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구해주세요
쪼그만 게 어찌나 야무진지 그어진 선 밖으로 조금이라도 새어나가는 선 하나 없이 쓱쓱 색을 잘도 칠한다. 지지 않으려고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칠하고 있으면 시선이 느껴지는데 나를 향하지는 않았고 앞에 앉은 준이에게 향했다. 평소에는 씩씩함으로 아들을 키우면서 준이와 마주 보지 않을 때는 가끔 이렇게 애틋한 시선을 보낼 때가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들키면 애틋함은 감추고,
“숙제는 없어?”
"응. 없어. 아까 쉬는 시간에 미리 다 했어."
금세 보통의 엄마로 돌아왔다.
01 구해주세요
"준아 근데 왜 이모는 없어?"
"있는데? 이모 이건데?"
하며 짧은 손가락이 가리킨 건 설마 나는 아니겠지, 했던 웬 대머리였다. 이게 나라고? 왜 이모는 머리카락이 없어? 서운한 마음에 말끝이 늘어진다.
"이거 머리카락이야 이모. 이모 머리카락 살색이잖아."
대머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살색이 귀밑까지 내려온 단발머리였다. 냉장고 옆에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서있던 유월이 기어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누가 지 엄마 아들 아니랄까봐 디테일이 살아있다. 어린애가 보는 눈이 있어서 나름 정확하게 그린 걸 아니라고 고쳐달라고 할 수도 없고 머리나 한번 쓰다듬어줬다.
"연예인이야?"
유월이 그렇게 물어보면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머리를 한 번 만지게도 되고.
"부모님은 아셔?"
"…모를걸?"
"머리 안 아프냐? 그런 머리 하면 두피 화상 입는 거 같다고 하던데."
다행히 화상까지는 아니지만 고생을 좀 하긴 했다. 근데 진짜 별론가?
꼭 담임하고 면담 같네. '너 이러는 거 부모님은 아시니?' 학생 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이제 와서 들으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아무래도 유월은 나를 준이 친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꾸 엄마의 눈으로 나를 본다.
"잘 어울려. 잘 어울려서 할 말은 없는데,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냥-"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어서,라는 뒷 말은 그냥 하지 않았다. 내가 내 머리색 좀 바꾼다는데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
"이거나 마셔. 꼭 네 머리색 같다 야."
탁, 하니 준이랑 내 앞에 주스잔을 놓아줘서 유리잔을 코 앞에 갖다 대자 복숭아 냄새가 났다.
저게 나 놀리나? 맞지, 놀리는 거?
"나 안 먹어! 이거 복숭아 잖아."
준이는 양손으로 컵을 쥐고 꼴깍꼴깍 마셨고, 유월은 웃고 있는지 뒤돌아도 보이는 올라간 광대와 어깨가 흔들리는 게 보인다. 다 봤어, 쟤가 나 복숭아 알러지 있는 거를 모를 리가 없다. 저거 일부러 그런 거다.
"가게는 어떡하고 근데 여기 와있어? 장사 안 해?"
"문 닫고 왔지. 장사는.. 필요하면 손님이 연락하겠지 뭐."
"안 망하는 게 용하다."
어깨를 으쓱하니 얘기를 듣고 있으면 새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바꿔주고 복숭아 주스는 자기가 마셨다.
거창하게 말해 셀렉숍이고, 사실은 어디 진득하게 정착하지 못하는 내가 나돌 수 있는 명분 삼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떼돈을 버는 건 아니고 그냥 먹고 살 만큼 딱 그 정도에 알맞은 일인데 이제 일 년 반이 좀 넘었다. 마음에 들어서 나 보기 좋으라고 모은 것들을 빼면 간판도 없이 작은 공간에 가게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 팔기 위한 물건은 많지 않았다. '구해주세요' 같은 거랄까. 진열해 놓은 물건을 파는 건 아니고 구하기 어려운 제품들을 구해주는데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적성과 잘 맞아떨어진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아빠는 나를 아끼긴 하지만 이런 말을 했었다.
