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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Oct 01. 2016

우리가 강원도를 여행하는 법

어느 부부의 무박 2일 강원도 여행기 



북평 오일장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


<소읍 기행> 116페이지를 읽다가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다. 그녀는 분명 멈칫거렸다. 그런데, 애써 내 말을 못 들은 체한다. 아마도, 그냥 지나가는 말이려니 여긴 듯하다. 한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 말 줄임표가 떠다닌다. 본의 아니게 혼잣말을 하게 된 모양새가 돼 버렸다.


“우리 정말 북평 오일장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얘기했다.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다. 

“갑자기 북평 오일장은 왜?”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북평 오일장에 꼭 가야 하는 그럴싸한 이유가 튀어나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부지런한 뇌보다 버릇없는 혀가 먼저 반응한다.   

“북평 오일장이 강원도 최대의 재래시장이래.”  

그녀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이건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그게 전부야?” 

나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북평 오일장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단호한 나의 끄덕임에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 

“오랜만에 함께 밤 기차도 타고 싶기도 하고.”

그녀가 살짝 미소 짓는다. 


그날 밤,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를 2장 예매했다. 정해지고 계획된 것은 없다. 일단은 기차에 몸부터 싣고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때마침 내일은 북평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이었다.



“밤 기차 타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운을 뗀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고정한 채로 말이다. 유리창에 반사되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상기되어 있다.

“사실은 말이야. 나 밤 기차가 타고 싶었어. 버스 타고 가자고 했으면, 북평 오일장 안 갔을지도 몰라.”

그랬구나. 그래서 기차표를 예매할 때 그렇게 좋아했었구나. 재래시장에 대한 나의 집착 못지않게, 기차에 대한 그녀의 집착 또한 남다르다. 


낡은 기차 안, 곳곳에 숨어있는 낭만을 들추어 본다. 이 순간만큼은 낡아빠진 의자도 낭만이 된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차가운 밤공기도 낭만이 된다. 무심하게 켜져 있는 도심의 불빛도 낭만적이다. 그 무엇보다도 아직도 밤 기차의 낭만을 잊지 않고 있는 그녀가 가장 낭만적이다.


기차 안에서 급조된 우리의 여행 계획은 이랬다. 새벽녘에 동해역에 도착한다. 역에 내려서 남쪽으로 슬슬 걷는다. 해가 떠오른다. 멈춰 서서 해를 본다. 북평 오일장까지 걷는다. 시장 구경을 하고, 아침을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나서 어디를 갈지 다시 생각해 본다. 혹시라도 잠들면, 동해역에서 때맞춰 눈만 뜨면 된다. 필요한 주문은 그게 전부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동해역 앞이다. 정신을 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부리나케 내린다. 새벽 4시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 동해의 스산한 새벽 바닷바람이 쌀쌀맞게 따귀를 때린다. 옷깃을 한껏 여며 보지만, 바람이 더 차가운 바람을 데려온다. 동해 다운 씩씩한 인사다. 동해역에서 북평 오일장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 한 시간 정도 역에서 쉬었다가 나서기로 한다. 


만경대 가는 길에 맞이한 일출


역내에 앉아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일출을 봤는지 더듬어 본다. 우리가 함께했던 일출을 추억하기 시작한다. 시간을 거스르다 보니, 우리가 한 번도 동해에서 일출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우리는 생애 첫 동해 일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거다. 의미가 부여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멋진 일출을 볼 곳을 찾아야 한다. 생애 첫 동해 일출을 아무 데서나 맞이할 수는 없다. 가까운 곳에 멋진 일출을 볼만한 곳이 어딜까? 찾다 보니, 그곳이 바로 만경대라는 것을 알았다. 동해역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다. 

“해뜨기 전에 만경대까지 가야 해.”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부드럽게 나를 낚아챈다. 

“천천히 가자.”

“힘들어?”

“나는 해가 뜨는 것을 같이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거기가 만경대 이어도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어. 급하게 서두르다가 함께 걷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잃고 싶지는 않아.”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박자를 잃었다. 이건 우리 방식이 아니다. 퍼뜩 생각이 들자 속도를 줄이고, 이내 걸음을 멈췄다. 다시 우리만의 속도를 되찾았다. 


덕분에 우리는 결국 만경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만경대로 가는 도중에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상하고 바라던 일출은 아니었다. 좀 더 극적인 풍경을 상상했지만, 해가 구름 속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더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만경대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우리만의 소중한 일출 장소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라도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이제 우리는 연어처럼 이 장소로 되돌아올 것이다.


