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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가 꿈이 되다

안녕 기초반, 이제는 심화반으로...

by 철없는박영감

성우지망생이라는 부캐를 키우면서 회사원 본캐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로 눈치는 그만 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팀원들이랑 같이 식사하지 않고 회사 근처에 연습실을 빌려서 발성연습을 시작했다. 더 이상 몰려다니면서 비위 맞추고, 잔심부름하는 똘마니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나를 위한 투자시간을 갖기로 했다. 퇴근도 눈치 보다가 부장 퇴근하고 나서 하는 짓은 그만하기로 했다. 야근한다고 저녁 먹으러 나가서 술 진탕 마시다가 10시에 다시 들어와서 새벽까지 일 시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업무 마치고 당당히 집에 가겠다고 보고하고 퇴근길을 나섰다. 정장에 구두 신고 업무 하라는 지시에도 사규에 그런 내용이 없으므로 운동화 신고 다녔다. 요즘 MZ세대의 개인주의 행동이라고 치부하는 것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남들이 뭐라던 내가 더 소중하니까. 내 스스로 나를 지켜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요즘 말하는 '조용한 퇴사'였던 것 같다. 2년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


두 번째로 감정표현을 더 잘하게 되었다. 항상 참고, 성격을 누르면서 생활했었다. 만원씩 소액으로 빌려가서 안 갚는 차장, 거래처에 자기 상의 놓고 왔다고 출근길에 들러서 자기 자리에 갖다 놓으라는 과장,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넘어갔다. 왜냐하면 군대문화이기도 하고, 내가 진짜 화가 나면 말도 어버버 하고, 몸을 바르르 떨면서 바보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를 내고 나서도 무시당하는 것보다 그냥 참는 게 더 이익이었다. 그런데 연기수업을 통해서 다양한 감정표현을 고민하고, 배우고, 실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표현을 하게 된 것 같다. 선배들이 가장 놀란 점이 이거였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OO가 이상한 데 다니기 시작하더니 변했어.'라고 하는데 그동안 진짜 나를 몰랐던 거지... 나도 한까칠하는 성격이다. 그 뒤로 지방으로 다시 내려가서도 캐릭터가 까칠하게 잡혀서 한동안 후배들이 많이 무서워했다. 어쨌든 이제는 선배든, 상사든 나이나 직급으로 나를 찍어 누를 수 없었다. 상무에게도 할 말은 하고 다녔다. '아니면 까짓것 관두지 머!'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세 번째로 그러다 보니 더 이상 회사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정말 어려서 용감했지 '회사 잘리면, 성우 하러 갈 거야.'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성우지망생이 탈출구 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30대 중반에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열심히 하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을 읽는 직장인 지망생이 있다면 나처럼 바보 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길... 직장인 지망생 말고 나머지 지망생들도 '성우'라는 직업에 올인은 하지 마시길 당부드린다. '성우에 올인하지 마세요.'는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성우지망생을 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궁핍하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더 편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 따위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네 번째로 밝아졌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변화다. 철학자가 되어 '나는 왜 태어났지?'라는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듯이 우울하게 살다가 가슴 뛰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면서 찾아온 변화이다. 이것은 희망의 시작이었고, 나중에 꿈을 향해 더 못 가게 됐을 때는 절망의 시작이기도 했다. 취미활동으로 하면 되지 않냐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요즘 그런 클래스도 생기고 있다. 낭독반, 오디오북반, 취미반 모집광고를 꽤 본다. 가볍게 접근하는 것도 좋다. 1인 콘텐츠 시대이니 학원도 시대상에 맞게 진화한 거겠지. 괜찮다. 다만 가벼운 접근만큼 학원비도 가벼워야 할 텐데. 내가 공부할 때는 유튜브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기초반 수료식 즈음에는 이미 맛을 알아버려서 진심이 되어있었다. 어쨌든 어제보다 나은 나를 보면서, 조금씩이라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나를 보면서 말수도 많아졌고, 표정도 밝아졌다.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내 꿈은 성우가 됐다. 쉬는 시간마다 검색창에 성우를 검색하고, 각 방송사 성우극회에 들어가서 성우님들 음성샘플을 들으며 연구했다. 매일 같이 점심시간마다 연습실에서 발성연습을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대본과 인물 분석을 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기초반 3개월이 금방 지나갔다. 어느덧 마지막 수업시간이 되었고 선생님에게 수료증을 받고 수업을 마쳤다. 끝나고 선생님이 우리 6명에게 저녁을 사주셨다. 마지막 수업 전에 우리끼리 돈을 모아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처음에 백화점 상품권을 준비했다가 혼났다. 편지를 쓴 줄 알고 받으셨다가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라시며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면 받겠지만 상품권은 사양한다고 하셔서 얼른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수료날에 맞춰 선생님 탄생석이 박힌 열쇠고리를 다시 준비했다. 우리 반 롤링페이퍼도 같이... 역시 성우님들은 로맨티시스트가 많다. 기초반을 수료하고 각자의 길로 갈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둘째, 셋째 누님과 다음 주부터 심화반에서 보자며 의지를 다지고 헤어졌다.


강의실을 옮기면서 마주친 심화반 친구들은 일단 목소리부터 달랐고, 포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찍 학원에 도착해서 같은 강의실에서 대기할 때, 그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변성 연기를 연습하는데, 나는 아직도 내레이션과 기초연기를 하고 있어서 수준차이가 많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화반 첫 수업 30분도 안 돼서 나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그들도 지망생이라는 것을... 우리 앞에서 폼 잡았다는 것을… 성우학원 기초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처음 눈물 흘리며 속 얘기를 꺼냈던 충격적인 연기수업을 시작으로 발음, 발성, 호흡을 매일매일 수련했고, 실력은 안되지만 경험 삼아 방송국 공채시험까지 지원했다. 내 가슴에는 성우가 되겠다는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같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시간이 정말 재밌고, 즐겁고, 빨리 지나가 버린다. 한동안 유행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특히 '프로듀스 101'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돌 연습생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안에서 갈등도 있고 좌절도 있지만 하나같이 하는 말이 '같은 꿈을 가진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거였다. 나도 그랬다. 서로 잡아먹거나 먹히는 사회에만 있다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 내가 성우라는 꿈에 진심이 되어버린 순간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아마 영화를 보다가였을 것이다. '패왕별희'에서 아역들이 경극단의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선배 경극배우가 무대에서 멋지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배우들은 얼마나 많이 맞았길래 저렇게 잘하지?"

라며 오열한다. 그리고 경극단에 다시 돌아가지만 심한 매질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성우학원을 다니기 전에 이 장면을 봤을 때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냥 힘들겠구나 하고 지나갔는데, 연기를 위해 간접경험을 하려고 본 영화에서 공감하며 울어버렸다. 저 장면에서 가슴에 전기가 통하는 듯이 찡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는 기분이었을까? 아이돌 연습생... 경극배우 훈련생… 나는 성우 지망생... 일맥상통하는 뭔가가 내 정수리를 관통해서 나를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매 맞을 것을 알면서도 경극단으로 돌아간 아이들의 마음이었달까. 새로 뜬 별빛이 너무 강해서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별 따러 가는 이야기, 심화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둘째, 셋째 누나도 얼마 안 돼서 결국 지망생 생활을 접었다. 심화반 이야기는 아마도 연기열정에 불타올랐던 에피소드 위주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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