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tari
6장 구복식당
봉구는 영실을 데려다 주기 위해 호산마을 고샅길을 빠르게 걸었다. 늦가을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며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논둑의 벼를 흔들며 지나갔고, 들길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봉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따라오는 영실을 확인한 뒤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날이 더 빨리 어두워지네잉. 얼른 가야 쓰겄다.”
봉구는 작게 혼잣말을 하며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엔 조급함이 번졌다. 영실은 뒤에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니가 있응께 난 안 무섭다야.”
“그래도 혼자 갔다면 어땠겄냐. 다음부턴 너무 늦게까지는 말자.”
봉구는 발끝으로 작은 돌멩이를 툭 차며 말했다. 영실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농담처럼 대꾸했다.
“니는 항상 혼자 걱정만 허드라. 그래서 니가 좋은 거지만.”
봉구는 잠시 멈춰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오빠든 뭐든, 니한테 잘못되면 그게 다 내 책임 아니여,”
둘은 한동안 말없이 들길을 걸었다. 멀리서 대길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봉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니 도시서 있었던 얘기, 그때도 안 했는디 오늘은 좀 들려줄랑가? 거긴 우찌 했냐? 나는 도시라는 데를 한 번도 못 가봐서 궁금허당께."
영실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의 옆으로 조금 다가섰다. 어두운 길에서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흐릿해 보였다.
"나중에 얘기할랑께. 지금은... 생각허고 싶지 않어."
봉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제. 니가 할 때 허면 되제. 내가 괜히 말 꺼냈다잉."
영실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봉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대길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때, 봉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 와부렀어. 다음엔 내가 여기로 올 테니께, 니는 호산마을까지 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알었어. 그럼 다음번엔 그 뭍타리랑가 어디라드만, 거가 데려가주랑께. 니가 그렇게 자랑스레 말허던 그 곳 말이여."
봉구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사리에 물 빠질 때만 갈 수 있은께 날짜는 맞춰야 쓰겄다. 허지만 꼭 델꼬 갈랑께."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잔잔한 온기가 흩어져 있었다.
그날 밤, 영실은 오래전 미포에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향동시장 깊숙한 골목, '구복식당'이란 간판 아래서 보낸 그 시간들이 악몽처럼 스쳐 지나갔다.
"야, 이 더러운 것아! 그릇도 제대로 못 닦냐?"
김 여사의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날아온 주걱이 영실의 어깨를 때렸다. 주방 구석에서 그릇을 닦던 영실은 몸을 움츠렸다.
영실이 자매가 부모 줄초상을 치르고 며칠이 지났다. 밤이 깊어 마을은 고요했고, 방안에는 등불 하나가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는 영실이를 불러 앉혔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언니의 어깨가 달빛 아래 가늘게 떨렸다. 언니는 한참을 영실이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옷소매로 눈물을 닦기만 했다. 영실은 언니의 눈물 닦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마당가에 심어진 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실아..."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다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영실이를 바라보았다.
"인자, 언니가 도시로 나가야 쓰겄다잉. 우덜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겄냐."
영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떨리는 손으로 영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우리끼리 살아야 헌다... 니도 알제? 아부지, 어매가 가신거..."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흐려졌다. 언니의 말에 영실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지삼마을 아짐이 소개를 했는디, 미포라는 도시가 있그만. 거가 좋은 집이 있다헌께. 일도 배우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헌다잉."
언니는 영실의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가 자리 잡으면 꼭 델러갈티니께, 거서 짬만 있어보면 안되겄냐?"
영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영실이 도착한 곳은 향동시장 안쪽 골목에 위치한 '구복식당'이었다. 시골에서만 자란 어린애여서 이렇게 북쩍인 곳이 정신이 없었다. 영실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김 여사는 친절한 척하며 영실을 주방에 안내해 주었다. 주방의 기본적인 일부터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이 아둔헌 것아! 그륵도 제대로 못 닦냐? 눈깔이 비틀어졌냐?"
김 여사가 소리를 지르며 영실의 뒷통수를 세게 때렸다. 영실은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짐마... 학교는 언제..."
"머시? 학교? 허허! 니같은 것이 무신 학교여? 일이나 배우라고 데려왔는디!"
김 여사는 코웃음을 치며 영실을 밀쳐냈다.
"밥도 처먹을 만큼 처먹고, 잠도 자고... 거그서 뭘 더 바라는 거여?"
최 사장이 뒤에서 한숨을 쉬며 거들었다.
"돈은... 모아준다고 허셨는디..."
영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이고, 돈타령이구만. 내가 니 밥 멕이고 잠재우는 것만 해도 과헌 줄 모르냐?"
영실은 날마다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했다. 주방 구석에서 찬밥을 먹다가도 주인 목소리가 들리면 허겁지겁 일어나야 했다. 어느 날 새벽, 영실은 모든 걸 걸고 도망을 시도했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시장 골목을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귓가엔 자신의 숨소리만 울렸다. 그러나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붙잡혀 식당으로 끌려왔다.
"이 은헤도 모르는 것아! 이리 잘혀주는디도 도망갈라고 허냐?"
김 여사는 주방 바닥에 물을 들이붓고 영실을 무릎 꿇게 했다.
"아야야... 아퍼라..."
무릎이 얼얼해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물 속에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니가 우리헌티 은헤를 이러키 갚냐? 이런 지미진 년이 있단 말이여!"
김 여사의 기름때 묻은 걸레가 영실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열세살 소녀는 겁에 질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몸만 움츠릴 뿐이었다. 영실이 얼굴에서 기름 묻은 냄새와 찌든 음식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무서워 떨었다.