북평 오일장은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에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문을 연 가게가 몇 군데 있었지만, 아직 생생한 활기는 부족해 보였다. 타지의 낯선 여행객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열댓 마리의 강아지였다. 어떤 주인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모두 씩씩해 보인다. 동물 병원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건강함이 철창 안에 가득하다. 재롱을 구경하다 보니, 마른 손가락이 남아나질 않는다. 마리마다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그녀를 애써 만류한다. 이름 대신 서툰 위로를 전해 보기로 한다. 시장에서 시작해서, 시장에서 마감할지도 모를 삶이다.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연신 재롱을 떨어대지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서툰 동정심뿐이다.



시장 안을 걸어 본다. 눈앞에 코다리가 가득 걸린다. 오랫동안 오일장에 드나들었을 것 같은 부부가 코다리를 널고 있다. 코다리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밥 먹을만한 곳을 찾아 한 바퀴 둘러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너무 이른 시간에 시장에 온 탓일까? 기대했던 시장의 모습과는 달라서일까?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했던 걸까? 공원에 주저앉아서,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는 못난 남편으로 변신한다. 속 깊은 그녀는 다 큰 남편을 어르고 달랜다. 일단은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자면서, 다시 시장 안으로 이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곳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연 곳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부침개 기름 냄새가 온몸을 휘감는다. 서둘러 메밀전병과 메밀부침을 주문한다. 열기가 가득한 지금의 나에겐, 차가운 성질의 메밀이 딱 좋은 처방이다. 따뜻한 메밀전병을 입에 넣으니, 향이 울려 퍼진다. 입안 가득 메밀꽃이 피었다 진다. 심심하고 담백한 맛이다. 허기가 살짝 가시고 나니,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좀 전의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서, 그녀에게 용서를 빈다. 그녀는 메밀부침 한 젓가락으로 못난 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배가 든든해지니, 걸을 맛도 난다. 그런데, 시장은 아직도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지나가시는 분들에게 주변에 갈 만한 곳을 물어보니, 뜻밖에도 천곡동굴을 추천해주신다. 도시 한가운데에 동굴이라니? 듣는 순간,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르쳐 주시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위치를 물어보니, 버스로 삼십 분 거리다. 

“기분 전환도 할 겸 동굴이나 갔다 올까?” 

“그래! 다녀오면, 시장도 열려 있겠네.”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26-1 시영 3차 아파트 가동. 동굴 주소가 색다르다. 아파트를 지으려고 공사하던 중 발견된 동굴이어서, 붙은 주소다.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이런 시내에서 동굴이 발견된 것은. 시간의 흐름을 재구성해보면, 동굴 위에 도시가 건설되고, 한참 후에야 아파트가 지어진 것이 맞을 것이다. 지상에는 최신식 동굴인 아파트가 세워져 있고, 바로 아래 지하에는 태곳적 동굴이 들어서 있다. 정말 묘한 그림이다.


동굴에 막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몰려오는 서늘함에 잠시 멈칫거린다.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미지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우습게 생각한 동굴이었는데, 4-5억 년 전에 만들어진 천연 석회석 동굴이라는 소개 앞에 정신이 번쩍 든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시간 앞에서, 나도 모르게 겸손해진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천연 에어컨이 바로 아래 있으니까.”

내가 동굴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동굴의 효용성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마구마구 부러워진다.



동굴 안 조명 덕분에 동굴은 한껏 신비로워진다. 숨어있던 종유석과 석주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평범해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 생김새가 남다른 탓도 있지만, 무수히 많은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피아노상, 사천왕상, 마리아상, 이름을 붙여 놓은 것들도 있다. 

“자꾸 보다 보니까 마리아처럼 보이기도 해.” 

“이건 사천왕이랑 정말 닮았는데.” 


처음에는 재미있게 느껴지던 이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을 언짢게 만든다. 모처럼 만에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있는데, 이름이 자꾸 방해된다. 누군가가 붙여 놓은 이름들이 오히려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돌들이 살아남은 오래된 인고의 시간에 비한다면, 조악하고 모욕적인 작명이다. 사천왕상 앞에서 사천왕이 아닌 것을 보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의 모습이 애처롭게만 느껴진다. 한 번 각인된 이름을 지우는 것은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총길이 1.4km의 동굴을 순식간에 지났다. 어느새, 내 머릿속의 석수도 갑자기 한 뼘 자란 느낌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북평 오일장을 향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장의 활기찬 왁자지껄함이 밀려온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시장 구경 좀 해 볼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재래시장의 활력을 만끽한다. 

