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호흡과 발성
"이보시오. 작자 양반. 내가 성우가 될 상인가. 왜 만날 호흡, 발성 얘기뿐인가. 성우지망생이 아닌데도 호흡, 발성은 기초반편에서 많이 들어서 이제 나도 전문가 다됐소만. 그 얘기만 하다가 끝나겠소. 제대로 학원 다닌 거 맞긴 한 거요?"
이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다. 연기를 위해 했던 에피소드를 푼다고 했는데 또 호흡과 발성이라니... '혹시 너무 못해서 또 기초반으로 강등됐다고 하려는 건가?'라고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고, 기초반에서의 호흡과 발성이 호흡을 길게 하고 목에 무리가 안 가게 좋은 소리 내는 연습을 한 거라면, 심화반에서는 연기를 위한 호흡과 발성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최종목표는 복식호흡에 소리를 얹는 것이다. 복식호흡으로 활주로를 깔고 말(소리)이라는 비행기를 그 위에서 이륙시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인위적인 호흡은 방해요소다. 한동안 '공기반 소리반' 열풍이 불었는데, 아마 다들 아실 거다. 박진영 프로듀서가 항상 강조하는 말.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공기반, 소리반으로 노래해야 한다고... 그 얘기다. 공기에 소리를 얹어서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연기해야 한다. 다만 성우는 노래가 아니기 때문에 공기반, 소리반으로 연기하면 안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호흡은 하되, 발성은 가래떡을 뽑듯이 옹골찬 소리를 뽑아내야 한다. 물론 여기서 호흡은 복식호흡이다. 그리고 소리가 아니고 호흡이 먼저다. 꽉 찬 소리가 나면 이제 소리를 가지고 노는 거다. 이 단계부터는 일부러 쭉쭉 펴서 읽지 않아도 사투리로 안 들리는 단계이다. 그래서 스타일을 담게 된다. 특히 내레이션에서 내용에 따라 약간 웃기게도 하고, 감성적으로도 하고, 진취적이거나 똑 부러지게도 한다. 맛집탐방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감성다큐, 르포, 자연다큐 일 수도 있다.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내레이션이 가능하게 된다.
연기는 호흡만으로 상황을 정리한다. 밑밥을 깐다고 할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리보다 호흡이 먼저다. 이제부터는 대사 하기 전의 들숨도, 대사가 끝나고 날숨도 연기다. 호흡이 연기다. 대사가 없어도 호흡으로 연기를 할 수 있다. 화내는 연기를 시키면, 초보들이 하는 흔한 실수가 버럭 냅다 소리만 지르는 것이다. 그러면 속으로 '아이고 목 아프겠다. 그래 어디까지 지를 수 있나 보자.'라고 생각한다. 호흡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화났을 때의 거친 호흡 위에 대사를 얹는 거다. 그러면 냅다 소리만 지를 때 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연기가 된다. 화가 난 거친 호흡이 일정할까? 호흡이 빨라졌다가 진정한다고 심호흡도 했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숨이 막혔다가... 이런 다양한 상황에 맞는 호흡 위에 대사를 얹으면 되는 거다. 나중에 우는 연기에 대해서도 자세히 쓰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간단히 영상연기와 성우연기의 차이점만 설명하겠다. 우는 연기에 진심인 한국사람들은 배우가 진짜로 우는지 가짜로 우는지 꼭 판별하려고 한다. 그럼 흔히들 '콧물이 안 나오면 가짜로 우는 거야' 또는 '저렇게 예쁘게 눈물이 또로록 흐른다고? 저건 안약 넣은 거야' 이런 반응을 많이 한다. TV나 영화는 영상이기 때문에 눈물, 콧물 빼면서 마스카라 번지게 엉엉 울어야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성우 연기는 어떨까? 영상매체처럼 울면 무슨 소리하는지 못 알아듣는다. 진짜 울면서 연기하면 망한다. 그래서 호흡을 준다. 예를 들어 일단 사람이 울 때는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리고 호흡이 떨리다가 입이 차마 안 떨어지는데 억지로 뭔가 말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아예 아무 말도 못 하고 말문이 막히기도 하고, 코를 훌쩍대다가 코를 먹기도 하고... (예시일 뿐이다. 이렇게 더러운 연기는 안 한다) 이런 호흡들이 있다. 성우연기는 소리만 들리니까 이런 호흡을 연기해야 한다. 눈물, 콧물 빼면서 연기하는 것은 영상매체이다. 연기의 시작과 끝은 호흡이다. 감정이 담긴 호흡 말이다. 대사가 아니다. 이걸 깨닫는데 4년이 걸렸다.
