보내준 거야. 나는 성적도 엉망이었거든? 너네 할머니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 중에 한 명만 공부시킨다면 언니였어야 하는데, 내가 꼭 언니 기회를 빼앗아 간 것 같아."

 "처음 듣는 얘기예요."

 "너한테도 말 안 했나 보네. 하긴 나한테도 그랬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티도 안 냈어. 서운하단 말도 안 하더라. 그러다 딱 한 번 말한 적이 있어. 너 학교 입학하고 부모님 최종학력 쓰는데 고졸이라고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럽더래. 자기도 대학 갈 수 있었는데 그랬으면 거기다가 대졸이라고 쓸 수 있었을 텐데. 억울하다고 그러더라. 내가 언니한테 미안한 게 많아."


 이모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말을 이어갔다.


 "엄마 무시하면 안 돼. 니 눈에 엄마가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돼. 엄마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니가 알아줘야 해."


 나는 끄덕거리기엔 염치가 없어서 입술만 씹었다.


 "참, 너희 엄마한테 아빠 소개해준 것도 나다? 알고 있어?"

 "네, 알아요. 어머니가 아버지랑 싸우실 때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이모한테 소개받는 게 아니었다고."


 이모는 호탕하게 웃더니 역시나 미안할 일이 많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내게 여기서 더 있을 거냐고 묻고서는 내가 그러겠다고 하자 다시 전시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멍하니 먼바다를 보고 있는데 발아래에서 물 몇 방울이 튀어 올라왔다. 파도에 휩쓸려 말려들어온 바닷물이 난잡하게 얽힌 테트라 포드의 굴곡들에 부딪혀 이리저리 굽이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당신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게 된 것이. 당신에 대해서는 모두 안다고 생각하고 넘겨짚기 시작한 것이. 당신을 시시하게 여기게 된 것이.


 당신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던 때가 있었고 당신이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당신의 울타리가 굴레처럼 여겨졌다. 활주로처럼 놓여있던 당신을 딛고 떠나 당신이 가본 적 없던 길로 날아가기 시작했을 때. 부모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고,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보는 세계가 달라졌을 때. 더 넓은 곳을 찾아가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이국의 음식을 먹고 난해한 책을 읽고 유명한 그림을 보고 비싼 공연에 가고, 그러다 가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 이만큼 누리지 못한 당신을 안타깝게 여겼다. 좋은 것을 앞에 두고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 정도면 불효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만나 당신들을 성토할 때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고루한 당신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여생 동안 바뀔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가 당신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술잔이 돌아가고 취기가 오르며 존중한다는 말은 어느새 포기해야 한다는 말로 바뀌어 있었는데 우리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벌건 얼굴로 말했던 쪽이 진심이었다. 존중이라는 명분으로 당신을 포기하는 중이었다. 어머니를 무시하지 말라던 이모의 말이 아프게 와서 박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교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앙이 깊은 이모부가 이번에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며 얼마나 은혜스러운 일이냐고 서로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바로 에어팟을 껴야 할 이야기였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만회를 위해 드립을 일발 장전했다.


 "역시 신앙은 진앙(역주 : 여동생의 남편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이제."

 "진앙은 나한테 진앙이고, 너한테는 이모부지."


 실패였다. 나름 괜찮은 라임이라고 생각해서 사투리까지 얹어서 회심의 드립을 쳐봤지만 돌아오는 건 어머니의 진지한 교정이었다. 역시 안 맞아. 나는 마치 웃길 의도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냐고 반문하고 다시 잠자코 기회를 엿보았다. 잠시 대화가 소강되었을 때 질문을 던졌다.


 "창세기 첫 부분에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부분 있잖아요. 거기 기억나세요?" 


 두 사람은 교회 얘기만 꺼내도 자리를 피하는 내가 성경 이야기를 꺼내자 놀란 듯한 눈치였다. 역시 성경은 성공이제. 나는 성공을 직감하고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 중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나온다. 이름이 므두셀라이고 천 살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권에서는 므두셀라가 장수의 상징이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겨서 과거가 미화되는 것을 뜻하는데, 그럼 왜 이름이 므두셀라 증후군이겠냐. 이러면 오래 산다는 거다. 그러니까 오래 살려면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겨둬야 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어머니는 휴대폰 메모장을 켜고 다시 말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카톡으로 지식백과사전의 링크를 보내주었다. 어머니는 링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네가 성경 얘기도 다 아냐며 연신 물었다. 