'기껏 비싼 돈 들여서 유학까지 보내놨더니만 보따리 장사하네. 우리 애물단지.'
애물단지 앞에 '우리'를 붙였으니까 아빠가 나를 아낀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간다. 나오지 마~"
"왜 좀 더 있다가 준이랑 저녁 먹고 가지."
현관 앞에서 탁탁 신발을 신고 내려둔 가방을 매면 유월이 준이랑 따라나왔다. 준이는 한 손에 하나씩 색연필을 들고 나왔는데 내가 갈 줄 몰랐나 보다.
"이모 내가 이모 머리 살색으로 칠해서 가는거야? 다시 칠해줄까?"
신생아는 너무 아기라 무서운데 가끔 딱 준이 정도 되는 아이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가끔 어쩌다. 유월만큼의 씩씩한 사람은 아니라.
"근데 살색 맞는데. 살구색이랑 똑같은데."
작은 손이 야무진 준이는 아이답지 않게 상대를 헤아리는 배려심이 있지만, 아이답게 거짓말은 할 줄 모른다.
"준이 그림 때문 아니고 이모 일 있어서 가는 거야."
"손님 온대?"
"아니 물건 받으러. 오늘 온댔는데 사인해야 되는 거라 지금 가면 시간 맞을 거 같아."
"그래 조심히 가고."
모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밖으로 나오면 일곱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날이 환했다. 보자, 여기서 버스 타면 몇 정거장 안되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버스에 사람들이 너무 많을 거 같고, 저녁이라 한낮의 더위는 한풀 꺾였으니 좀 걸을까. 걷다 더우면 시원한 거 하나 마시면 되겠지.
가다가 뭐하나 마셔야지 하던 생각과는 다르게 걷다 보니 한 눈 팔지 않고 가게로 곧장 왔다. 어렸을 때 심부름을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부지런히 와서 그런지 저녁이라 한낮의 더위는 아니라고 해도 땀이 살짝 났는데 땀 흘린 보람은 있게 가게에 오고 얼마 후 물건이 도착했다. 사실 나는 옷이나 신발, 시계와 같이 작은 것을 다루고, 이런 가구나 소품처럼 부피가 좀 나가는 것들은 받지 않는데 종종 단골손님의 부탁은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구 덕에 먹고사는데 해드려야죠.
물건도 받았고 일단 급한 건 아니니까 동생한테 연락해서 저녁으로 냉면 한 그릇 먹고 들어가야겠다. 아이스커피 한잔 마시지 않고 20분을 넘게 걸어왔더니 갈증이 난다.
[저녁 먹고 들어가자]
[저녁 안 먹었어?]
[넌 먹었어?]
[아니?]
[냉면?]
[콜~]
남매의 대화는 주어 목적어 동사가 뚜렷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근데 나 지금 후배랑 있는데 같이 가도 되나?]
[많이 먹어?]
[누나보다 안 먹어]
마지막 톡이 왠지 거슬리지만 오케이, 고기도 아니고 냉면 쯤이야.
[ㅇㅋ]
에어컨을 끄고, 열린 창문은 없는지 확인하고 가게 안을 대충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가게 안을 쓰윽 둘러봤다. 음, 됐어. 냉면~ 냉면~ 아이코 덥다 냉면 먹으러 가자 노래를 부르며 문을 잠갔다.
내 동생이 미대가 아니라 체대였나? 후배라고 소개한 녀석의 키가 훌쩍 큰 게 암만 봐도 나보다 덜먹게 생기진 않았다. 이거 냉면 한 그릇만 사주려고 했는데 이러다 고기까지 굽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후배가 눈치는 있는지 싹싹하게 휴지 한 장씩을 밑에 깔고 수저를 놓았다.
"후배라기보단 제자 같은거지."
같잖게 근엄한 척을 하며 옆에 있는 후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을 반찬으로 나온 냉면 김치 하나를 오독오독 씹으며 보고 있으면 후배는 그 옆에서 참하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얘 밑에서 일해요. 말만 미술감독이지 너무 믿지 마요."
