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ari
백산마을 땅콩밭은 섬에서 손꼽히는 넓은 밭이었다. 한때 이곳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그러나 육지에서 건너온 외지인이 숲을 통째로 사들인 뒤, 섬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들이 투입되면서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포클레인은 거대한 팔로 나무뿌리를 들어내고, 불도저는 땅을 평탄하게 다졌다. 트럭들이 쉬지 않고 흙을 실어 나르던 장면은 섬사람들에게 신기하면서도 낯선 광경이었다. 먼지와 기계 소리가 가득했던 그날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저 모래땅에서 대체 무슨 농사를 지으려는 거여?"
그러나 외지인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그는 땅콩을 심었다. 가는 백모래에 약간의 진흙이 섞인 이 땅이 땅콩이 자라기에 적합할 줄은 섬사람들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땅콩은 부드러운 흙 속에서 뿌리를 깊이 내렸고, 수확철이 되자 그 뿌리를 뽑아 흙을 털어내는 일도 비교적 수월했다.
더욱이 이곳에서 자란 땅콩은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독특한 맛을 가졌다. 고소하면서도 은은한 맛이 육지 시장에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 외지인은 이 땅콩을 전국으로 유통하며 큰돈을 벌었고, 백산마을 땅콩밭은 이제 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소가 되었다.
땅콩밭이 생긴 이후, 가난한 섬사람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소중한 생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수확철이 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삼삼오오 고랑을 따라 땅콩을 캐며 적은 돈이라도 모아 겨울을 날 준비를 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품꾼들의 얼굴과 손끝을 스쳤다. 땅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반짝였고, 발끝이 닿을 때마다 축축한 기운이 전해졌다. 품꾼들은 하나둘 고랑 옆에 모여들었고, 삽과 포대가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봉구도 품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그러나 봉구는 그 소리마저 멀게 느껴지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바로 옆에서는 영실이 얇은 겉옷을 여미며 발끝으로 흙을 살짝 차고 있었다. 주인은 품꾼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도 각자 짝을 지어 고랑을 나누고 땅콩을 캐야 합니다. 한 고랑씩 맡아서 제대로 해주세요. 해질 때까지 모두 끝내야 합니다."
봉구는 삽을 들고 고랑 끝에 섰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영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기... 같이 해볼랑가?”
봉구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삽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같이 헌들 누가 뭐라겄냐.”
둘은 자연스레 한 고랑에 나란히 섰다. 봉구가 삽을 땅에 깊숙이 꽂아 흙을 파헤치자, 영실이 그 흙더미에서 땅콩 뿌리를 찾아냈다. 흙을 털어내자 땅콩이 주렁주렁 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거 봐라. 니가 삽질을 잘 헌다.”
영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것 아니제. 니가 뿌리를 잘 찾은 거 아녀.”
봉구는 흙을 털어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일을 하며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삽질을 이어갔다. 고랑을 따라 내려가던 중, 영실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근디... 니 이름이 뭐여?”
봉구는 잠시 삽질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이름? 봉구.”
“아, 봉구여. 나는 영실이.”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영실? 어딘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봉구는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실이 이어 물었다.
“니는 어디 마을서 왔는디?”
“호산이여.”
“나는 대길마을에 살구먼. 어쨌든, 같이 일하면 재미는 더 나겄네.”
영실이 흙을 털며 말했다.
“재미는 모르겠고, 빨리 끝나긴 헐 것 같네.”
봉구는 삽을 다시 들고 말했다. 둘은 그렇게 처음 이름을 나눈 뒤, 고랑을 따라 땅콩을 캐기 시작했다. 삽질과 흙을 털어내는 손놀림이 점점 더 익숙하게 맞아들며, 흙 속에 감춰져 있던 땅콩들이 주렁주렁 달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세 번째 고랑을 끝냈다. 봉구는 줄기가 실한 땅콩 하나를 손으로 휘감더니 힘껏 뽑아냈다. 줄기 끝에서 굵고 탐스러운 땅콩들이 촉촉하게 흙을 털며 출렁거렸다. 봉구는 말없이 줄기 끝에서 가장 굵은 땅콩 하나를 골라 쪼개어 내밀었다
"니도 하나 먹어봐라."
