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를 이겨낸다는 것

by 므와


하얀 것이 두려웠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백색 공포였다.

여백을 채워나간다는 게 부담을 넘어 두려움으로 바뀐 것은 순간이었다. 예술가도 아닌 주제에 무슨 백색 공포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채워야 할 여백이 도화지나 원고지뿐 만이 아니지 않나.

어린이는 스케치북을, 학생은 시험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지긋한 자소서며 결재 서류나 기획안 역시 채워야 할 여백이고, 아침마다 공들이는 화장도, 이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한 머릿속도 새하얀 것은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 한 달 정도 되는 밀린 여름방학 일기를 쓰는 게 나의 백색공포의 시작이었다면 공포를 거듭한다고 해서 무섭지 않다거나 무덤덤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용기 있는 어린이야! 라기에 은근 쫄보인 꼬맹이였고, 이제는 일기를 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자소서도 쓰지 않지만, 머리와 가슴은 부유하는 먼지가 폴폴 날릴 정도니 외치면 노래방 에코가 되어 돌아올 만큼 비어있는 순간도 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채우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외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려는 건지, 꼭 해야 되는 게 아니라면 여백을 그대로 비워둔 상태로 방치했다.


오늘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일 꼭 할 필요도 없으니까~ 이런 마음이었겠지.


방황은 아닌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생각이 많다고 길어진다고 해서 바른 선택을 하는 게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만 많아지고, 먹는 나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쓸데없이 어른의 모습으로 살려고 애쓴 순간부터, 이해하는 척 괜찮은 척하는 순간부터 길들여진 여백이 점차 늘어났다.


여백을 꼭 채워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대로 비워둔 여백의 미가 더 이상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순간 의무감이 다시 생겨났다.


공허하진 않은데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해.


입는 옷은 무채색이 좋아도 내 삶이 무채색인 건 싫다. 총천연색까지는 아니더라도 꼭 무지갯빛, 장밋빛은 아니라더라도 원하는 색을 이것저것 다 칠해보고 싶다. 그게 내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다.

백색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두려움을 자극하는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모니터 앞에 깜빡이는 커서를 띄웠다.


하루는 그냥 보냈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옮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무엇을 써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간단할 줄 알았니 쉬울 줄 알았어? 만만하게 본거지.'



그동안 외면한 여백들이 비웃었다.

픽션이 현실을 반영하듯 나의 글 역시 나의 일상을 반영하는데, 고민하고 상처 받는 게 싫어서, 내 삶의 여백을 너무 많이 만들어 버렸더니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들어가면서 늘어나는 건 뻔뻔함인 지 그런 나를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없어? 소재가? 그럼 만들면 되지. 창문을 열어놓고 누워있다가 친구에게 날씨를 캡처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콜?]





그렇게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자 왠지 기분이 좋았다. 뭔가 당장 쓰고 싶어 졌다. 물을 한잔 마시기 전에 노트북 전원부터 켜고, 다 마시고 나니 적절하게 노트북은 부팅이 되어 있었다. 창을 켜고 순식간에 써 내려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창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건, 거울 앞이 아니어도 나를 곧게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잘난 나인지, 못난 나인지는 몰라도 일단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기며 마음이 옮겨지는 순간 그런 나를 되돌아보게 되고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남 보듯 하는 객관적 시선이 됐건, 철저히 주관적인 시선이 됐든 간에.


오랜만에 마주한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아닌가 이렇게 변한 건가.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반갑다. 어색하지만, 안녕? 하고 말을 건 기분이랄까.

잠들기 위해 손에 살짝 쥔 이불,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마치 아기의 첫걸음을 지켜본 것도 같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함마저 든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도 다시 일기를 써보았으면.

길들여진 하루에 고단했던 당신, 오늘 밤엔 예쁜 꿈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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