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제작피디로 살아남기 : <은중과 상연>을 보고 살아남기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은중과 상연>을 감상했다.
내 주변 여자사람친구들은 모두 한 번씩 보고 감동해 마지않았다는 드라마라길래,
(특히 업계 종사하는 남자 피디도 봤지만, '여자 피디'들은 무조건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번 시간 내서 정주행을 했다.
극 중 은중과 상연은 30대 초에 영화 피디로 나온다.
은중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촬영이 픽스되자,
감독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시나리오의 방향을 정하고,
촬영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어떻게 촬영할지에 대해 카메라 감독과도 상의한다.
의상과 미술 회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촬영 전에는 미술과 의상에 대해도 분명 디테일하게 논의했던 회의가 있었을 것이다.
촬영 장소를 답사하기 위해 지방으로 종합헌팅을 가는 장면도 있었는데,
다인원이 한 번에 장소를 둘러보고 장소를 픽스해 가는 과정도 필수적이다.
극 중 김상학 촬감이 남들 다 쉴 때 그림 보겠다고 헌팅 장소를 사전에 고지도 없이 몰래 갔다가,
시큐리티가 떠서 제작부에 연락이 오고, 그 바람에 은중이가 김상학 촬감을 데리러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렇게 디테일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은중이가 하는 역할 = 나'다 보니 너무 남일 같지 않아서다..)
원래 모든 사전답사는 장소담당자와 팀 연락책의 소통 및 허가 이후 출입하는 게 원칙이다.
왜냐면,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지는 건 나니까.
(이 장면을 친한 영화 피디에게 한 번 설명해 줬는데,
영화 피디 역시 크게 대노했다고 한다. "아니 거길 왜 허락 없이 들어간데?!!")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크랭크인이 되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는 듯했으나,
갑작스러운 주연배우와의 갈등으로 배우가 촬감 하차를 요구하게 된다.
그 장면은 무조건 극성이 가미된 과장된 이야기다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공감하다 못해 가슴 아팠던 장면은,
배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상연이가 병실에서 무릎을 꿇었던 장면이다.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냐고.
물론 피디가 배우 앞에서 직접적으로 무릎을 꿇을 일은 잘 없다.
그렇다.
피디의 무릎은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테무보다도 더 값싼 무릎이다.
왜냐면 일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때론 자존심도 내갖다 버려야 하는 게 피디이니까.
<은중과 상연>에서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보는 부분은,
바로 은중이와 상연이의 패션이다.
은중이와 상연이가 일한 당시는 2010년대 초중반 정도라고 보는데,
그때만 해도 현장과 회사에 멋들어지게 입고 오는 피디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프리하고 캐주얼하게 입는 게 다반사이며,
영화건 드라마건 피디들의 '특권' 중 하나는, 옷을 캐주얼하고 자유롭게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특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 )
하지만 은중이와 상연은 꽤 잘 꾸민 피디다!
상연이도 마찬가지지만, 은중이 역시 캐주얼해 보이지만 저렇게 꾸미고 다니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장을 캐주얼하다 못해 자칫 거지꼴로 다닌 나에게,
은중과 상연의 의상은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은중과 상연>에서 가장 공감 갔던 건,
은중이가 보인, 영화에 대한 집념과 열정, 그리고 사랑이다.
상연이와 공동 메인 피디를 하는 와중에도,
은중은 자기가 같이 작업했던 신인 감독을 끝까지 챙긴다.
못해먹겠어서 퇴사하고서 만난 신인 감독에게 회사에 절대 지지 말라고 꿀팁까지 전수한다.
그마저 신인감독이 은중이를 배신한 꼴이 되긴 했지만,
은중은 그래도 결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끌고 가겠다는 책임감과 사랑,
은중이에게서 발견한 '영화에 대한 태도'는 나뿐만 아니라,
현역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피디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리라.
은중은 40대 초에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되었고,
상연은 40대 초에 성공한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두 명이 보여준 자기 분야에 대한 열정은
나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피디들을 울리고 또 공감가게 했다.
그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살아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