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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Mar 04. 2024

연서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를 물으려니 어색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일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습관처럼 매일을 공유했으니 그랬고, 이제는 그 모든 게 지난 일이 되어서 또 그렇습니다. 어쩌면 허망한 일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했던 사이가 한순간에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가 된다는 게. 

 오늘은 비가 왔습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은 것이 얼마만 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는 동안 내가 요즘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매일 아침 일기 예보를 확인했습니다. 그날의 날씨가 중요한 당신에게 아침 인사를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내 인사가 없이도 아침에 잘 일어나나요? 올 겨울은 막바지까지 추위가 유난한데 옷은 따뜻하게 챙겨 입고 다니는 건가요?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춥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떠는 그 귀여운 허세는 여전한지. 늘 챙겨 다니는 손우산은 여전히 함께인지. 당신도 비가 오면 내 생각이 나는지. 내 생각이 난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가요?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잘 버티고 있습니다. 


 당신과 헤어지고 나는 한동안 앓았습니다. 연락하고 싶고 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습니다. 종종 당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마음이 남아있는데 이별하는 건 처음이라서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엔 그 말이 힘이 됐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고, 나는 당신에게 과거의 연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참고 있을 테니 나도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짐은 의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해하려 들면 한사코 반문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당신도 나처럼 힘들까? 마음이 남아있는데 이별한다는 건 그냥 좋은 이별을 위한 핑계 아니었을까? 뭐가 어찌 되었든 더 사랑하면 헤어질 일이 없는 것 아닌가? 복잡한 상황을 단순히 사랑의 많고 적음으로 줄여놓고 보면 편해졌습니다. 편하게 원망만 할 수 있었습니다. 덜 사랑해서 헤어졌고, 다른 이유는 다 핑계야. 납작하게 누른 이유들은 끝면이 날카로운 끌개가 되어 마음을 긁어대고는 했습니다. 


 원망의 시간을 당신의 조각들을 발견하며 통과했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당신의 향수 냄새가 나면 멈춰 서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만날 때마다 꼭 내가 사준 향수를 뿌리고 왔습니다. 멀리서 나를 발견하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폭삭 안길 때 퍼지던 당신의 향이 나는 좋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혼자 떠올리려고 애쓸 때 친구는 내게 너는 참 특이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도 나는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우였는지 과학자였는지 어떤 유명인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던 순간입니다. 당신은 이럴 때 중간에 포기하면 뉴런이 죽는다며 끝까지 떠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게 혹시라도 검색해 볼 거면 답을 말해주지 말라고 말하며 머리를 쥐어짜는 당신을 보며 나는 세상에는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팔이 저려서 홀로 새벽에 깨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나는 곧 외로움에 시큰해졌습니다. 뒤척거리는 내 기척에 덩달아 잠에서 깨어 졸린 눈으로 내 팔을 주물러 주던 당신이 있던 자리는 이제는 빈자리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출근할 때면 언젠가 한 번은 이른 시간에 출근하며 이 시간에 이렇게 어두울 줄 몰랐다며, 얼른 해가 빨라져서 조금이라도 밝을 때 출근하면 좋겠다고 말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생각났습니다. 


 당신만큼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술 없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내내 웃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통화를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휴대폰이 뜨거워져서 화면을 보면 한두 시간씩 훌쩍 지나가있는 걸 발견하고는 했습니다. 우리는 통화 시간의 길이를 ktx의 운행 시간에 빗대어 불렀습니다. 1시간이면 대전, 2시간이면 대구, 그보다 길어지면 어림잡아 경주나 부산쯤 왔다고 했는데, ktx에 비유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대전까지는 갔었고 수없이 대구를 왕복했습니다. 그 여정이 행복했습니다. 단어들은 우리 사이에서 사전과 다른 뜻을 가졌고, 추억은 그렇게 정의된 우리의 언어로 적혔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게 태어나 다르게 자랐지만 참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과학에 비유해 보자면 나는 우리가 수렴진화한 다른 종 같았습니다. 누가 의도해서 맞춘 것도 아닌데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이 겹쳤고 이미 지나간 인생의 행로에서도 비슷한 선택들을 해왔습니다. 나는 당신의 기척만 들어도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침묵이나 숨을 고르는 소리에도 당신의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 마을 사람들이 근해의 물결만 보아도 먼바다에 이는 파도를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바다를 보는 일이 좋았습니다. 


