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관성
백신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코로나가 주춤하면서 일은 더 많아졌다. 재택근무를 하던 우리를 클라이언트가 사무실로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달, 그다음에는 격주로, 결국은 매주 사우디로 출장을 가야 했다.
출장은 처음에는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사우디 리야드에서 우리 팀이 묵는 호텔은 인당 1박에 100만 원이 넘는 최고급이었다. 대리석 로비, 조식 뷔페, 운전기사 - 처음 누리는 그 모든 것을 갓 취직한 25살의 나는 마음껏 즐겼고, 그 화려함 속에서 나는 어린 내가 상상하던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사우디가 아닌 런던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런던 대학원생 시절의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심지어 면접을 망치고 회사 앞에서 넘어져서 바지가 찢어져버리는 와중에 비까지 내린 끝내주게 울고 싶었던 날조차도!)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내게 런던 음식은 테스코에서 산 냉동피자 혹은 프렛에서 구매한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출장으로 가게 된 런던은 1박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에디션 호텔에 묵을 것이냐, 랜드마크 호텔에 묵을 것이냐 하는 고민으로 시작되었고, 하루 20만 원의 출장비로 룸서비스를 누리는 사치를 의미했고, 비싸서 하루 한 잔 마시던 플랫화이트를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서너 잔씩 마시는 호사를 의미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아니 아무리 짧은 거리든 먼 거리든 택시를 부르는 것은 물론. 업무 마무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칵테일을 한 잔 하거나, 회식으로 인당 수 십만 원의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는, 처음 누리는 호화스러운 삶에 젖어서 나는 이 회사에서 뼈를 묻겠다는 생각으로 그저 감사하며 일했다.
그렇게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침 8시에 호텔을 나가서 클라이언트 오피스로 출근하고, 저녁 10시에 돌아와서 다시 노트북을 켰다. 밤 2시까지 슬라이드를 고치고, 다시 7시에 일어났다.
주말의 개념도 딱히 없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파트너에게서 알림이 왔다.
"일요일 오전 10시 클라이언트 미팅 확정"
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을 새우라는 것, 주말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는 것.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장했다.
" Sure, no problem"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말에 일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차피 계획이 없었던 척, 힘들지 않은 척 회의를 하고, 회의록을 정리하고, 엑셀을 고치고, 장표를 만들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나를 일에 갈아 넣는지는 명확했다. 승진을 위해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 더 빠르게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
덕분인지 나는 잘 풀렸다. 입사 후 2년 간 평가는 항상 최상위였고, 파트너들은 모두 나와 일하고 싶어 했다. 인기가 많아서 프로젝트 사이 텀도 없이 계속 스태핑 (프로젝트 투입)이 되었다. 동료들과 파트너들은 나를 신뢰했고, 클라이언트들은 내 이름을 기억했다.
입사 2년 후 승진이 확정되었다. 동기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였다. 연봉이 두 배가 되었다. 모든 게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승진 확정을 전달받은 하루 종일 손에서 땀이 났다.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이 회사에서 내가 제일 잘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나의 일에 대한 열정을 회사가 알아준 것 같아서 행복했다. 엄청난 성취감이었다 - 마치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한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한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의 내면은 그 중학생 그 모습에서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공허해졌다. 승진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내 앞이 텅 빈 것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달려온 사람이 결승선을 지나는 순간, "이제 뭐 하지?"라고 묻는 것처럼. 그다음 승진을 위해 다시 2년 동안 달려야 하는 건가? 지난 2년 간 일을 최우선으로 놓고 살았는데 고작 일주일의 기쁨 이후 다시 원점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다음 승진을 위해 또다시 2년을 달리기엔 그 시간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이미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한 번 더 똑같은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울 수 있을까?
그러나 목표가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당장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가. 나는 또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나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 했다. 내가 가치 있게 여겨지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다시 목표를 만들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
여러분은 "멈추면 뒤처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