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날씨 맑음, 현재 기온은 21도이며 최고 기온은 27도입니다.
일출 05:17, 일몰 19:40
비 올 확률 20%, 습도 76%
siri가 알려주는 오늘의 날씨.
요즘 날씨로 말하자면 완전한 여름이라 부르기엔 멀었고, 초여름이라 하자니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고, 그렇다고 봄은 아닌 것 같고 무엇하나 이거다 싶은 이름은 없는 애매한 계절이다. 딱히 더위에 지쳐 아이스크림이 필요한 날씨라곤 볼 수 없는데 어렸을 때도 즐기지 않던 아이스크림이 요즘 왜 이렇게 땡기는지 모르겠다.
<아이스크림이 필요한 이유>
- 그래가지구 옆 집 아줌마가 우리 집 담장 뒤편 나무까지 다 정리해줬지 뭐야.
"아줌마 감사하네. 보면 은근히 잘 챙겨주셔. 무뚝뚝해 보이시는데"
- 맞어, 처음에는 데면데면했는데. 내일 마트 가서 과일이라도 사서 갖다 드리려고.
"엄마 이사 간다고 하면 아줌마 섭섭하시겠네. 그렇게 지내다가"
여름이 다가오면 엄마는 부쩍 바빠진다. 엄마들이 한 번씩은 꿈꾼다는 마당 딸린 전원생활을 위해 몇 년 전 근교 소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췄지만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엄마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고난의 연속이랄까. 매년 꽃이며, 나무며 심었지만 도시 촌놈들을 알아본 것인지 처음에는 반은 시들어 죽는 게 일쑤였고, 눈감았다 뜨면 정글 숲처럼 자라나는 잔디를 깎느라 엄마는 물리치료를 달고 살았다.
"테니스 치시나요?"
"아니요, 선생님."
"허허, 엘보가 나가셨길래 테니스 하시나 했네요"
어찌나 열의를 불태웠는지 한의원 의사 선생님께서는 테니스 치시는 줄 알았다며 농을 건네기도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가오는 여름에 점점 무성 해지는 잔디를 정리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는지 옆집 아주머니께서 도와주셨다며 엄마와 통화를 잠시 했다.
- 아이스크림은 샀고?
"응, 샀어. 이상하게 요즘 아이스크림이 왜 이렇게 먹고 싶은지 몰라. 그것도 퍼먹는 거."
뉴스 속 이야기나 문득문득 찾아오는 심심한 일상이 아이스크림 없이 보내긴 무맛이다. 어우, 맛없어는 아니고 그냥 아무 맛도 없다. 너무 꽝 얼어서 숟가락도 제대로 꽂히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푸기 위해 힘을 주다 새빨개진 검지 손가락 마디가 안타까워 잠시 창틀 위에 올려놨다. 자, 너에게 10분을 줄 테니 어서 녹아라. 마음이 넓은 척하고 폰의 잠금화면을 풀었다. 요즘은 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다 보니 어느 날은 노트북은 한 번도 켜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6인치의 노예 같으니. 누구한테 연락을 해볼까 하고 메신저의 최근 대화 리스트를 보는데 뭐가 많긴 한데 쉽게 손이 옮겨지는 상대가 없다. 주어진 10분간 너무 진지한 얘기는 빠져나오기 무겁고, 그렇다고 너무 잡담은 껴서 얘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눈팅이 나을 것 같고. 이럴 때 탁,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니 흑흑.
TV는 안 본 지가 오래돼서 요즘 뭐가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유튜브가 제격이지. 이미 종연한 지 오래된 무한도전을 오분으로 편집한 영상을 두 개 보면 시간이 딱 맞을 거 같다. 으하하 왜 저래~ 하며 웃음이 나는 장면도 있고, 그때는 엄청 재밌게 본 거 같은데 지금은 이게 왜 그렇게 웃겼지 싶은 것도 있는 거다.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파릇파릇한 새싹은 아닌, 적당히 남들 먹는 만큼 먹고 있는 나이인데 뭐 그렇게 철 지난 것들이 좋은지 모르겠다. 특별히 못 잊는 것도 없고 돌아가고 싶어 미칠 거 같은 후회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미 때 지난 것들이 좋았다. 이제는 종연한 쇼 프로와 DJ가 여러 번 바뀐 라디오, 읽을 때마다 새롭다기보다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제는 감흥도 없는 소설이나 영화가 그랬다.
심심한 날, 친구가 필요한 날, 쉽게 잠들 수 없는 어느 밤과 정적이 싫은 공간이 나를 과거로 이끌고 과거를 내 앞에 불러냈다. 그럼 정적은 사라지고 잠에 빠지기 알맞은 편안함이 찾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늘 고르는 메뉴의 익숙함은 편안함을 준다. 대신 새로움과는 한번 더 거리를 두게 된다. 신선함을 원하면서도 우리가 그 메뉴를 다시 한번 고르는 건 익숙해서, 그 익숙함이면 실패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맛일지 궁금한 신메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언제나의 메뉴를 주문하게 하는 거다.
어디 녹았나 볼까. 올려둔 아이스크림 통을 잡으니 살짝 들어가는 게 먹기 적당하게 녹은 거 같다.
이제 공격을 시작해야겠군. 아까 손가락을 붉어지게 한 티스푼은 싱크대에 버려두고 아빠 숟가락을 가져와 대범하게 쿡, 적진의 한가운데를 찔렀다. 힘없이 쑤욱 들어가는 게 상대가 전의를 상실한 것 같다. 그래, 네 까짓게 아무리 차가워 봤자지. 아이스크림을 머리가 쨍할 정도로 한 숟가락 크게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해 입을 틀어막게 되더라도 뱉지 않는다.
스트레스 받았을 때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는 이유가 한 스푼의 크림이 목구멍을 스쳐 내려가며 차가운 단맛으로 뜨거움을 씻어내면 다시 온순해지기 때문일까? 속이 얼얼해지며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게 해서 뱉어지는 한숨이 그 날의 화를 잊게 하는건가?
50% 세일에 익숙해진 아이스크림을 제값 주고 사기 아까워하던 내가 냉동실에 한 통씩은 쟁여 두고, 기분에 따라 그릇에 덜어 먹거나 통째로 껴안고 먹으면서 순간의 짜릿한 고통에 입을 틀어막는다. 혹시 그걸 즐기나? 아냐, 그렇게 변태스러운 취향일 리 없어. 그냥,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