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결(結)

분노 님, 염(殮)을 시작합니다

by 겨자풀 식탁


- 흩어진 파편을 보면 순간 차분해져요.

- 내가 던진 무언가가 깨지는 순간, 마음에 고요가 찾아와요.

- 뭐든 다 부숴버리고 싶어요.


- 어떤 차분함인가요?


- 산산조각 난 걸 보면 숨이 쉬어져요.


- 숨이 통하는 균열이 생기는군요. 파괴를 통해서만 들어오는 호흡이 있죠.


- 그런데 무섭기도 해요.


- 뭐가 무섭나요?


- 제가요. 파괴하는 제 모습이요. 낯설어요. 그런데 친숙해요.


- 낯설어서 무서운 건가요, 친숙해서 무서운 건가요?


- 친숙해서요. 부수는 걸 넘어 죽이고 싶어요. 가장 잔인하게. 가장 고통스럽게.


- 무엇을요?


- 근원이요. 이 모든 고통의 근원. 그 사람을 키운 모든 것. 그 사람을 강하게 하는 모든 것. 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는 모든 것들을요.


- 벗어나고 싶은 건가요?


- 아뇨. 처음부터 없었어야 해요. 그 모두가.


- 어미곰은 새끼곰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분노하는 법이죠.


- 어미곰이요?


- 네. 누구에게나 어미곰이 있습니다. 이 안에 말이죠. 새끼곰이 위협을 받는 순간, 발톱을 드러내고 포효하기 위해 늘 이 안에 있습니다. 분명, 지금 당신이 지키고 싶은 새끼곰이 있을 겁니다.


- 지키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다 죽어버렸어요.


- 무엇이 죽었나요?


- 내 삶의 가치. 내 젊음. 내 시간. 모든 정성과 진심. 그리고 나를 있게 한 모든 만남들. 내가 만지고 싶었던 앞으로의 기회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요.


- 지켜내지 못했다 느끼시나요?


- 지켜내지 못했어요. 하나도. 그래서 부숴버리고 싶어요.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을. 돌이킬 수 없다면, 다 망가뜨리고 싶어요. 그 무엇도 더 이상 나를 망가뜨릴 수 없도록.


- 지키고 있는 거군요.


- 아뇨. 파괴하고 싶어요.


- 그 무엇도 더 이상 당신을 망가뜨릴 수 없도록 파괴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 맞아요. 이미 너무 늦었으니까요. 망가뜨리는 일 말고는 남은 게 없으니까요. 그것마저 내어줄 수는 없어요.


- 그러니 지키고 있는 겁니다. 당신을. 당신에게 남은 것을.


- 그렇지 않아요. 다 부수고 있는 걸요. 모두 다 산산조각내고 싶어요.


- 어미곰의 발톱과 포효는 싸늘한 시체가 된 새끼곰은 되살릴 수 없죠. 하지만, 그 발톱과 포효에 담긴 분노는 새끼곰의 죽음이 부당하다고 부르짖습니다. 그 죽음을 지키기 위해서요. 새끼곰을 죽여도 된다 말하는 모든 것에게서. 새끼곰의 시체를 파먹기 위해 모여드는 까마귀와 들짐승들에게서.


- 새끼곰을 죽인 모든 것들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 죽음을 슬퍼할 수 있으니까요. 상실을 만질 수 있으니까요. 슬퍼하며 보듬은 모든 것들은 다시 살아나는 법이니까요.


- 저들이 나를 죽였어요.


- 아뇨.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죽은 자 안에는 어미곰이 없으니까요.


- 어미곰이 있다면 왜 나를 지키지 못했죠?


- 다른 무언가를 지키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아닌.


- 왜 나를 지켜주지 않았나요?


- 어미곰은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지켜야 한다 믿는 것만 지켜주니까요.


- 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믿은 건가요? 내 안의 어미곰은.


- 아뇨. 당신 안에 있는 어미곰은 늘 당신을 지킵니다. 당신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믿은 건, 당신일 겁니다.


- 결국 그들이 아닌 내가 나를 죽였다는 말인가요?


- 당신 안에 있는 어미곰이 당신을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부숴서라도. 모든 것을 죽여서라도. 당신을 지켜내고 있어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겁니다. 이제, 당신을 지켜도 된다고. 당신을 지켜야 한다고.


- 낯설어요. 그런데 친숙해요.


- 어미곰은 누구에게나 친숙합니다. 우리를 지켜주니까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낯설죠. 자신을 지켜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 지키고 싶어요. 나를. 내 죽음을 훔쳐 먹는 저들에게서. 내 생을 잡아먹으려는 저들에게서.


- 어미곰은 자신을 지키려는 이들을 향해 발톱을 드러내지도, 물어뜯지도 않습니다. 새끼곰을 다룰 때처럼, 거친 이빨마저 부드럽게 감싸죠. 당신을 지키려는 어미곰의 눈을 바라보세요. 그 눈 안에 무엇이 있는지.


- 눈이요? 어려워요. 커다랗고 날카로운 발톱만 보여요. 무서워요. 나를 지켜줄 것 같지 않아요.


- 낯선 것들은 무섭게 보이는 법이죠. 다시 한번 바라보세요. 어미곰의 눈동자를.


- 보고 있어요.


- 어떤가요.


- 슬퍼요. 그런데 온화해요. 그런데 또 슬퍼요.


- 무엇이 보이나요?


- 제가 있어요. 어미곰의 눈 안에 내가 있어요.


- 어미곰의 눈동자에는 새끼곰이 들어 있습니다. 어미곰이 지키려는 것은 그 눈동자를 바라봐야 보이죠.


- 차분해요. 고요가 느껴져요. 모든 걸 부숴버렸을 때처럼.


- 어미곰과 함께 숨을 쉬면 차분해지죠. 그 눈동자가 호흡을 지켜주니까요.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는 어미곰의 눈을 바라보세요. 당신이 부숴버린 모든 것. 당신이 파괴하려는 모든 것. 당신이 죽여 버리기 원하는 모든 것. 그것들에서 눈을 돌려 어미곰의 눈을 바라보세요. 그 눈동자가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그 눈동자가 당신을 지키라고 말해줄 거예요. 당신을 지켜낼 수 있다 말해줄 거예요. 부수지 않아도. 죽이지 않아도. 파괴하지 않아도.




#겨자풀식탁이야기

#고통의 결(結)을 염(殮)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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