 나와 다른 당신의 모습들도 좋았습니다. 내 계정을 공유해서 같은 e북을 동시에 볼 때, 우리는 서로 다른 색깔의 밑줄을 그었습니다. 내 것은 노란색, 당신의 것은 빨간색, 둘이 겹치면 초록색. 나는 초록색 밑줄보다 빨간색 밑줄을 더 골똘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당신이 어째서 그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는지 상상하고 내가 모르고 지나친 것들의 의미를 되짚어내는 동안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더 구체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당신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뺨에 땀이 나서 휴대폰 음소거를 누른 건 아닐까 화면을 한 번 보고 나서 무슨 일이 있냐고 당신에게 물으면 당신은 생각을 정리해보고 있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서둘러 대답하려 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당신의 진중한 모습이 좋았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당신이 나처럼 말을 잘하지 못해서 말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외려 당신처럼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열꽃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열꽃, 열꽃 하고 소리 내 읽다 보면 열이 올라서 울던 아기가 지쳐 잠들고 나서야 빨갛게 오른 두드러기를 쓰다듬으며 우리 애기 열꽃이 났네 혼잣말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처음 열꽃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강인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름답게 보아주지만 그렇다고 버젓이 있는 아픔을 모른 척 미화하지는 않는, 현실을 직시하되 거기에 사랑을 얹을 줄 아는 내면의 힘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과 만날 때 나는 여러 실패들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한때 나는 뭐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실패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굳게 믿었기 때문인지 나는 내가 실패했을 때도 내 탓을 했습니다. 내가 더 잘 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자책에 한동안 잠겨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를 받으며 나는 그 일들에는 내 탓도 있었고 좋지 않은 운의 탓도 있었으며 엮여있는 사람들의 탓도 있다는 것을 차근차근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고민 앞에서 멈춰 버틸 줄 아는 내면의 코어힘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버티기 힘들어서 내 탓이든 남 탓이든 어디로든 비난의 화살을 돌려버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상황을 곱씹을 줄 아는 당신의 강한 내면이 나는 좋았습니다. 지나친 내 탓도 남 탓만큼이나 나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당신에게서 배웠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고 계실까요? 당신을 만날 즈음에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사랑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있더라도 그런 걸 찾으려고 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의심이 드는 순간 몰입에서 깨어나는 역할극 같았고, 사랑을 계속하게 하는 것은 결심이고 의지 같았습니다. 한때 서로가 전부인 줄 알았던 관계가 소원해지고, 모든 걸 아름답게만 봐주던 연인이 싸늘하게 돌아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감정은 쉽게 낡아졌고 관계는 그보다 쉽게 삐그덕거렸습니다. 기대를 낮추면 괜찮아진다는데 그렇게 까지 건조하게 사랑이란 걸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나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이 사람과는 함께 낡아져 보고 싶다고 꿈꾸게 됐습니다. 내가 사랑에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무지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내게 사랑이 많다면 당신이 그것은 모두 당신이 알려준 것입니다. 


 만일 지금 내가 당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나는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시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알더라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아마도 또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웃고 울다가 헤어짐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앞으로의 날들을 당신과 함께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보냈던 날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들의 가장 큰 증거는 나입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하지 않았을 때의 나보다 당신과 함께했던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남긴 것은 이렇게도 많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말로 묶는다면 하나에 담을 수 있을 단어라는 건 당신의 이름이거나 사랑일 뿐인데, 둘은 저에게 같은 말입니다. 사랑했다는 말은 어쩐지 사랑한다는 말의 반대말 같습니다. 아직 사랑 안에 있습니다. 무너지려 할 때 당신이 준 것들이 나를 지탱합니다. 삶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당신을 떠올리면 웃음 지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던 품을 추스르고 나면 나는 내 안에 남아있는 당신의 흔적들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도 여생은 당신의 숙취일 것 같습니다. 잘 지내길 바랍니다. 그래야 나도 잘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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