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심화반으로 오면서 환경이 크게 두 가지가 바뀌었다. 우선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가게 되었다. 본사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진심으로 성우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상사가 자기 밑에서 그만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원래 있던 공장으로 가서, 거기서 관두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공장으로 가게 되었다. 받아주신 공장장님은 마음의 상처를 알고 더 챙겨주셨다. 실패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 성과평가도 최고점을 주셨다. 그런 배려 덕분에 성과급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또 코가 끼었다. 물론 성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얘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우공채합격해서 멋있게 사표 내고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잘한 것도 없이 평가를 잘 받아서 그랬는지 당시 팀장은 그 뒤로 엄청나게 괴롭혔다. 어쨌든 그래서 전주에서 서울로 매주 토요일마다 상경해서 학원을 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해보니 다닐만했다. 고속버스로 두 시간 반 정도 걸리고, 터미널에서 학원까지도 버스 한 번이면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본가가 의정부여서 학원 끝나고 꼭 전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다. 학원수업이 끝나면 의정부집에서 자고 다음날 전주로 내려가는 생활을 했다. 성우지망생 생활로써는 괜찮은 일정이었지만 나중에 어느 정도 합격을 기대할 만한 실력이 되었을 때, 엄청난 재난으로 작용했다.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하게 될 것 같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버스에서 수업 녹음본을 들으면 시간이 딱 맞았다. 자연스럽게 복습을 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연기도 연구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다닐 때의 장점이 이것이다. 버스 안에서 다양한 생각이나 상상을 할 시간이 생긴다. 집에서 마음먹고 시간 내서 복습하는 것이 아니고 오가는 버스 안에서 당연히 하게 되는 일이었다.
두 번째 변화가 학원이 이사를 하면서 스튜디오와 분리되었다. 그래서 연기수업은 동일하게 진행되고, 녹음수업은 더 이상 PD님이 수업하지 않고 다른 성우님들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스튜디오가 아닌 애플 컴퓨터 한 대와 마이크가 있는 작은 녹음부스에서 녹음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장단점은 있었다. 실제 성우님들께 마이크 사용법을 배우게 된 거다. 그리고 연기수업을 2배로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끼리 공채 시험 준비를 하면서 이것저것 편집도 해가면서 자유롭게 녹음실을 썼기 때문에 편집실력도 키울 수 있었다. 다만 더 이상 PD님의 피드백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리고 공채시험 준비할 때, 전문가의 손길로 편집을 맡길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사라졌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서 성우지망생 심화반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기초반일 때, 심화반 친구들이 있는 곳의 문너머로 큰소리도 들리고, 비명 소리도 들리고, 변성하는 소리도 들리고 해서 안 보이는 저 안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다. 잠깐씩 같은 강의실에서 대기할 때도 그들은 배역이 나뉜, 티키타카가 있는 대본을 연습했다. 그래서 심화반은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과정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니 별 것 아니었다. 새로운 기초반을 모집해서 3개월 코스로 수업을 다시 시작해야 하니 기초반 수료자가 가게 되는 반이 심화반이었다. 결국은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학년이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진급 시험 같은 무언가를 통과해야 하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단지 우리보다 먼저 학원을 다닌 사람들이었다. 심화반 첫 수업시간에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와 둘째, 셋째 누나는 이 실체를 알고 약간 김샜었다. 대신 선생님은 더 예뻐지셨다. 성우계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팬도 많은 유명한 성우님이었다.
