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되어 반짝이는 그녀, 전혜린과의 대화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by 무쌍

구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함께 슬펐다.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었다며 서럽게 울었지만, 친구는 사실 한 번도 엄마가 미운적도 친엄마가 아니라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친엄마를 궁금해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 엄마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친구가 부러웠다. 스무 살을 앞둔 우리는 같이 울었지만 서로 다른 이유로 슬펐다.

친구들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내가 위로받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친구에게 기도 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우리가 크면 괜찮아질 거야."



그 시절을 그럭저럭 보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체념하는 버릇은 고치기 어려웠다.


몸에 깁스를 했다면 뼈가 부러졌구나, 아프구나를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병이란 원래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특히 마음의 병은 더욱더 그렇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멍은 자신만 느끼는 통증이다. 게다가 감추려면 가면을 쓰고 모르게도 할 수 있다. 마음에 쓴 가면은 보통 사람들에겐 들키지 않지만, 같은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거울을 보듯 비슷한 아픔을 알아볼 수 있는 듯하다. 비슷한 통증과 공포를 갖고 있으니 서로 알아보는 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양쪽이 모두 처지를 털어놓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마음의 가면을 벗고 상처를 꺼내는 건, 결국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입이 무거워지고 숨고 싶어질 때 그녀가 생각난다.



전혜린 하면 따라붙는 여러 수식어가 있다.
요절한, 천재, 이혼녀, 부유한 집안, 장녀, 번역가, 수필가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스무 살을 막 넘긴 나는 그녀의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 에세이집으로 엮은 일기 글 속에 그녀가 속상한 일이 많은 언니처럼 여겨졌다. 솔직하고 숨김없는 말투에 아주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은 언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로운 구석이 있고, 말 못 할 병을 가진 듯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반짝거리며 총명하고 명랑한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지만 느닷없이 떠나버려서일까? 서른한 살, 세상을 떠난 그녀의 삶에 대해 더 호기심이 들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이제 린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그녀가 번역했고 지금도 출판된다.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적지 않는 문학 책들을 번역했으며 7년간 쓴 일기를 남겼다.

작가의 일기장은 독자에게도 호기심을 준다.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 일상 속에서도 쉬지 않는 창작 의지를 엿볼 수 있으니 작품 이상의 가치로 사랑받기도 한다. 때론 작품의 습작 노트가 되기도 하고, 내밀한 자신을 끄집어내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기는 작가 자신을 어떻게 끌어다 작품으로 남기는지 궁금증을 풀어주는 단서들을 찾게 하는 듯하다.



전혜린의 에세이 <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를 또다시 읽었다. 순수하고 명랑한 소녀의 슬픈 일기를 들여다보는 듯해서일까?

나는 울적해하는 그녀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듯 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젠 내가 털어놓을 차례라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마치 비밀을 지켜줄 친구를 만난 듯 나도 말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부모님과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가 속한 곳은 뭔가 어색했어요. 안전하지 않는 보금자리에서 늘 긴장하며 사는 기분이었죠. 그러다 온기가 없는 냉랭함이 익숙해져서, 그냥 체념하는 편이 쉬웠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내가 그 집에 살고 있는 건지 귀신처럼 영혼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은 사람 같았어요.
당신의 글에선 말줄임표 뒤에 연결된 공허함이 보여요. 불만족스러운 아이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느껴져요. 혹시 당신이 느낀 공허함들이 나와 비슷한 것일까요? 당신의 쓴 말줄임표 뒤에 공허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

나는 가시를 하나 품고 있다. 내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때때로 난 그곳이 아픈 것을 느낀다. 그러면 난 아주 아주 홀로 가장 어두운 방 속에 있고 싶어 진다. 거기서 촛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또한 뜨겁게 갈망한다. 사람을! 인간의 사랑과 따스함을.
내가 가장 동경하는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그래야만 하듯이 사랑에 충만하고 오직 사랑뿐인...
나 자신이 텅 빈 느낌이다.
-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8남매의 장녀였고, 대단한 수재였다. 기대가 큰 부모의 욕구를 채우며 살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부모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하나도 받지 못한 듯하다. 대게 부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힌다.

