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묻힌 정원에서 만난 타샤 튜더와의 대화

맘먹은 대로 살아요

by 무쌍

일 년에 한두 번뿐인데 집에선 견디기 힘들었다.

그나마 기대할 건 정원의 꽃과 나무들에게 받은 위로가 유일했다. 손질 안된 분재 화분들은 아빠의 손길을 기억하는지 비슷한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아빠가 포기 나누기를 놓은 한라 새우난초는 주인떠난 줄도 모르고 토실토실한 꽃이 대마다 달려 있었다.


자였던 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선물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갔지만, 외손주 공들여 봐야 소용없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린 나이었지만 아이들은 알아들었는지 그 집 보다 용두암 바닷가로 놀러 가길 더 좋아했다.

'생선과 손님은 3일이면 냄새를 풍긴다'라고 벤자민 플랭클린이 말했다지만, 생선도 손님도 아닌 것 같은 내 처지는 하루 만에 지쳐 버렸다.

낮잠 든 아이들을 방에 두고 정원에서 꽃을 고 있었다.

" 꽃만 보면 밥이 나오냐? 지겹지도 않냐?" 꽃을 찍는 내게 와서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난 주인 있는 정원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도둑질하듯 사진을 찍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필 것 같은 흰 치자꽃 봉오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제주를 떠나오던 날 탐스러운 치자 향기는 화분 째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자목련이 가득 핀 봄날은 떨어진 꽃잎을 쓸며, 영국에 사는 정원사가 된 듯 행복했다. 큰 꽃잎이 신기했는지 돌 지난 아이도 엄마 따라 졸졸 쫓아다니며 탄성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봄엔 잎도 꽃도 없이 그루터기만 흉하게 남았다.


진한 보랏빛을 내는 초롱꽃이 고와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아무 데나 솟아난다고 뽑아버렸다고 했다. 분홍동백나무가 그루터기가 되고, 다음 해엔 붉은 동백나무도 그루터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왜 내가 예뻐하고 좋아하는 꽃들만 없어지는 걸까?' 궁금해졌다. 주인은 따로 있으니 내가 나설 일도 아니었지만, 취향이 바뀌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줄만 알았지, 길들여진 채 살아왔다는 걸 알지 못했던 나처럼 전혀 의심할 줄 몰랐다. 가 눈길을 주던 나무와 꽃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유가 나 때문이란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미국 버몬트 숲 속에 살던 타샤 튜더는 칼데콧상을 수상한 동화작가로 화가이자 원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접 가꾸던 정원은 가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서던 곳이었다. 주인이 떠나버린 정원은 이제 시간에 묻힌 채 책으로 남았다. 림책의 글밥처럼 짧지만 여운이 남는 타샤 튜더의 글과 그녀와 같이 버몬트에 사는 사진작가 리처드 브라운이 찍은 사진이 한데 어울려진 에세이가 여러 권 출간되었다.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그녀의 글을 홍차를 마시듯 티백을 여러 번 담금질하며 음미곤 했다. 처음엔 흔히 듣는 명언처럼 내 것 같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은 자꾸만 내 것처럼 만들어졌다.


소심한 성격의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할머니가 되었네요.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세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답니다.
인생은 결코 긴 게 아니에요. 우물쭈물 멍하게 있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끝나버리지요.
- 타샤 튜더의 <맘먹은 대로 살아요>

샤 튜더를 알게 된 지 2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고 싶었다.


" 할머니를 처음 뵐 땐 20대였던 는 우물쭈물하다가 중년이 되어버렸어요. 정말 할머니 말씀이 딱 맞네요. 즘 저는 아이 둘과 보내는 일상이 알쏭달쏭 정말 다이내믹해요. 아이들다처럼 마음을 푹 담그고, 머리로는 잘 각하면서, 몸은 적당히 아껴야 해요. 엄마가 된다는 건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늘 느끼고 있답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서 진짜 내 모습을 알게 되었어요.

두 아이 덕분에 저의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거든요.

사실 저는 세상 물정만 모르는구나 싶었는데, 나 자신도 잘 모른 채 살았더라고요.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 좋아하는 조용한 본래 성격을 남들에겐 감추고 살어요. 할머니가 혼자 즐기던 시간을 저도 알 것 같아요."




그녀가 맘먹은 대로 살았다면,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녀가 사는 방식을 따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정원을 좋아했지만 동경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녀가 생활한 삶의 방식은 흉내내기도 어렵다.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 그녀는 정원을 살피는 눈도 움직이는 눈도 촘촘했다. 다음 정원을 위해서 시든 꽃들을 미련 없이 잘라냈다. 한 손엔 잡초들이 한 움큼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엔 꽃병에 꽂을 꽃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엔 백발의 머릿수건을 한 그녀가 꽃다발을 들고 있다. 다홍, 연분홍, 진분홍, 연보라 꽃잎이 진한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선명한 스위트피 꽃을 든 손은 꽃잎과는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다. 손등은 겹겹이 주름지고 누렇고 짧은 손톱 사이엔 흙이 잔뜩 묻었고, 손바닥은 풀에 나온 진액이 묻은 채 흙이 뒤범벅이다. 그런데도 손은 탐스러운 꽃잎처럼 곱기만 했다. 문득 제주 할머니 손이 생각났다.


흙에서 일하는 손은 이유 없이 좋다. 할머니와 아빠의 손은 늘 그렇게 초록색과 흙이 섞여 있었는데, 그녀의 손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혼자 놀던 나를 데리러 오는 할머니와 아빠의 손은 늘 그런 손이었지만, 그 손을 꼭 붙잡으며 나를 향한 애정을 느꼈다.

제주어엔 '이루후제'라는 말이 있다. 다음에, 훗날에라는 뜻인데, 보통은 기약할 수 없는 일을 미루는 의미로 쓰인다.


할머니가 내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루후제랑 비행기 탕 가보 게이(나중에 비행기 타서 가보자.)' 할머니는 늘 내게 제주를 떠나 여행을 가자고 하셨다. 말뿐인 '이루후제'가 문뜩 떠랐다. 그 말을 들을 때만큼은 내 기분을 맞춰주시려는 할머니 마음에 흠뻑 젖어 눈이 촉촉해졌다.


타샤 책들을 손이 잘 닿는 곳에 두며 본다.

소로의 야생화 일기는 일상이 무기력해질 때 꺼내보지만, 타샤의 책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꺼내보게 된다. 어느 쪽을 더 펼쳐보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할머니 책을 펼친 걸 보니 요즘 내가 고단 해진 건 맞는 듯했다. 이른 봄부터 꽃을 보러 다닐 생각에 미련하게 서둘렀나 보다.


아무래도 야생화들이 피기 전에 해치운다고, 나를 너무 몰아세웠던 것 같다. 녀가 건넨 조언을 좀 더 꼼꼼하게 마음속에 적어 두고 싶었다.


나는 두 가지 삶을 살고 싶어요.
하나는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보통 할머니로서의 나.
다른 하나는 모두가 대단하게 여기는 화가로서의 타샤 튜더.
이 두 가지 삶을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 난 내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어요.
하지만 여러분에게 꼭 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특별히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 타샤 튜더의 <맘먹은 대로 살아요>


나도 두 가지 삶을 살고 싶다.

하나는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보통 엄마로서의 나, 다른 하나는 내가 만족하는 나 자신으로 나. 이 두 가지 삶을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다.

아직 두 번째 나는 무엇이 될지 어떤 것도 결정하진 않았다. 모든 것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잘 알고 있. 그래서 어서 결정하라고 나를 다그치치 않고 싶다.

그녀처럼 나도 하루하루가 즐겁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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