그녀가 국산 서리태 앞에서 한참을 살까 말까 고민을 한다. 

“콩밥 먹고 싶어서 그래? 먹고 싶으면 좀 살까?”

“아니, 갑자기 돌아가신 외할머니 모습이 떠올라서.” 

그녀는 콩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 콩을 파는 할머니를 보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한껏 외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도록 잠시 그녀를 놓아둔다.



흥이 난 그녀. 웬일로 이불가게 앞에 멈춰 선다. 사지도 않을 총천연색 베갯잇들을 이리저리 들춰본다. 모두 그녀의 취향과는 한참 동떨어진 베갯잇들이다. 모처럼 만에 만난 원색의 향연이 그리도 반가웠던 걸까? 강렬한 색상의 베갯잇들을 들추는 손이 신명 나 보인다. 



저 멀리 도장 파는 아저씨가 보인다. 아직도 손도장을 파시는 분이 계시는구나. 정겨움에 얼른 달려 가보니, 이런! 손도장이 아니다. 아저씨가 모니터 화면에 이름을 입력하니, 정교한 기계가 도장을 깎는다. 신기함도 잠시뿐이다. 최신식 도장 가게 아저씨가 이유 없이 얄미워진다.



시장 한가운데에서는 목청 돋우는 생선 장수가 왕이다. 옆에 서니,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우렁찬 목소리만큼 해산물도 못지않게 싱싱해 보인다. 

“한 마리 사갈까?” 

싱싱함에 홀린 그녀가 뜻밖의 권유를 한다.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지금 여기서 생선을 사면 어찌 들고 다니려고 그래?”

나의 핀잔이 정곡을 찔렀나 보다. 머쓱해진 그녀가 생선을 두고 미련 없이 일어선다.



입맛을 다시며, 다시 시장 안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다가 낯선 외국인 아저씨가 서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이런 재래시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가까이 가 보니, 생과일주스를 만들어 파신다. 주스 한잔 마시면서, 아저씨의 사연을 슬며시 물어본다. 영어가 서툰 한국 사람과 한국말이 서툰 외국 사람 사이에는 상상력만 모락모락 피어난다. 우리의 짧은 영어로는 아저씨의 정확한 사연을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사연은 뒤로 한 채,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겨본다. 



시장 구경은 이걸로 충분했다. 시끌벅적한 시장을 벗어나 정처 없이 걷는다. 멀리서부터 유독 눈에 띄는 하얀 건물 하나. 가까이 가 보니, 낡은 십자가 아래 선명한 빨간 간판이 걸려 있다. 십자가 옆에는 장로 교회라고 새겨져 있고, 빨간 간판에는 별표 국수공장이라고 적혀 있다. 교회인지, 국수공장인지 알 길이 없는 모양새다. 한때는 교회였던 곳에서 국수를 만드는 걸까? 국수도 만드는 교회인 걸까? 혹시, 국수를 만들다가 목사가 된 걸까? 사연이 궁금해 들어섰지만,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건물 안에는 마른국수 냄새만 가득하다. 


바다가 보고 싶어

그녀는 새벽녘에 바라본 바다로는 성이 차지 않았나 보다. 하기야 동해까지 왔는데, 바다도 안 보고 가면 많이 섭섭할 게다. 가까운 바다로 가려다, 늘 소문만 들었던 정동진역으로 방향을 고쳐 잡았다. 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다. 정동진역은 특별한 역이다. 바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역이다. 정동진역은 광화문에서 정동 쪽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하지만, 위도상으로는 광화문이 아니라 도봉산에서 정동 쪽에 위치한다고 한다. 오래전, 위도를 알기 전에는 정동 쪽이 맞았을 것이다. 모두 그렇게 믿었을 테니까 말이다. 때론, 믿음이 사실보다 강하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 안으로 들어선다. 역 안의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본다. 바다의 색은 바다의 것이 아니다. 하늘의 색은 하늘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다와 하늘은 하나다. 푸르름이 가득하다. 한껏 마음을 채우고 있는데, 눈치 없는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종일 먹은 거라곤 메밀부침과 메밀전병뿐이다.

“밥 먹으러 가자. 나 순두부 먹고 싶어.”

