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아버지의 기일에는 추모 공원을 찾는다. 납골함 앞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을 마주 보고 서서 속으로 혼잣말을 하다가 오는 것이 내 나름의 제사인 셈이다. 할 말을 미리 정해두진 않는다. 그 앞에 서 있으면 숨구멍 저 안쪽에서부터 소리가 공명되듯 저절로 흘러나오는 말들이 있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버지 생전에는 따지기조차 싫어서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내놓던 중에 내 안에서 뭉쳐있던 것이 흐트러졌다. 3년이었다. 풍장한 시체가 3년이면 뼈만 남는다던데, 내 원망도 3년쯤 지나서 흩어졌다. 요즘은 아버지에게 실없는 농담들을 건넨다. 만일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지. 나는 그때보다 모서리가 많이 깎여서 당신과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당신이 없다고. 먼저 가셨으니 당신의 잘못이라고. 예전엔 못 했을 이야기들을 하고 온다.
올해는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어떤 말을 남기고 싶었습니까? 아버지는 새벽에 병상에서 홀로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진지 며칠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 많아졌다. 평생을 과묵했던 사람이 그동안 참았던 말을 벼락치기로 쏟아내듯이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두려웠던 것 같다. 두려웠던 것은 확실한데, 무엇을? 죽는다는 것을? 잊혀진다는 것을? 해야 할 말을 못 다하고 가는 것을? 거기까지 가면 의문만 남는다.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두운 병실 천장에 눈으로 새겼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는 일이 고통이었으니 이제 좀 편안해지자고 생각했는지. 외로웠는지. 가족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지. 그도 아니면 당신 자신에게조차 잘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는지. 짐작만 해볼 뿐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했던 동경과 미움과 연민 무엇으로도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볼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
이제는 본가에도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적에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아버지가 떠오를 것 같으면 죄다 소각했다. 내게는 그때 태우지 않은 것들이 몇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선물로 준 옥편과 휴대용 게임기, 내가 훈련소에 있을 때 아버지가 보낸 편지.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들을 골라서 남겨둔 것이 아니라 이게 그와 나 사이의 전부였다. 우리 사이의 추억은 그만큼 빈곤했다. 처음에는 그것들을 다른 유품들과 같이 태워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뾰족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서둘러서 흔적을 지우려는 어른들이 너무 매정했다. 친척들이 찾아와 긴 간병에 지친 우리 가족들을 위로한다며 이 정도면 편히 잘 가신 거라고 이제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게 듣기 싫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모질지 않다고 항변이라도 하듯 물건들을 한 구석에 넣어두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와 애정이 각별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제일 데면데면한 것이 나였는데 내가 가장 유난을 떨었다. 못마땅한 게 많은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본 편지는 낙엽처럼 바스락거렸다. 종이 겉면에서 세월이 만져졌다. 아버지의 예스러운 궁서체가 낡은 질감과 잘 어울렸다. 별 내용은 없었다. 다만 글씨를 얼마나 꾹꾹 눌러 적었는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종이 위에 펜자국이 남아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줘서 썼을 아버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글씨는 아버지에게 자랑이었다. 아버지는 군 복무할 때도 높은 사람들이 주는 상장을 자신의 손글씨로 썼다고 자랑하곤 했다. 평소에는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 글씨 자랑은 신이 나서 했다. 지금이라면 그런 아버지를 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또 참지 못하고 자랑하는 것은 한자였다. 아버지는 모르는 한자가 없었다. 이름에만 쓰는 요상한 한자도 곧잘 읽었다. 아버지는 미취학아동이던 나를 붙들고 신문에 적힌 한자를 하나씩 읽어주곤 했다.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는데 꽤 자주 그랬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사자소학을 읽게 했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남들은 영어사전을 선물 받는데 나만 아버지에게 옥편을 선물 받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편지를 이렇게 쓰지. 나는 편지를 다시 보다가 또 웃음이 났다. 아버지의 편지는 8, 90년대 신문처럼 한자로 적을 수 있는 것은 전부 한자로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잘하는 것들을 내게 가르쳐주는 순간을 좋아했다. 내가 수월하게 잘 배울 때보다 틀리고 헤맬 때 더욱 기뻐하며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럴 때 아버지와 친해진 것 같아서 아는 것도 일부러 틀리곤 했다. 아버지는 동생에겐 무얼 가르쳐주지 않았다. 유독 나에게만 그랬다. 처음엔 나를 더 아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쪽은 동생이었고 나는 경계의 대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불편해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껄끄러워한다는 게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슨 마음인지 알 것도 같다. 어떨 때는 아버지가 나를 아들이 아니라 경쟁자로 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게 똑똑해 보이고 싶어 했다. 가정환경 실태조사서를 작성할 때 아버지는 최종학력을 대졸로, 직업을 세무사로 적었다. 아버지는 대학을 합격하기는 했지만 집안 사정상 진학하지 못했고 그대로 취업했다. 세무서에서 회계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지만 세무사는 아니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아빠는 고졸 아니셨냐고 물었고, 어머니가 아버지는 대학에 합격했으니 대졸이나 다름없다고 아버지 대신 대답했다. 아들의 눈에서 부끄러움을 발견한 아버지는 비참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 화가 가시고 나서 혼자 있을 때의 아버지가 어땠을지 생각해 보면 안쓰럽다. 나는 그때 아버지에게서 내게로 부끄러움이 옮아오는 것만 생각하느라 내게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수치심이 옮아갔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세어보면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딱 지금의 내 나이 쯤이다. 지금 내가 얼마나 미숙한지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버지의 행동들이 이해가 간다. 아버지는 내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다만 그 욕심이 커서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고, 아이답지 않게 눈치를 잘 살피던 내게 허울을 들킬까 봐 껄끄러웠다. 아버지의 인생에는 몇 번의 큰 시련이 있었다. 아버지는 인생이 꼬이던 지점마다 점점 나를 더 어려워했다. 마치 내가 당신의 인생을 평가하는 채점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랬다. 한쪽 다리가 으스러지는 큰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내가 병실에 오는 걸 유독 싫어했다. 너는 가서 공부하지 왜 여길 오냐고 나무랐다. 30분 거리를 시내버스를 혼자 타고 가서 당연히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던 나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옆 병상의 아저씨들에게 넌지시 내가 영특해서 벌써 혼자 버스도 타고 다니고 신문도 본다고 자랑하고는 했다. 반년에 걸친 긴 입원 생활이 끝나고 재활차 둑방길을 걸을 때도 아버지는 꼭 나랑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마도 당신의 재활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재기를 노리던 아버지는 친구에게 큰 사기를 당하고 우울에 잠겨 집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아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말을 거는 순간은 내가 밥상머리 예절을 지키지 않았을 때뿐이었다. 그 지적이 그에게는 가장의 권위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그런 말에 실망을 속으로 삭이지 않고 꼰대같이 그게 무슨 소릴하는 거냐고 농담으로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들어줄 이 없는 농담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울적해진다.