성우연기의 호흡과 발성 훈련이 시작됐다. 호흡은 당연히 복식호흡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연기하려면 연기상황에 따라서 흉식호흡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므로 지망생은 일단 패스... 안 그래도 폐활량이 줄어서 힘든데 연기 호흡을 훈련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폐활량이 좋아 호흡이 길면 감정의 변화를 표현할 때 아주 유리하다. 조수미 성악가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가 높은 고음을 잘해서? 성량이 커서? 둘 다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폐활량이 좋아서 한 호흡에 다양한 기교를 부릴 수 있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복식호흡으로 폐활량을 늘려야 하는 이유가 한 호흡에 다양한 감정변화를 표현하는 것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숨이 차서 대사가 자주 끊기면 듣는 사람도, 연기하는 사람도 감정의 흐름이 뚝뚝 끊긴다. 이것은 엄청난 마이너스 요인이다. (꼭 금연하자!) 나름 요령으로 잘 넘기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한 호흡에 길게 연기하는 사람과 비교해서는 부족하게 들린다. 나의 요령은 대사를 외우는 것이다. 성우 연기의 특징이 TV드라마나 영화 같은 리딩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쪽대본처럼 하루 전에 나온다. 그래서 서로 맞춰 볼 시간이 짧거나 아예 없다. 더빙 같은 경우는 거의 따로 녹음하기도 한다. 또 성우님들은 하루에 스케줄을 여러 개 소화해야 해서 한 대본에 올인할 수 없다. 호흡이 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또 나온다. 간혹 숙지가 안된 대본으로 연기를 할 때, 처음 잡았던 감정선이 틀려도 호흡이 긴 사람들은 중간에 감정을 바꿀 수가 있다. 그런데 호흡이 짧으면 힘들다. 그래서 그날 수업시작 때 받은 대본이라도 내가 선택한 대사는 빨리 외운다. 외우면 머릿속에서 바로 대사가 나오기 때문에 대처가 빠르다. 눈으로 보고 머리에서 이해해서 대사를 하는 프로세스에서 눈으로 보는 단계를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외우면 중간에 감정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연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이성을 넘어서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앞이 캄캄해져서 대사를 놓치거나, 계획했던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외우지 않고 하다가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하면서 연기를 끊어야 한다. 학원이면 아무 문제 없이 다시 하면 되지만, 만약 공채시험 중이라면 진땀 좀 흘릴 거다. 만약 호흡도 길고, 대사도 외우면... 그건 브라보다. 못 이긴다. 그래서 성우는 순발력은 물론 머리도 좋아야 한다. 보면서 하는 대사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외워서 하는 대사와 질이 다르다. 만약 호흡이 딸린다면 대사를 외워서 해라. 그리고 학원에서 자꾸 외우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다. 공채시험도 2~3차 가면 5분 대사보고 바로 연기시킨다. 그러므로 잘 외우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발성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입에서 소리로 가래떡을 뽑듯이 발성해야 한다. 소리가 꽉 차있고 떡처럼 쫀득쫀득 뭉쳐있어야 하며 동그랗게 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거 연습하다가 많은 지망생들이 성대가 상한다. 기초반에서 발성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기억으로 잘못 접근했다가는 목 나간다. 기초반에서 발성은 공명을 통한 좋은 소리 찾기와 목이 상하지 않게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옹골진 소리를 내라고 하면 다시 목으로 발성하기 시작한다. 공명은 내 몸을 이용해서 소리를 울리는 것인데 소리를 울리게 하다 보면 퍼질 수밖에 없다. 좋은 소리를 위해 공명 시키다 보면 퍼진 소리 때문에 옹골진 소리가 안 나온다. 잘못생각하면 서로 상충되는 얘기 같다. 그래서 가래떡을 뽑는 이미지로 설명하는데 이때 많이 하는 실수가 목을 쓰는 거다.