"지웅아 이 형이 현장에서 얼마나 카리스마가 넘치는지 네가 대신 말 좀 해줘라."
"난 아직도 네가 미대 나와서 미술 감독한다는 게 안 믿긴다. 어렸을 때 그림 못 그린다고 한소리 듣고 질질 짜면서 집에 왔던 게 무슨.."
"잘해주세요 형이. 실력도 좋으시고."
몇 마디를 하고 수줍게 또 웃는다. 거참 덩치에 안 맞게 친구가 볼수록 참하네.
'냉면 나왔습니다' 하고 각자의 자리에 냉면이 놓아지면 그다음부터는 누구 하나 입 여는 것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냉면이다, 먹자! 오늘 하루 시원한 냉면이 그리운 날이었으니까.
냉면집에서 결국 만두도 추가해서 천원 부족한 6만 원을 내게 만들더니 사기꾼 같은 미술감독은 지금 내 앞에서 치킨을 야무지게 뜯고 있다. 네가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기어이 10만 원 채울 셈이니? 쟤는 돈 벌어서 다 어디에 쓰고 맨날 보따리장수인 나를 벗겨먹는지 모르겠다. 치킨까지는 도저히 안 먹혀서 턱을 괴고 맥주를 마시다 후배와 눈이 마주쳤는데 금방 피할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선이 이어졌다. 취했나?
"아 맥주는 다 좋은데 배가 불러.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배부르면 그만 먹으면 되지, 이 돼지 같은 동생아.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우자 순간 둘만 남은 게 약간 어색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 다섯이요."
할 말도 없으면서 괜히 어색한 게 싫어서 나이를 물었더니 들려온 대답이 스물 다섯.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놀라긴 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티를 내면 나이 많은 게 더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어느 때 나이를 느끼냐면, 내 나이 보다 상대의 나이가 어릴 때 그 차를 느끼면 내가 나이가 많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럼 아직 학생?"
"네. 올해 마치면 졸업해요."
스물다섯이라고 듣고 보니 또 스물다섯처럼 보인다. 그 나이의 싱그러움, 건강함, 에너지 이런 것들이.
"누나는요?"
"나는 승우보다 한 살 많아요. 서른 셋."
참한 후배보다는 8살 많고.
"그렇게 안보이세요."
그런 예의바른 말은 이제 들어도 기쁘지도 않고 감흥도 없지만 인사니까 받아둬야지.
"머리 때문에 그런가? 고마워요."
"진짜예요."
인사치레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진심을 호소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길래 그냥 한 번 더 빙긋 웃었다. 맥주가 3분의 1 정도 줄었을 때 자리에 돌아온 승우가 한 잔을 더 시키고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잠깐잠깐 머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치가 빨라서 굳이 옆을 보지 않아도 귀신같이 이런 거를 잘 아는데 그래서 의식되면 더 안 쳐다본다. 시선이 부딪히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달까. 하지만 셋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한 명만 계속 보고 있고 다른 하나를 안 볼 수는 없어서 살짝 바라보면 똑바로 마주 봐 온다. 동생은 뭐라 뭐라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현장 얘기를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마냥 참한 것 같지만은 않은 후배는 맥주잔 너머로 시선은 나를 보고 있고. 요즘 애들은 저런가. 사람 난감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아이참 냉면 괜히 사줬나.
내가 앞자리가 2만 됐어도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았겠지만-오히려 즐겼겠지만- 그러기엔 이제 늙으면서 심장도 같이 줄어들어서 네가 그러면 고개를 돌릴 수가 없게 목에 담이 온단다. 안주로 놓인 뻥튀기를 집으며 시선 방향을 자연스레 바꿔 폰을 보면 오늘 도착한 물건의 주인에게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아직인가요?]
오늘 도착했다고 언제 찾으러 오실 수 있냐고 물었더니 답장이 없다. 고개를 들자니 난감하고 고개를 숙여 화면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난다. 승우야 누나가 이렇게 힘들 게 버는 돈이야. 그만 먹어 좀. 집에 가자.
구해주세요 나도, 이 말은 오늘도 속으로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