밤마다 좁은 방구석에 웅크려 울었다. "언니야... 언니야..." 속삭이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눈물은 이미 고갈된 듯 흐르지도 않았다.
"이년아! 설거지 안헐텨? 게드럭대지 말고 얼른 허랑께!"
김 여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면, 그녀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주방에서 그릇을 닦다 보면 손이 터져 피가 났고, 뜨거운 물에 데인 상처가 늘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미련한 것아! 접시를 깨면 어쩔 거냐!"
최 사장이 소리치며 손을 들어올렸을 때, 영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부지, 제발..."
"머시? 아부지라고? 이런 걸레 같은 년이! 누가 니 아부지여!"
시장에서조차 그녀의 편은 없었다.
"저 집서 밥 처먹고 잠자고도 모잘라서 쏙 빠질라고 허드만."
"거둬줘 봤자 은혜도 모른당께."
그러나 영실에게 가장 힘든 건 그리움이었다. 매일 밤 꿈에서 섬이 보였다. 언니가 보였다.
"언니야...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쓰까..."
그녀는 밤마다 중얼거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 틈 없는 일, 그리고 이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시장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영실은 마지막 결심을 했다. 가슴이 터질 듯 뛰고, 맨발로 담을 넘을 때 발바닥이 찢어지는 고통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골목길을 달리던 그녀는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듯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허름한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영실은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워매, 이게 뭔 일이여!"
혼자 사는 박씨 할머니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문 앞에 쓰러진 영실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할매... 살려주쑈..."
박씨 할머니는 문 앞에 쓰러진 영실을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가야, 어쩌다 이리 됐냐. 어여 들어와. 이러다 얼어 죽는다야."
할머니는 영실을 부축해 방 안으로 데려가 따뜻한 물을 데웠다. 찢어진 발바닥과 멍든 무릎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니 여기선 걱정 말어. 내가 니를 아무도 못 찾게 할 테니께. 일단 푹 쉬어라."
영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하지만 전 섬으로 돌아가야 해요. 여긴 오래 있을 수 없어라이..."
박씨 할머니는 영실의 어깨를 꼭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니가 이러고 돌아가봐야 쓰겄냐. 몸부터 챙기고 봐야지. 며칠만이라도 푹 쉬고, 나랑 상의하자잉."
며칠 동안 영실은 박씨 할머니의 집에서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할머니는 그녀를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옷 한 벌을 사 입혔다.
"니가 고생했다는 건 내가 다 안다. 이젠 걱정 말고 니 집으로 돌아가라."
할머니는 마지막 날, 영실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며 말했다.
"길에서 모난 일 없도록 기도할 테니께, 니 잘 살아야 한다잉. 다시는 이런 고생 안 하고."
영실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
버스에 올라탄 영실은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의 손길과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영실은 잊을 수 없었다.
언니는 이듬해 명절에 구복식당을 찾았다. 김 여사는 손님들 밥상을 치우며 능청스레 말했다.
"아이고, 그 아가... 우리가 이리 잘해줬는디도 은혜는 커녕 돈이랑 물건들 챙겨서 쏙 빠져부렀당께.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겄소."
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식당을 나와 미포항으로 달려갔다.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오는 두 시간이 한 세월 같았다. 파도 소리만 울리는 바다 위에서 언니는 자꾸만 최악의 상상을 했다. 대길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갔다. 마당 한켠에서 고개 숙여 앉아있는 영실이 보였다.
"영실아!"
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영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언니는 달려와 동생을 끌어안았다.
"언니야... 나 참말로 힘들었당께..."
영실은 언니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언니도 그녀를 안고 한참 동안 울었다. 영실은 언니의 품에 안긴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어둠이 언니의 손길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언니는 가만히 영실의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니 이제는 걱정 말어. 내가 니 옆에 있을 테니께.”
“응... 언니야, 나도 이제는 잘 버틸 수 있당께. 언니만 와주면 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마당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바람에 논둑의 마른 벼가 살랑거렸다. 별빛이 점점 밝아지는 밤하늘 아래, 두 자매의 침묵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안도의 시간이 되었다. 언니는 천천히 일어나 영실의 손을 잡았다.
"가자. 우리 밥이나 묵자. 니가 얼마나 배고팠을꼬..."
영실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나처럼 배고팠나?”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가져온 작은 보자기 속에는 몇 가지 반찬과 따뜻한 밥이 있었다. 그날 저녁, 두 자매는 오랜만에 같은 밥상 앞에 앉아 웃으며 밥을 먹었다. 밖에서는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어왔지만, 집 안의 등불은 따뜻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영실은 언니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혼자서도 헤쳐나갈 수 있당께. 언니만 곁에 있어준다면.'
그날 밤, 영실은 오랜만에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언니랑 섬 해안을 걷고 있었다. 발밑에 닿는 모래가 부드럽고, 바람은 따뜻하게 불어왔다. 달빛이 잔잔한 파도에 반사돼 반짝였고, 바다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했다.
언니 손을 꼭 잡은 채 걷던 영실이 고개를 들어 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야, 우리 이제는 이런 날들만 있었음 좋겄다잉.”
언니는 살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제. 니가 행복해야 내맘도 편허제”
멀리서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영실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귓가를 감쌌다. 그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영실의 마음 깊은 데서 올라온 희망 같았다. 마치 앞으로 올 좋은 날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는 걸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실은 꿈속에서도 언니와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렸던 고향 같은 따뜻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