지금부터 쓰는 내용은 훈련을 한 일화이지 정답은 꼭 전문가에게 상담하기를 당부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호흡과 발성은 내가 쓰는 이런 글이나 검색, 유튜브, 카페에서 찾아보고 혼자 할 수 있는 연습이 아니다. 나는 내가 훈련한 내용을 글로 적을 뿐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다시 당부한다. 꼭 전문가에게 상담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시 발성 얘기로 돌아와서 연기 발성을 연습하면서 목 상하는 친구를 많이 봤다. 목을 쓰면 처음에는 어깨에, 나중에는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연기를 하고 나면 온몸에 땀이 난다. 땀이 났으니 열심히 한 거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더욱 목을 쓰는 악순환에 빠진다. 처음에는 기초반에서 훈련한 게 있어서 버티는 데, 계속 잘못하다가 어느 순간 목이 나간다.
사실 진짜 연기는 몸에 힘이 빠지고 나서 시작이다. 훈련이 되어 신체가 편안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진짜 연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다. 이걸 깨닫는 게 공채 합격권이다. 생각에는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깨닫고 보니 나이가 40이다. 공채합격은 물 건너갔다. 그리고 이걸 깨달은 이들이 각 학원마다 몇 명씩 있다. 그러므로 성우지망생들은 우선 내가 다니는 학원에서 1등이 될 생각을 하는 것이 좋다. 학원에서 1등을 하면 다른 학원의 강자들이 또 포진해 있다. 도장 깨기 식으로 단련하면 된다. 말이 쉽지. 외롭고 힘든 여정이다.
내가 찾은 연기 발성은 가슴에서 소리를 시작해서 입에서 쏘는 거다. 가슴속 명치 쪽에서 소리가 시작되면 입, 비강, 머리를 울리며 공명된 소리가 모이는데 이 모인 소리를 입 앞에서 쏘는 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느낌... 뇌피셜이다. 나같이 이런 식으로 카페에서 활동하는 자칭 호흡, 발성 사짜 전문가들이 많다. 잘못 따라 하면 큰일 난다. 계속 강조한다. 왜 이렇게 강조하냐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꼭 뭐라도 해야겠다면, 구자형 성우님이 가르쳐 주시는 "어~ 흥" 하는 발성법 영상이 있다. 이건 초보자도 한번 따라 해 볼만한 것 같다. 공명 시켜서 소리를 모아서 쏘는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느낌을 잡았을 때가 기억난다. 뭔가를 준비했거나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날마다 연습 일지를 써가며 착실히 훈련했을 뿐이다. 그날도 여느 수업시간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내가 대사를 끝내자 갑자기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다.
"뭔 일 있었어? 이제야 내 말 알아들은 거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지 싶었다.
"네?"
"아니, 지금 한 게 내가 그동안 OO한테 계속 요구해 오던 거야... 심지 있는 꽉 찬 옹골진 목소리! 외유내강 목소리. “
"어! 그래요? 아닌데... 특별히 한 거 없는데... 그래요? 좋아진 거예요? 정말요?"
마약같이 끊을 수 없는 칭찬을 오래간만에 들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나를 본받으라면서 엄청 띄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정말 특별히 한 게 없고 그동안의 훈련이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득음하듯이 어느 한순간에 찾아온다. 요령이 없다. 쌓은 시간이 답해준다. 시간을 쌓으려면 '일지 쓰기'를 추천한다. 특별한 것 없다. 매일 훈련한 내용과 느낌을 한 두 줄씩 일기처럼 노트에 적는 거다. 일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잊지 않고 매일 훈련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거다. 나중에 일지를 보면 저런 때도 있었지 할런가? 나는 일지는 다 버렸다. 다시 펼쳐 보게는 안되더라. 이렇게 호흡과 발성의 가닥을 잡으면 갑자기 실력이 확 오른다. 그리고 성우공부가 확 재미있어진다. 성취감도 대단하다. 이때부터 어디 가서 말을 하면 목소리 좋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