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 커플이 없었더라면...
산책을 부르는 계절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선선한 가을 공기가 산책을 부르는 계절입니다. 아침, 점심, 해지기 전까지 하루에 두세 번씩 산책을 나섭니다. 안성으로 이사 오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이 맑은 공기입니다. 물론 이 말에 안성 토박이들은 발끈하죠. 지형상 공기가 정체되어 미세먼지에 취약하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원도와 제주도만 빼고는 거의 다 살아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안성은 공기가 좋은 지역입니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도 하수구 냄새가 나지 않고, 수도권에 비하면 매연도 거의 없습니다. 산책 중 악취라고 해봐야 은행나무 열매 냄새 정도인데, 이마저도 저는 천연 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고소한 냄새만 골라 맡으면 향긋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다만, 반려견 분변처리를 안 하시는 분들은 여기도 많아서 가을 하늘을 보고 싶어도 땅을 보며 걷는 경우가 많습니다.
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했습니다.
저의 주요 산책 코스는 중앙대 다빈치 캠퍼스입니다. 학기 중이라 학생들이 많고, 요즘은 입시철이라 실기 고사를 보는지 젊음의 기운이 캠퍼스에 가득합니다. 그 기운이 저를 자석처럼 끌어당기죠. 하루 세 번씩 다니다 보니 지리도 바삭하게 익혔고, 자연스럽게 화장실 위치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파악할 수밖에 없는 한 사건이 있었습죠.
얼마 전, 주말이었습니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속이 더부룩했지만,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에 산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걷다 보면 소화되겠지 싶었죠. 그런데 산책 중반쯤 갑자기 급한 신호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배가 요동치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주말이라 건물은 모두 닫혀 있었고, 장은 저에게서 유체이탈한 듯 따로 놀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은 열려 있겠지!”
라는 희망을 품고 중앙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커플 대학생이 느긋하게 걷고 있더군요. 100m 전 즈음부터 완전 진로방해모드로... 인도가 좁아 앞질러 가기도 어렵고, 차도로 내려가자니 괄약근이 풀릴 것 같고... 그들에게 온갖 원망을 쏟아내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습니다. 다리를 베베 꼬고,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며... 뭐 어떻게든 무사히 세이프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도서관 문은 학생 출입증이 있어야 열리는 시스템이었죠. 들어갈 땐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오로지 화장실만 목표로 돌진했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주말이라 사람도 없었는데, 그 원망스럽던 커플 대학생이 없었다면 저는 그야말로 폭망 할 뻔했습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준 덕분에 저는 오늘도 안성에서 이 모양, 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말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그날의 교훈: 커플을 미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