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뜰 May 07. 2023

런던에 가면 꼭 기억하세요. 날씨에 지지 마세요.

1000만 원 여행에서 배우고 느낀 게 있다면요



“여기 맞나?? 들어가면 되는 거야?”

“글쎄? 앞사람들 따라가 보자.”


비즈니스클래스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초행길이라 머뭇거리는 우리들. 체크인하는 곳이 따로 있다고 블로그에서 찾아보고 걸음을 옮기는 찰나, “여기가 맞나?” “지금 열렸나?” 확신하지 못한 채로 우리는 홀린 듯 앞사람들을 따라 긴 줄을 서지 않고 엉겁결에 체크인을 마쳤다.


우와. 엄청 프라이빗하다.


사실 내가 비즈니스를 끊어야만 했던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허리디스크라서 누워야 해서. 누워야만 하니까.


이 말인즉슨 비행기의 풀플랫 좌석 말고는 비즈니스클래스의 서비스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이곳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온한 공항

여행을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하게 시작할 수 있다니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차원으로 접속하는 것 같았다. 면세점을 둘러보는 사람들, 커피숍에서 이야기 나누는 가족들. 기대에 찬 목소리들이 웅웅 거리며 여행 bgm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사이, 비즈니스 라운지의 세상은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한몫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은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고요하고 조용한 세계였다.


뷔페를 이용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고 나는 라테 한 잔, 남편은 위스키 한 잔을 가져와 창가로 난 독립된 소파에 앉아 떠나고 떠나온 비행기들을 봤다.


그리곤 가방에 넣어 온 책을 읽었고 갑자기 뮤트 된 공간 속에서 시작하는 여행에 대한 짤막한 감상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돈으로 편안함만 산 줄 알았는데 다른 시간과 공간까지 살 수 있었다“라고.


또한

“이건 돈의 가치를 충분히 경험한 일”이라고도.



여행의 묘미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데서 오는 감동이라더니, 촌스럽게도 라운지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곧 떠나야 할 시간 앞에서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혼자 한국 여행을 온 백발의 유럽 할머니도 와인 한 잔과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비행기를 바라보는 순간이 이뤄지는 공간.


떠나지 않아도 떠나온 기분을 마음껏 느꼈던.

정말 짐작하지 못했던 여행의 시작이었다.






런던여행을 가기 전, 1000만 원을 들여서 떠날 용기를 낸 일을 브런치에 적었다. 감사하게도 그 글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켰을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꽤 행복한 기분이었다.


오늘 적을 글은, 바로 1000만 원의 여행 그 이후의 이야기다. 아니, 조금 더 보태자면 런던에서 보낸 날들의 조금 더 뚜렷한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1000만 원이라고 칭했지만 실은 더 많은 돈을 썼고 ^^;; 시간을 잘못 계산해 실상 런던에 머무른 날은 토요일부터 금요일 오후까지였으니 생각 외의 하루를 더 보낸 셈이 되었다.


꽁으로 얻은 이 하루는 온전히 맑은 날씨의 단 하루 여행을 선사해 주었고 그 외의 날들, 우리는 런던에 머무른 5일 내내 비와의 밀당을 견뎌내야 했으니 생각지도 못하게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해준 셈이었다.



사실 런던은 워낙 비가 많이 오는 도시다. 1분 사이에 폭우가 내렸다가 또 해가 쨍하니 비추는 도시이기 때문에 비가 내렸다, 개었다를 반복해도 날씨에 대한 염려는 크게 하지 않았다. 비 오면 맞고, 개면 또 돌아다니면 된다는 생각에 우산도 챙기는 둥 마는 둥, 우비는 더더욱 챙길 생각도 안 했는데 살면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날씨를 검색해 본 날들이 다 런던의 호텔방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비 올 확률이 70%네. 야경투어 취소해야겠지?"

"거기서 연락 주지 않을까? 투어취소되면 뭐 하지?"



우리는 도시를 더욱 꼼꼼히 둘러보기 위해 야경투어를 신청했는데 결국 날씨 때문에 취소당했고 낮에 이뤄지는 시티투어도 우산을 접었다 펴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아 코를 훌쩍거리며 돌아다녀야 했다. 정말이지 4월의 런던은 추위와 비가 떨어지지 않는 계절, 목도리와 마스크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기모까지 꼭 챙겨 입고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행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날씨는 여행에서 꽤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좋은 나라여도 매일 비가 오고 구름 낀 하늘만 계속 본다면 어느 누구도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다. 딱 우리가 그랬으니까. 용기 있게 떠나온 이국의 세상에서 오랜만에 하는 영어의 부담감과 추위로 덜덜 떠는 몸, 완벽하게 적응되지 않은 시차에서 오는 피로를 제대로 떨치지 못한 채 여행지에서 점점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돈을 얼마나 들여서 온 건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걷고, 하나라도 더 해야 해!



런던이란 도시는 크지 않지만 가볼 곳은 꽤 많다. 박물관도 2~3군데 가야 하고, 타워브리지도 봐야 하고, 예쁜 카페도 놓쳐서는 안 되고, 마켓에 파는 빈티지 물건들도 사야 했다. 프림로즈힐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보기 위해 달려간 런던에서 우리는 시간을 아주 밀도 있게 촘촘히 써야 했고 우연히 마주치는 골목의 풍경보단 제일 효율적으로 빨리 갈 수 있는 구글맵의 지도를 따라 다녀야만 했다.


