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에 연재하는 글을 옮깁니다.
21살 여름방학 때다. 통신사 대리점에서 일했다. 지나는 사람 붙들어, 휴대전화 판매하는 일이었다. 기본급 조금에, 휴대전화 판매한 만큼 성과급 준다고 했다. 한 달에 5대만 팔아도 어지간한 아르바이트보다 괜찮을 것 같았다. 한 달에 5대라, 그럼 6일에 1대만 팔면 된단 얘긴데? 설마 내가 그걸 못 팔까! 부푼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몇 대나 팔았느냐고?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0대! 다시 말해, 단 1대도 못 팔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이 지나갔다. 도무지 입이 안 떨어졌다. 쭈뼛쭈뼛, 허둥지둥하는 사이 한 달이 후딱 지났다. 그때 알았다. 영업이 나에게 안 맞는다는 것을. 소질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성정에 안 맞았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어쩐 일인지 싫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라는 걸, 그때 깨달은 거다.
기자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잡지사 기자였다. 잡지사는 구독료와 광고료로 돌아간다. 영세한 잡지사 기자로서 친척이건 친구건 그게 취재원이건 만나면 잡지 구독해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다. 몸담은 잡지사가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그러자면 ‘구독 카드’를 내밀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절, 친구 많이 잃었다. 잡지 안 보겠다고 하면 그냥 알았다고 하거나, 좀 더 웃는 낯으로 “이번 달 잡지 무료로 줄 테니까 한 번 읽어보고 다시 고민해 줘”라거나. 부탁하는 처지면 상냥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영 뻣뻣했다. 거절하는 친구에게 늘 “얀마, 한 달 구독료 6,000원이니까 하루에 겨우 200원꼴인데, 네가 날 위해 자판기 커피 한 잔만 덜 마시면 되는 걸 그게 그렇게 아깝냐? 야~!! 됐어, 말어.”라는 말만 뱉어냈다.
그렇게 쭉 살았다. 물밑에서 쉼 없이 물갈퀴 흔들지언정, 물 위에서만큼은 고개 빳빳이 드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처럼. 그랬으니, 목수로 일할 때는 도리어 속이 편했다. 내 몸 열심히 굴리면 그만이었다. 그것만 증명하면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었다.
돌이켜보니까, 그렇게 살아도 남한테 크게 피해 안 주고 나 또한 별로 손해 안 보는 직업만 거쳤다. 그러다 아주 일반적인 회사 생활을, 나이 마흔 가까워 처음 시작한 거다. 그것도 책임과 의무가 막중한 마케팅본부장 직책 달고.
입사 초기부터 쉽지 않았다. 우리 입장에서 필수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업계가 있었다. 리스트 뽑아보니 대략 30개 넘는 회사가 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부장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직원들 보는 앞에서, 낯선 이에게 무작정 전화해 우리 사업 설명하면서 읊조리고 싶지 않았다. 수첩 하나 들고 밖으로 나왔다. 종일 전화통 붙들었다. 대차게 까이길 수십 차례, 겨우 두 곳과 미팅 잡았다. 진이 쪽 빠졌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려고 최선을 다해왔던 내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 때려치웠느냐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 뒤로도 대외적으로 사람 만날 일이 정말 많았다. 어떨 때는 일주일의 절반이 출장이다. 영업이라고까지 할 순 없으나, 스타트업 본부장으로서 미팅 요청 드리고, 찾아뵙고, 열과 성을 다해 우리 사업 설명해 드려야 하는 나날이 끝없이 이어진다. 물론,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고개 90도로 숙여 인사드리는 날 발견한다.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걸, 타고났다는 말만큼 쉬운 핑계 없다는 걸 말이다. 어쩌겠나. 난 본부장이고, 입 쩍 벌린 아기 새처럼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출장 가는 날 바라보는 부하 직원이 한 트럭인데.
고백하자면 내년에 마흔이다. 영포티로 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불혹이 되려나 보다. 아무개 직원이 “본부장님! 출장 잘 다녀오세요~!”라며 손에 사탕을 쥐여준다. 사탕이 달다. 철들고 싶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