그녀의 빠른 대응에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진다. 무얼 먹을까 하는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순두부가 이미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좀 아쉽지?” 

순두부 정식을 먹으면서 조심스럽게 운을 띄워본다. 그녀는 대답 대신 해맑게 웃는다.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한 번 가볼까?”

그녀는 미술관이라는 단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삼삼하고 담백한 순두부 정식이 거의 비워질 무렵, 그 미술관이 하슬라 미술관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런데, 누가 깊은 산자락에 미술관을 세운 걸까? 도심의 미술관에 익숙해 있는 우리 부부에게 깊은 산중의 전시회는 난생처음이다.


인근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니 미술관까지 15분이 채 안 걸린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힘이 들 겨를이 없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독특한 모양새의 건물이 어서 오라고 연신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하슬라라는 단어는 당연히 영어에서 온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이름은 고구려 신라 시대부터 강릉을 부르던 이름이란다. 바다가 보이는 난간 앞에 서서 그녀에게 하슬라 이름의 유래를 알려준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하슬라, 하슬라, 하슬라 몇 번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나도 그녀를 따라 하슬라, 하슬라 불러본다. 부를수록 참 예쁜 이름이다.



미술관 입구 앞에 그려진 벽화가 우리에게 환영 인사를 건넨다. 동심이 가득 담긴 벽화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층계가 나선다. 층계마다 다른 색깔이 화음을 마음껏 뽐낸다. 계단에 오를 때마다 하늘로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다. 



숨 고를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조각상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묄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묘한 자세로 우리를 맞이한다. 오래전에는 저 비너스가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몸매도 언젠가는 저 비너스의 몸매처럼 여겨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녀는 묄렌도르프의 비너스 앞에서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서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비너스를 상대로 우월한 자신의 미를 뽐내느라 여념이 없다.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선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는 듯한 작품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끼가 조각을 감싸고, 넝쿨은 기꺼이 이들을 품는다. 조각을 만든 사람이 의도한 걸까? 아니면 관리가 안 되고 방치가 돼서 그런 걸까? 어쨌든, 조각과 이끼와 넝쿨의 묘한 조화가 인상적이다.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좀 많이 걸었나 보다. 그녀가 멀리서부터 보이는 의자를 향해 단숨에 다가간다. 그런데, 의자에 단숨에 앉지 못하고 있다. 의자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 가까이 가서 보니, 나 역시 막상 앉기가 불편하다. 의자는 분명 의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의자가 아니기도 했다. 예술가가 만든 의자에는 오래된 신문 기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앉지도 못한 채, 앞에 서서 한 참 동안 신문 기사를 읽는다. 기사 내용과 의자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의자에 단지 오래된 기사가 새겨져 있을 뿐인데, 엄청난 중압감이 몰려온다. 중압감을 간신히 억누른 채, 의자 위에 아주 살짝 엉덩이를 걸쳐본다. 그래도 앉으라고 만든 의자인데. 만든 사람도 그걸 바라지 않을까? 애써 자위해 보지만, 불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놀란 사람처럼 붙였던 궁둥이를 화들짝 들고 만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데 멀리서부터 고양이가 느긋하게 걸어온다. 모양새가 영락없이 터줏대감이다. 사람 손길에도 거부감이 없다. 고양이의 탈을 쓴 강아지다. 한껏 아양을 떨고 교감을 나누고 난 뒤, 새로운 손길을 찾아 나선다. 뭐 때문에 토라진 걸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우리가 먹을 게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 부부라는 것을 눈치챘나 보다. 통통거리는 발걸음으로 빠르게 우리 주변을 벗어난다. 먼발치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똑같은 아양을 부리고 있다. 녀석만의 생존 방식이다. 이해는 되지만, 야속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밖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여기저기에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마리오네트에서 사용하는 인형들이 사방에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표정이 너무 생동감 있어서 곧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얼굴이다. 신호만 보내면, 한바탕 춤이라도 출 듯하다. 우리를 골려주려고 한껏 숨을 참고 있는 것 같다. 구경하다가 화들짝 놀라 슬쩍 뒤돌아본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등장하는 인형이 나지막이 말을 걸어온다.


막차 버스 시간이 될 때까지 미술관 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부지런히 돌아다녔는데, 놓치고 지나친 것도 많았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에 또 오자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시원섭섭하다. 떠나 올 때의 설렘 못지않은 아쉬움이 가득하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그녀가 묻는다. 


다음에는 어디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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