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타리

Muttari

by 노을비

4장 두 소년의 아빠


새벽 공기가 차갑게 들이치는 산자락, 봉구는 밭두둑 위에 서 있다. 날은 아직 어둑했고, 발밑에선 어제 내린 이슬이 채 마르지 않아 발끝이 축축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의 어깨는 한껏 내려앉아 있다. 서리가 내려 땅이 얼기 전에 쟁기질을 해줘야 하는데 그에게는 소와 쟁기가 없다. 그는 날이 추워질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제 봄이 되면 정말로 소를 빌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그전에 쟁기질을 해놓아야 봄이 되면 곡괭이로 밭을 일굴 수가 있다.

봉구도 논농사를 짓고 싶다. 그러나 섬에서는 논이 귀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마을 유지 어르신이 논을 빌려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봉구에게 논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작은 밭도 사정사정하여 겨우 얻어낸 것이다. 다행히 땅이 작은 만큼 주인에게 주는 곡석수도 적었다. 봉구는 밭에 주로 옥수수를 심었고, 수확한 후에는 그 자리에 바로 기장을 뿌렸다. 짧은 두둑을 한 뼘이라도 더 만들어 시기가 되면 감자와 고추를 심었다. 그러나 배를 불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곡식들이 자라는 이 밭은 마치 봉구의 가족과 닮아 있었다. 채울 만큼 채웠지만, 언제나 비좁고 부족함이 가득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밭은 다시 황량해졌다. 짧아진 햇빛과 차가운 산바람이 밭을 지나갔다. 가을의 마지막 흔적을 품었던 밭은 이제 메마른 땅과 삭은 잎사귀만 남긴 채 차갑고 황량한 모습으로 변했다. 봉구는 밭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새벽바람이 파고들수록, 봉구의 무력감은 점점 깊어졌다.


“아, 이놈의 밭도, 이놈의 삶도... 어째 이리 팍팍허냐...”


그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조차 허공에 흩어져, 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봉구는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마른 흙을 툭툭 쳐보았다. 손에 묻어나는 흙은 싸늘했고, 그 싸늘함은 그의 삶이 무겁게 내려앉은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봉구는 밭에서 내려와 소와 쟁기를 빌리러 백 씨 어르신 댁으로 향했다. 봉구는 이미 매년 이 어르신께 소를 빌려 썼고, 밭도 백 씨 어르신이 내어준 것이다. 평평한 밭을 기경할 때도 여러 번 소를 빌려달라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산자락 땅인데 소를 내어주겠는가. 봉구도 그 정도 눈치와 염치가 있다.


"어르신 지시요? 저 봉군디요, 소랑 쟁기 쩨깐 쓰면 안될께라?"


백 씨 어르신이 문 열어 보지도 않고 타박하였다.


"야 이놈아, 밭까정 내줬으면 알아서 허제, 귀헌 소까지 주라허냐. 그 밭은 깔크매서 소가 다친당께!"


봉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그는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자주 들은 '염치'라는 말은 그의 마음에 아픈 재갈이었다.


백 씨 노인집에서 나온 봉구는 발걸음을 돌려 제각으로 향했다. 제각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귀신의 집처럼 여겨져 낮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봉구는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각 안은 한기가 가득했다. 봉구는 낡은 짚단을 깔고 드러누웠다.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봉구는 다시 혼잣말을 시작했다.


"이래 살고, 저래 살고. 뭣이 달라질 것이여... 니미럴."


그는 제각 한구석에 감춰둔 술병을 꺼냈다. 날품을 팔아 번 돈으로 하나씩 모아둔 술이다. 다른 사람 손에 닿지 않게 하려고, 자기만 알게 나무 아래 묻어 둔 술병도 수십 병은 될 터였다. 봉구는 병마개를 따서 입에 가져갔다. 알코올이 뱃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퍼져 올라와 머리끝까지 닿았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술기운이 마음을 녹이는 건지, 억눌린 것을 잠시 풀어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현실의 무게가 잠깐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봉구는 다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열네 살, 너무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 시절이었다. 열네 살 소년의 아빠는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떠났고, 홀로 남겨진 가족들을 책임져야 했던 어린 소년은 들판에서 해가 지도록 일하며 번 돈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를 먹여 살렸다. 그 시절의 봉구는 작고 연약했지만, 어깨 위에 지워진 책임은 어른보다도 더 무거웠다.

온종일 곡괭이질을 하고, 삽을 들고 땅을 고르며 땀을 흘리던 소년은 힘이 들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참아야 산다"는 할머니의 말을 되뇌며, 하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일을 한 탓에 왼쪽 어금니는 몇 해 지나지 않아 빠져 버렸다. 어금니가 빠져 음식을 씹을 때마다 느껴지던 허전함은 어쩌면 그가 느끼던 인생의 허기와 닮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달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열다섯 살 때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번의 작은 호기심이 한잔으로, 두 잔으로 이어졌다. 술은 고된 노동의 끝에서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고통과 외로움만큼은 잠시나마 마취된 듯했다.


그는 그 시절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입가를 닦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왼쪽 어금니가 사라진 자리에서 맨살로 으스러지는 감각을 떠올리며,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땐... 참말로 힘들었제."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 한마디가 제각의 썰렁한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은 유난히 제각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가슴 깊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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