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쓰다

사연을 감추고 감정만 쓰고 싶어요

by 무쌍

길가에 꽃들이 보고 싶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로 한꺼번에 떠나갈까 봐 산책을 서둘렀다. 국화꽃엔 벌들이 진을 치고 있고, 구절초는 벌써 떠날 듯 시들했다. 찬바람에 꽃을 찍는 손도 차가워 호주머니 속으로 숨었다. 장미공원에 남은 장미꽃을 보니 한결 따뜻해졌다. 차가운 바람 때문일까? 사연이 많아진 걸까? 수다가 그리웠다.


글을 쓰면 무엇보다 자신과 할 말이 많아진다. 수다 같이 글이 쓰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났다. 말로 떠는 수다는 어디론가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글로 떠는 수다는 나를 차분하게 돌아보게 했다. 글은 여러 번 고치고 다듬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연은 감추고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나를 아는 건 나뿐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렇더라도 세상 억울한 사람처럼 큰 목소리로 증을 내고 싶지기도 했다.

맥주잔이나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마음을 터놓고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말을 내뱉는 순간 냄새처럼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분명 감정이 복잡해서 하소연을 하고 싶었는데, 감정은 그대로 있고, 사연만 쏟아내고 만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내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을 받고 싶었는데 말이다. 결국 사연을 나누고 분노만 쏟아내게 된 것이다.


분노의 말은 향기가 나기보다는 썩은 냄새를 풍겼다. 분노를 모아서 폭탄을 만들면 산이 무너져 내릴 듯 시끄러웠다. 로 퍼부은 분노를 연료로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상처를 또 받을 뿐이었다. 내가 표현하려던 건 분노가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래 힘들었겠다.'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라며 담담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면 나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자신과 마주할 용기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온전히 나를 만나는 길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글에도 악취가 날 때가 있었다. 감정을 쓰려고 시작했는데, 사연이 길어지면 기장 보다 못했다. 글을 쓴다는 건 채우기가 아니라 비우기 였다. 사연은 감추고 감정만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