봉구가 무심한 듯 말했다. 영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땅콩을 받아 들고, 껍질 속에서 드러난 땅콩알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둘은 말없이 땅콩을 씹으며 잠시 고랑 옆에 걸터앉았다. 흙 묻은 손을 무릎에 털고, 얼굴에는 미세한 땀이 맺혔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스쳤다.
해가 점점 높아지고 가을볕이 둘의 머리 위를 뜨겁게 내리쬐었다. 그럼에도 간간이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땅콩밭을 가로지르며 땀으로 젖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봉구는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머쓱한 듯 영실에게 물었다.
"니는 누구랑 살어?"
영실은 땅콩 껍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나? 언니랑 살제. 엄마랑 아빠는 다 돌아가셨응께. 근디 언니는 도시로 돈 벌러 가서 가끔 집에 와. 내가 집 지키는 거여."
봉구는 영실을 흘끗 쳐다보며 땅콩을 또 집어서 주었다.
"난... 아부지는 전쟁 나가서 돌아가셨고, 엄마랑 할머니랑 살어. 근디 엄마는 아프셔서 할머니랑 내가 챙겨야 해."
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은 땅콩을 내려다봤다.
"그럼 니도 혼자 컸구만. 나도 그래. 우리 아부지 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디, 엄마도 얼마 못 가 따라가셨어."
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각자 손에 쥔 땅콩을 바라보았다. 척박한 땅 속에서도 함께 자라나는 땅콩알처럼, 서로의 이야기는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봉구가 고개를 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니는 혼자서 다 해 먹고사는 거여?"
영실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글제. 혼자 사는 게 익숙혀졌지 뭐."
가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며 그들의 목소리를 멀리 실어갔다. 그 바람 속에는 서로를 향한 미묘한 공감과 이해가 조용히 스며 있었다. 봉구가 흙 묻은 손으로 삽을 짚으며 말했다.
"자, 다시 고랑을 잡아 가드라고잉."
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대를 정리했다. 둘은 말없이 삽질과 땅콩 캐는 일을 반복했다. 익숙한 손놀림과 부지런한 움직임이 이어지며, 고랑 속의 땅콩은 점점 포대 속으로 쌓여갔다.
그날 이후, 둘은 매년 수확철이 돌아오면 자연스레 짝이 되었다. 땅콩밭에서 함께 땀 흘리며 고랑을 파고 땅콩을 캐는 일은 그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을 쌓아갔다. 처음에는 일에만 집중하며 말없이 함께 움직였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년에도 내랑 같이 짝 할랑가?"
영실이 어느 날 작업을 마친 뒤 조심스레 물었다.
"뭐... 니가 먼저 말하믄 그리 헐 수도 있제."
봉구는 어색하게 대꾸하며 흙 묻은 삽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땅콩밭에서만 마주치는 사이였지만, 어쩐지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땅콩밭의 고랑 끝에서 일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들 속에서, 두 사람은 척박한 섬 생활 속에서도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듯했다.
해가 지날수록 그들의 만남은 땅콩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영실이 먼저 봉구를 만나러 서쪽 마을로 가는 길을 걸어갔다. 그녀의 발길은 점점 자연스러워졌고, 두 사람의 대화는 그만큼 익숙해졌다. 둘은 가난한 집안의 무게와 부모를 잃은 상실감을 나누며 마음속 깊은 곳을 열기 시작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며, 그들의 일상은 천천히 겹쳐졌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길에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보면 어른들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씩 건넸다.
"둘이 참 보기 좋다잉."
그럴 때마다 봉구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영실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봉구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창피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다니는 영실이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 마음은 그에게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서로 닮은 고단한 삶 속에서 나누는 작은 웃음과 따뜻한 말들은 그들의 관계를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