수업은 기초반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발음, 호흡, 발성 같은 기초 훈련은 조금 더 자율에 맡기고 연기에 집중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대기하면서 했던 변성 연습은 뭐였냐. 수업시간에 하는 게 아니고 자기들끼리 우리 앞에서 폼 잡는다고 하던 것들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면 일단 그들이 연습하던 '원피스' 대본을 한 번도 수업시간에 한 적이 없고,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성우지망생들이 자기들끼리 연습을 하면 이상하게 점점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에는 목쉬어가지고 오기 때문에 그런 연습은 시키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셨다. 큰 소리 내고, 비명 지르고 하는 데는 기선제압 같은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학원에 우리 반이 분위기도 좋고, 똘똘 뭉쳐서 잘한다고 소문이 나니 그들도 긴장했으리라. 이마저도 첫날 내가 반장 자리를 꿰차며 도리어 기선을 제압했다. 비슷비슷한 실력이라서 가능했고, 애들도 처음에만 그랬지 순둥순둥한 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연기가 주가 된 수업은 재미있었다. 갑자기 주어진 단어 5개로 상황을 만들어서 즉흥연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너 X5'가 주어졌다. '너' 다섯 개로 상황을 만들어 즉흥연기를 했다. 길 가다가 돈 떼먹고 도망간 놈을 마주치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갑자기 마주친 듯 '너?' 맞네 요놈 잡았다 느낌으로 '너!'를 하고, 잡히기만 해 느낌으로 '너~' 하고, 상대가 갑자기 도망쳐서 내가 쫓아가듯이 '너! 너!' 하며 끝냈다. 물론 다들 좋아해 주고 박수를 받았다. 다음은 선생님께서 시범도 보여주셨다. 이번에는 '돈 X5'이다. 지하철에서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아챈 상황이다. 역시 성우님...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음에는 대본 없이 첫 대사만 주고 애드리브로 연기를 이어가는 수업도 했다. 지금도 '그때 이렇게 할걸...' 하며 후회하는 장면이 많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잘 못했는데 선생님이 답답했는지 '그냥 멱살을 잡고 흔들어요...'라고 주문을 했는데 막상 잡으려니 안 됐다. 사람 멱살 잡는 게 힘든 일이다. 이런 즉흥연기는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에너지도 많이 소모됐다. 몰입이라는 것이 연기에 필수인데... 이게 에너지 소모가 많다. 특히 즉흥연기는 헬스클럽에서 한 시간 운동한 것처럼 온몸이 땀에 젖을 때가 많다. 짜여 있지 않기 때문에 감정기복이 심했다.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같은 반 친구들과 학원이 끝나면 근처 커피숍에 모여서 담배 퍽퍽 피워대며 오늘 수업 얘기를 하거나 수고했다며 술집에서 술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장수생의 지름길로 향하는 놀자판으로 슬슬 바뀌고 있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았는가? 노인으로 태어나 갓난아기로 죽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다. 나의 성우지망생 시간도 언젠가부터 거꾸로 가고 있었다. 본캐가 매너리즘과 번아웃으로 죽어갔고 있었지만, 부캐는 재미과 열정으로 회춘하고 있었다. 젊은 패기와 미숙함으로 즉흥연기, 몰입, 살아있는 연기를 하겠다며 대본분석이나 인물분석을 게을리했다. 그리고 배경, 상황 설정 등을 꼼꼼히 하지 않고 임기응변과 애드리브로 극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날 것의..., 야생 그대로의 연기가 진짜 연기라고 주장하며 기본을 등한시했다. 연기 장인이라고 불리는 분들도 매일매일 기본기를 수련하고, 대본에 깨알같이 분석한 내용을 메모하는데 이제 갓 기초반을 끝내고 온 병아리가 꼬끼오를 외치려고 했다. 잘못된 방향이라고 주변에서 많이 알려주었지만 듣지 않았다. 오로지 직진. 앞만 보고 달렸다. 어렸을 때부터 순발력은 고사하고 말싸움도 제대로 못했던 아이가 무슨 애드리브로 연기를 하겠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운 시기였다.
결국은 목에 무리가 왔고, 살도 많이 찌면서 회사 건강검진에서 폐활량이 일반인에 비해 부족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한 달을 휴학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는 회사일이 너무 바빠져서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이 글을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지금도 폐활량은 평균에 비해서 부족하다. 특히 미세먼지나 황사가 심한 날은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껴야 한다. 목은 성대 결절은 아니고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자극을 많이 받아서 요양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한 달 후에 건강한 모습으로 학원에 다시 복귀했다. 부족한 폐활량은 요령으로 어떻게든 넘어갔는데 한 번씩 선생님이 발성 잘하고 있는지 테스트를 하실 때는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했다. 항상 혼나긴 했지만… 그래서 내가 항상 금욕주의 생활을 강조하는 거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나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심화반도 거의 멤버 전원이 바뀌었다. 정신 차린 이때가 성우지망생 3년 차 정도 됐을 때인 것 같다. 그 뒤로 2년간은 진짜 열심히 준비했다. 심화반편에서는 연기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일들을 하나씩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