편지를 읽어 가다가 어떤 문구에서 멈췄다. 長男! 後日에 너도 子息이 생기면 理解할 날이 올 거다. 동생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꼭 내게는 장남이라고 불렀던 당신의 육성이 떠오르기도 했고, 후일 자식이 생기면 이해할 날이 올 거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훈련소에서 편지를 처음 봤을 때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니가 아직은 어려서 이해할 수 없지만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것 같았다. 요즘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다. 친구의 부모님과 친구, 그리고 친구의 아이까지 3대가 함께하는 모습을 종종 보면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잠깐 편지를 내려놓고 문구 그대로를 상상했다. 만일 내게 자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남들만큼 살아서 할아버지가 되었다면 내 자식을 아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그 사이에 껴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한풀이를 할 수 있었을까? 아이가 있었다면 분명 아버지는 나를 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장난기 많고 다정한 할아버지가 되어주었을 것 같다. 생전에도 그랬다. 아버지는 자기 자식들에게는 엄했지만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는 친절했다. 사촌들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백부, 이모부였고, 길을 지나가다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도 곧잘 장난을 건네곤 했다. 나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작 자기 아이들에게는 데면데면하면서 남의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게, 어떤 게 진짜 아버지의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나이만큼 살아온 나는 이제 내 안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정말 좋아하면 외면한다. 별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는 말을 잘 걸고 장난도 잘 칠 수 있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그럴 수 없다. 잘 보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까봐 걱정이 되어 아예 눈길을 돌리기를 선택한다. 나는 이제 외면은 응시의 서툰 모습임을 안다. 똑바로 보고 싶지만 쑥스러워서, 눈을 마주치고 싶지만 어색해서, 잘 보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눈을 돌린다. 아버지가 평생 내게 그랬듯, 나도 말년의 아버지에게 그랬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던 유년기에 좌절을 겪고, 자라나는 동안에는 실패에 주저앉은 무책임한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했다. 성년이 되었을 때는 내가 아버지를 외면했다. 서로를 외면하던 우리는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애써 외면하던 대상이 떠나면 그제야 눈길이 떠난 이의 뒷모습을 좇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저는 아직 자식이 없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조금은 더 당신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너무 많이 미워해버려서 이제는 이해할 몫 밖에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람으로서 당신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제가 당신과 나이가 같아지고 그때는 정말 친구처럼 농담을 건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 새벽에 떠나신 당신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만일 가족 누구라도 옆에 있었다면 당신은 사과를 했을 겁니다. 든든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 책임감 있는 가장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그럴 수 없어서 후회스러웠을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사과를 남겼다면 당신이 떠나는 길이 조금은 수월했을까요?
당신을 뵙고 영락공원을 나설 때 저는 완만하게 펼쳐진 계단 앞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제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면 차례로 계단과 갈림길이 보이고, 사람들과 근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풍경들을 하나씩 짚으면서 멀어지다보면 지평선까지는 한참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하늘이 시작되는데 하늘에 오르려면 저 지평선 너머까지 고단히 가야겠다, 참 먼 길이겠구나 생각하곤 합니다. 소천하시는 고된 길을 걸으며 살아 생전의 희노애락을 전부 잊을 수 있으셨을까요? 그랬길 바랍니다.
하늘에서부터는 황망합니다. 그길로 쭉 고개를 들어보면 머리 위 정방향으로 쨍한 햇빛이 내리쬡니다. 눈을 감고 보아도 눈꺼풀을 벌겋게 침투하는 가을 햇빛에 그대로 잠시 멈춰 있으면 저에게도 벌을 주는 것 같아서 쾌감이 듭니다. 다시 차례로 고개를 내립니다. 구름, 하늘, 지평선, 멀리서부터 제 발 끝까지. 저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 당신에게 닿았다가 다시 저에게로 되돌아 오면 조금은 더 당신과 친해진 것 같습니다. 당신과는 하지 못한 화해를 당신의 이야기들과는 할 수 있나봅니다. 편지 말미에 적혀있던 제가 자랑스럽다는 말도 이제는 꼬인 마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아들 잘 뒀죠. 하고 속으로 건넨 농담을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당신과 저의 대화로 쓰인 이인극은 이제 제가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건네는 곳까지 쓰였습니다. 뒷 이야기는 사는 동안 이어 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