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서 지워졌다가 불쑥 떠오른 작은 편린이었다. 하얗게 핀 개망초가 눈에 들어와 향내가 코안에 닿는 순간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끊어진 조각들을 이어 가니 모두 같은 장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귤밭의 나무들은 어제와 똑같은데, 어른들은 무슨 일이 난 듯 서둘러 밭으로 갔다. 내가 혼자가 되길 기다린 듯 마당으로 점박이 도마뱀이 찾아왔다.
어른들이 귤밭으로 가버리면. 나도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하고 싶은 대로 뛰어다녔다. 도마뱀들이 가끔 내 발 위에 올라오기도 했는데, 어른들이 나타나면 감쪽같이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도마뱀이 왔다 갔다 오가는 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도마뱀이 많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정한 친구들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마뱀의 존재를 숨기려고 해서 일까? 그때부터 난 속마음을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고, 일부러 숨기기 시작했다.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았고, 키가 큰 어른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래도 도마뱀들은 내게 들을 말이 있는지 종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점박이가 모두 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엄마인지 아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얼마 뒤부터 아기 도마뱀 두 마리가 함께 왔다. 아기 도마뱀이 뒤따라 오지 않으면 금방 큰 도마뱀이 나타나 데리고 다녔다. 괜히 사이좋은 가족을 보며 심술이 났다. 그러다 무슨 일인지 작은 도마뱀 꼬리가 툭하고 떨어졌다. 어른들이 오기 전에 꼬리를 치워야 했는데, 어쩌지 못해 모른 척했다. 다행히 뜨거운 태양이 꼬리를 금방 나뭇가지처럼 만들어 버렸고, 도마뱀들도 더는 오지 않았다.
귤밭 안에 흰 개망초가 꽃봉오리를 만들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밀감 꽃은 노랗게 시들어가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동그랗게 초록의 구슬들이 달린다. 머지않아 귤이 될 열매들이다.
떨어진 귤을 몇 개 들고는 공처럼 담장 밖으로 던졌다. 오가는 행인이 없는 길엔 돌을 던져도 혼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귤밭엔 나와 바람만 사는 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나를 찾는 유일한 목소리가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할머니는 저녁잠이 많으셔서 밥을 먹으면 바로 이부자리를 펴놓고 날 기다리셨다. 할머니의 무거운 솜이불은 한번 들어가면 발가락만 꼼지락 거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일어나려면 좁은 터널을 기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나를 꽉 붙들 듯 답답한 이불은 이상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이불을 덮고 누우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어릴 때 왜놈들이 귀찮게 괴롭힌 일이나 귀신 이야기였다.
항상 마지막엔 진드르에 발 없는 참외 귀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하도 들어서 무서운 걸 모를 지경이었다. 매일 똑같은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나를 잠들게 했다.
어떤 빛도 없는 깜깜한 어둠이 뭔지 어린 내겐 선명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눈부신 아침 해는 가장 먼저 할머니 집을 찾아왔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혼자 언덕을 내려갔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시간이 흘러 할머니 집에 다시 갔을 때, 누운 할머니가 덮은 이불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오래전 언덕 위 집에 두고 온 이불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꼭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 난 네가 바다 건너 외국으로 시집을 가면 좋겠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 할머니도 비행기 한번 타서 널 보러 가고 싶구나."
할머니는 아들의 첫제사를 하루 앞두고 떠나가셨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물어볼 사람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소는 할머니 집이었다. 날 부르는 할머니 목소리를 못 들은 척했던 아이는 이제 생생하게 떠올린다. 할머니는 매번 웃는 얼굴로 나를 데리러 오셨던 걸 말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린 내가 떨치지 못한 감정은 그 장소와 함께 감춰졌다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알아낼 수 없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