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민낯과 마주한 여정

by 송주홍

《국민일보》에 연재하는 글을 옮깁니다.


나에겐 ‘욕심’이다. 살며 어떻게든 지키고픈 원칙 같은 게 몇 가지 있다. 그 맨 앞에 놓아두는 게 욕심부리지 말자는 거다. 눈앞의 욕망을 좇아 무언가를 억지로 하다 보면 기어코 탈이 난다. 그래서 복권도 안 사고 로또도 안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더더욱 멀다. 물론, 그 세계에도 피나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내 의지 바깥의 요행을 곁눈질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안 한다.


스물아홉 살까지 지역 잡지사에서 일했다. 영세한 회사였다. 그렇지만 ‘사람, 공간, 그리고 기록’이라는 철학을 차분히 붙드는 곳이었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다루되, 그 화려함을 좇지 않았다. 그보다는 사라져가는 마을 풍경이라든가, 시장에서 나물 파는 이의 삶을 가만히 기록했다. 그런 것에 가치 두는 잡지사였다. 내가 그곳에서 편집장과 선배들에게 기사 쓰는 기술보다 앞서 배운 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였다. 그래도 그곳에서 기자 일 시작한 덕에 조금은 건강한 글쟁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부해본다.


그랬던 내가 다가올 서른을 핑계 삼아 서울로 올라갔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제법 큰 잡지사 취재 팀장 자리였다. 그때는 치기 어렸다. 큰물에서 놀아보고 싶었다. 처음 석 달은 내가 뭐라도 된 양 어깨가 으쓱했다. 종종 유명인을 인터뷰했다.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자랑했다. 마음이 비어가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1년쯤 지나 깨달았다. 내가 유명인의 붕 뜬 껍데기만 쫓고 있었다는 걸. 내가 진짜로 사랑했던 건,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의 단단한 걸음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했던 서울 생활을 접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마음먹었다. 섭리대로 살아가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렇게 쏟은 노력과 땀만큼만 바라자고.


다시 10년이 흘러 이번엔 IT 스타트업이었다. 뷰티도 모르고 개발도 모르는 내가 뷰티 관련 플랫폼 회사 마케팅본부장을 맡았다. 나로선 도전이었다. 방향 설정하고, 기획하고, 그걸 문서로 정리하는 것. 큰 틀에서 보자면 그간 내가 해왔던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부적으로는 업무의 많은 영역이 낯선 세계였다. 물론, 열심히 했다. 낯선 세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바쁜 틈틈이 공부했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쏟아지는 정보를 흡수했다. 그런 모든 과정을, 나는 도전이라고 애써 포장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욕심이었다. 대표가 날 스카우트할 때 회사의 청사진과 함께 많은 성과급을 약속했다. 마흔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 유혹이 달콤했다. 플랫폼 만드는 스타트업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수많은 플랫폼이 생겨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용하는 플랫폼은 10개를 넘지 않는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제대로 터지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런 회사에서 요직을 맡았다.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회사가 성장하면 나도 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가 자주 가족 신년운세를 본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내 팔자에 관해 “마흔부터 큰돈 만질 팔자”라고 했었다. 그게 이번 기회는 아닐까. 몰래 그런 욕심을 부렸다.


회사 다니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 그릇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단지 이만큼인데,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더더욱 커졌다. 책임 있는 자리였다. 책임을 다하는 게 응당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텼고 꾸역꾸역 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숨부터 나왔다. 과식한 사람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역량과 책임 사이에서 부대꼈다. 욕심에 눈이 멀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회사가 더 성장하고, 내 역할이 더 커지기 전에 물러나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대표와 정리했다.


지난 8개월의 여정이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련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민낯과 때때로 마주하며 살아가게 될 거다. 그런 순간마다 그게 나의 민낯이라는 걸 자각하면 될 일이다. 욕심보다는 그런 용기가, 내 걸음 앞을 비춰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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