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밭에 태풍이 지나갔다. 어른들은 비바람이 뒤틀어 논 귤나무에 농약칠 준비를 했다. 뽀얀 빛깔의 농약은 약통이 넘칠 듯 출렁거렸다. 아무도 없는 마당엔 기계실 모터 소리만 시끄럽게 들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배가 고팠다.
농약이 얼마나 줄었는지 궁금했다. 까치발로 약통 안을 들여다보니, 호랑나비 한 마리가 떠 있었다. 그때 '탁탁' 소리가 나더니 딱정벌레 한 마리가 약통에 빠졌다. 무화과나무에서 떨어진 듯 보였다. 금방 탈출할 듯 보였지만, 한동안 바둥거리다가 빙글빙글 농약물의 깊은 곳으로 쓸려갔다.
딱정벌레가 멈추자 등껍질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색인 줄 알았던 등껍질은 해가 비추는 대로 보라색, 녹색, 파란색, 주황색으로 계속 바뀌었다. 약이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와 함께 돌아갔다. 죽음 뒤에 드리워진 뒷모습은 무지개가 뜬 것처럼 눈부셨지만 슬폈다.
농약은 뽀얀 바나나 우유처럼 보기엔 마시고 싶을 만큼 달콤해 보였지만, 가장 무섭고 악랄했다. 작고 힘없는 것들의 숨통을 쥐고 서서히 죽게 했다. 큰 딱정벌레 말고도 호랑나비와 나방들이 셀 수 없이 떠 있었다.
내가 죽게 한 듯 미안해졌다. 오늘 귤밭엔 귤나무가 아닌 모든 존재들이 죽는 날이었다. 약통에 빠져 죽던 살포된 농약에 맞아 죽던 어쩔 수 없는 죽음이었다. 깍지벌레나 귤 나방, 응애 같은 해충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농약물이 줄어들수록 죄 없이 죽어가는 딱정벌레도 많아질 것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죄를 진 듯 죄책감이 들었고 등이 오싹해졌다. 어느새 약통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아랫마을에 사는 젊은 여자가 농약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약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이 눈과 코로 입으로 들어간 듯 느껴졌다. 내가 딱정벌레처럼 약을 먹은 걸까? 혹시 누군가 달려와 나를 구해줄까? 딱정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귤나무 잎 하나가 떨어진 걸 착각했던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본 딱정벌레는 귤나무 잎색으로 변해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나쁜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아이였다면 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귤밭을 나가보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방향으로 듬성듬성 오름들이 빛을 내며, 저 멀리 희미하게 바다가 보였다. 도망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그땐 멀리 떠나는 것보다는 귤밭 한가운데 돌계단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 안전했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다독여줄 꽃 향기를 맡으러 갔다.
차가운 돌계단을 꽁꽁 감싼 인동초 덩굴은 내 모든 잘못도 숨겨줄 것 같았다. 꽃이 만발해진 인동초가 풍기는 향기는 귤밭에 진동하는 농약 냄새와 섞여서 어지러웠다. 눈을 감고 꿈속 어디론가 도망갔다. 하지만 내가 탄 비행기는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어른들 소리에 잠이 잠깐 깼지만,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잠이 들면 다시 비행기 안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날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귤밭이 아닌 다른 곳에 내 삶이 있을 것 같았다. 자유롭고 싶은 심정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처럼 느껴졌다. 작고 말없는 아이는 먹먹한 마음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밤이 오길 기다렸다. 불편한 마음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뿐이었다. 어린아이는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란 것도 몰랐고, 자신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거란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어른이 된 아이는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은 여전히 귤밭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