 어머니는 며칠 뒤 통화를 하다가 그때 고흥에서 해 준 성경 얘기를 어떻게 알았냐며 다시 채근했다. 아무래도 그게 엄청 기특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어머니가 내가 교회를 다닐 수도 있겠다는 헛된 기대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다급히 얼버무렸다. 별 것 아니라고. 책에서 봤다고. 그러자 어머니는 내 말투에서 퉁명스러움을 느꼈는지 반가움을 서둘러 거둬들였다. 나는 눈치를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미안해져서 엉겁결에 또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에덴동산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봤거든요."


 솔깃해하는 어머니에게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중간중간 자꾸 되묻는 것이 아무래도 메모지에 받아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어머니와 나는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백과사전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문자를 보냈다. 보통 어머니가 문자를 보내면 시편이나 기도문이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질문이었다. 오스트리아랑 오스트레일리아랑 왜 이름이 비슷한 거야? 나도 이유를 잘 몰랐기에 검색을 해보았다. 결론적으로 둘은 관계가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고대 독일어의 동쪽(ost)에서 유래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라틴어의 남쪽(auster)에서 유래했는데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두 나라 국명의 유래를 설명해주고 나도 덕분에 새로운 걸 배웠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어머니가 전화를 하다가 말이 살이 잘 안 찌는 것 알지? 하며 뜬금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말은 항상 뛰어다녀서 살이 안 찌는 동물인데 걔가 살찌면 얼마나 풍성한 계절이겠냐며 천고마비의 계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백과사전에 담긴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어머니의 해석 쪽이 훨씬 그럴싸했다. 어머니와 나는 확실히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평화협정의 이전으로 돌아가 서로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더 투닥거리고는 했다.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나는 재능이 없는 도박사 같았다. 적은 돈을 꾸준히 잃다가 크게 한 번 딴다. 매일 조금씩 미안함을 쌓다가 죄책감을 만회하려고 한 번씩 넘치는 애정을 쏟아내곤 했다. 본전은 요원했다.


 "니 맘대로 살아라."

 "응, 그럴게."


 얼마 전에 로스쿨 진학 문제를 놓고 다툴 때는 망통을 잡고 올인을 때렸다. 나는 나대로 반대할 게 뻔해서 말하지 않으려던 걸 큰맘 먹고 이야기했더니 반응이 역시나여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결정하려던 것이 답답해서 서로 말이 세게 나가다가 결국 둘 다 썩은 패를 들고 올인을 외치고 만 것이었다. 내 대답을 듣고서는 당연히 화가 나서 통화를 끊어버릴 줄 알았던 어머니는 그대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그 침묵에서 어머니의 풀이 죽은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또 미안함에 어머니를 달래야만 했다. 어머니 우리 합쳐서 나이가 100갠데 이렇게 유치하게 싸워야겠어요? 남들이 보면 모자가 나란히 나잇값 못한다고 욕해요. 우리 아들처럼 어른스러운 사람이 어딨다고, 나잇값 못하는 건 엄마지. 어머니 그런 소리는 그만하시고, 올 겨울에 서울 한 번 놀러 오실래요? 종로에 피맛골이라는 곳이 있어요. 양반들이 말이나 마차 타고 다니니까 평민들은 그 뒷골목으로 다녔는데, 그 골목을 말을 피한다고 해서 피맛골이라고 한다네요. 굴보쌈 엄청 맛있게 하는 집이 있어요. 밥도 먹고 경복궁 구경도 합시다. 어머니는 피맛골이라니 이름이 정말 낭만적이라며 반가워하더니, 밝아진 표정이 전화 너머로 느껴질 듯이 말했다. 서울은 겨울에 춥지? 따뜻하게 입어야겠다. 그치? 그렇게 나는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귀여운 면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겠다는 약속도 한 달 넘게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는 약속할 수 있다. 당신을 궁금해하겠다. 당신을 미워하고 오해하고 지겨워하고 때로는 당신을 서운하게 하고 실망시키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궁금해하기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당신의 하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 지나온 시간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기를 멈추지 않겠다. 명절날 친척들과 고스톱을 치면 항상 잃는 쪽이었던 당신은 호구 왔다며 놀리는 이모들에게 말했다. 고스톱 재밌으려고 치는 거지 돈 따려고 치냐고. 당신을 아주 많이 닮은 나도 필패의 베팅을 계속할 것이다. 당신에게 나는 자주 잃고 가끔 따는 사람이지만 이 판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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