부모의 기대에 충족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사랑받고 싶어 응석을 부릴 부모의 무릎을 간절히 그리워한다. 그녀는 그 사랑이 뭔지 모른 채 어른이 되어 버린다.

처음부터 아이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새해가 될 때마다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며, 자신이 사는 세상이 달라지길 바랐지만, 공허한 마음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서른한 번째 생일을 보낸 그녀는 얼마 뒤 자살을 했고 그녀의 일기장도 끝이 났다.


난 아프다고 느꼈지만 감정적인 예민함이라며, 공상으로 생긴 허무맹랑함이라고 주변에선 내 감정을 부정했다. 그녀의 글을 우울하다며 멀리하는 시선도 다르지 않을 듯했다. 사실 전혜린은 번역가였고,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지를 비롯해서 유명한 작가들이 인정하는 파트너였다. 일을 할 때는 열정이 넘쳤고, 근면했다. 그런데 유독 국내에선 요절한 우울함을 대표하는 작가처럼 불리는 것이 아쉽다. 일기를 보면 꽃 몇 송이에도 명랑해지는 그녀가 왠지 나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나는 밖에 피어난 꽃을 좋아해요. 생긴 대로 핀 야생화는 더욱더 나를 사로잡아요. 자유롭게 놀았던 어린 시절 나를 보듯 꽃이 부러운가 봐요. 꽃이 나 같고 꽃이 내게 생명을 준 존재 같아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기분을 아무렇게나 핀 야생화를 보면서 만족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화원에서 꽃을 사는 당신을 상상했어요. 화병에 꽃을 두는 걸 좋아하던데, 당신에겐 꽃이 어떤 의미인가요?"


꽃이 다섯밖에 없었던 시클라멘의 화분에 지금은 이미 꽃이 아홉 개, 봉오리가 세게나 피어 있다. 꼭 봄이 온 것 같다.
온갖 슬픔과 절망 속에서 꽃은 크나큰 위안이 되어 준다. 자꾸자꾸 시선이 그리로 간다. 그리고 꽃을 보고 있는 순간만은 가슴의 아픔이 좀 가시는 것 같다.
비가 오니까 더 향기와 빛이 짙은 꽃들... 꽃에 가득 에워싸여 살고 싶다. 마당의 꽃보다는 방안의 꽃이 마음에 든다.
이 세상이 어떻더라도, 또 나에게 무슨 불행이 닥치더라도 꽃의 아름다움에만은 나는 영원히 감동될 것이다.
꽃향기만 무섭게 공기에 얽혀 있는 밤, 온갖 겪지 못한 생과 격동과 정열의 회환이 나를 엄습한다. 다르게 살고 싶다. -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그녀의 일기엔 구멍이 난 듯 외로움이 곳곳에 있지만, 가까운 자리에 생화가 피어 있었다. 꽃은 그녀의 어두운 절망감에도 위안을 느끼게 해 준 듯하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꽃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 스파티필름이 심어진 화분을 선물해 주고 싶다. 스파티필름은 실내에서 키우기 좋기도 하지만, 꽃을 오래 두고 볼 수 있다. 오래도록 핀 꽃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에게 편안함을 줄지 모르겠다.
나도 초록 식물들의 위로가 적지 않은 삶의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꽃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가 꽃 수다를 받아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순수하고 명랑한 그녀는 내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아도 내색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갖고 싶은 꽃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어느 날 뚝하고 꽃처럼 시들어버린 그녀의 삶을 나는 오랫동안 애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가 보던 시클라멘 꽃송이가 무슨 색이었는지 모르지만 시클라멘도 꽃을 오래 볼 수 있는 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권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을 그녀였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깊게 사랑하며, 삶을 살았다는 걸 짐작해 본다.

지루하고 비슷한 날이 반복되면, 그녀를 만나러 가듯 책을 꺼내보게 된다. 두 권으로 되어 있던 에세이가 지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나머지도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있기를 바란다.
젊은 날의 그녀를 만나면, '다르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스무 살의 내가 함께 겹쳐진다.

지금은 별이 되어 반짝거리는 그녀가 써놓은 일기 속에 '다르게 살고 싶다'라고 했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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