잠들기 전에는 내일의 일정을 짜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만 뭔가 제대로 여행을 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과정에 집중하는 대신 하루에 도장 찍었어야 할 관광지를 다 끝내야 드는 개운한 느낌을 여행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 감정들은 여행 중일 땐 몰랐다. 다녀와서 사진을 보고, 여행에서 얻은 게 뭘까 복기를 하며 글을 끄적이다가 깨달은 여행자, 나의 모습이었다. 복잡하고 반복적인 현실을 벗어나 여유롭고 영감 가득한 런던에서 지내다 오기를 바랐는데 그곳에서도 마치 나는 직장인처럼 계획을 세우고 리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일하듯 돌아다녔다. 물론 좋아하는 서점에서 책도 사고, 런던아이를 타며 음악도 듣고, 유럽의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우리는 여행자의 촉박한 시계를 쉴 새 없이 돌리고 있었다.




느긋함을 느끼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다. 지루한 날들을 벗어나서 새로운 냄새, 장면, 흥분들로 내 마음을 온전히 빼앗기고 싶었던 런던이었는데 여행 메이트 남편은 내가 런던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 해주기 위해 그만의 여행 분위기를 못 즐겼고, 나는 나대로 이제는 못 올 곳이라 생각이 들어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매일 비 오는 날씨는 우리들 마음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스냅사진 촬영도 예약해 놓은 터라 스케줄도 딱 맞게 짜 왔는데 그나마 비가 적게 올 확률의 날씨로 바꾸려니 계획된 모든 동선이 얽히고 또 다른 루트를 짜는 일이 버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내셔널갤러리 앞에서 들리는 버스킹을 구경하며 앉아 있는 것도 여행자로서 갖는 당연한 낭만이었는데 우리는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보려고 그 영화 같은 음악과 장면을 뒤로한 채 버스를 타러 달려갔으니, 그 시간은 지금 내가 제일 안타까워 하는 순간이다.



비바람은 몰아치고, 날은 춥고, 운동화에 양말까지 홀딱 젖어 잠시 숙소에 들른 날. 드라이어로 신발을 말리면서 참 슬프면서도 웃기고, 웃기지만 화나고, 화나는데 이런 게 또 여행인가 싶고.


뭐 그런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여행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날씨에 지지 마세요


시티투어를 해주셨던 가이드님의 이 한마디 말에 여기 와서 커졌던 날씨운에 대한 불평,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 추운 날씨에 대한 원망이 다 풀리고 말았다. 런던은 원래 이런 곳이니까 날씨에 지지 말고 여행을 왔다면 비 온다고 숙소에만 있지 말고 무조건 나오라는 말이었다. 비가 계속 오면 오는 대로 즐기고, 또 비가 오다가 그치면서 해가 높이 날 때도 많으니 개의치 마시라고.


실제로 이 투어를 하기로 한 날에도 엄청난 폭우가 예정되어 있어 만만치 않겠다며 다짐하고 갔는데 의외로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기뻐하며 재밌게 들은 기억이 있다. 20년 동안 런던에서 가이드를 하셨으니 얼마나 많은 날들을 예기치 못한 날씨와 마주해야 하셨을까? 그래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날씨에 지지 말라는 말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 몸으로 얻은 경험에서 나오는 이 말은 찐일 수밖에!


그 뒤로 나는 마음이 좀 풀렸던 것 같다. 비록 여행 마지막날을 앞두었기 때문에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 한 마디가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런던여행은 속상하고 아쉽기만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르게 먹은 이상 그동안 해왔던 우리의 여행 스타일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어쨌든 하고 싶었던 소소한 목록은 다 이루었으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세미나였다고도 볼 수 있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준 남편의 진면목도 확인했으니까 ^^



계획적인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는데 어쩐지 낯선 곳에서 가장 의지했던 건 하루의 계획들이었다. 어디를 가고, 뭘 먹고, 어떻게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루틴이 여행자로서의 우리 마음을 안정적으로 붙잡아 주었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씨는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에피소드를 더해주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알고보니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을 문장도 하나 얻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여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지말자.

날씨든, 신념이든, 철학이든.


안 될 것 같다고 먼저 꼬리 내리지 말고 의기소침해져서 우울한 표정을 짓지 말자고 계속 생각했다.

질 것 같아 주저앉고 싶어도 일단 물러서지 않고 주먹꽉 쥐어 보기로 했다.


지지 않는다는 건 뭘까?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행운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멕시코에 놀러 가서 멕시코 음식이 아니라 한식당을 발견해 들어가 보는 것. 의외의 음식으로 행복을 느꼈다면 지지 않았다.


매일 비 내리는 날들을 원망하지 않고 겪은 일 모든 그대로를 비 내렸던 우스운 장면으로 남겨두는 것. 생각할수록 어이없지만 지그시 미소를 띤다면 지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금만 마음의 시선을 달리해 여유와 유머를 찾았을 때 날씨든, 뭐든에 지지 않고 우리는 다시 또 예기치 못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지 마세요.


당신의

걱정에,

염려에,

상황에.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대신 휴가 내고 1000만 원 유럽여행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