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큼은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복잡하지 않다는 의미는?
몸과 마음이 아픈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작은 사건에 호들갑 떨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극적으로 상상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려면 생각을 많이 덜어내야 했는데
생각이 많은 데다 복잡하기까지 한 이유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너무 많은 아쉬움을 남겨서다.
남편과 아이를 낳지 말자고 이야기했지만 자꾸 임신과 출산한 친구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거나, 내가 좋아서 쓰는 글과 하는 말에 대해 부담 갖지 말자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책 한 권을 오롯이 내볼 수 있을지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는 나는.
가보지 않은 길.
결고 닿지 못할 도착지가 늘 궁금하고 미련이 남는다.
20대, 그리고 30대에는 충분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젊으니 기회가 많고, 가능성도 큰 시간이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궁금해하며 상상해 보는 일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흔이 되고 보니 여전히 작년과 똑같이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는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이제라도 바뀌지 않으면 나는 여든의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동안 살아온 인생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나를 평생 그리워하고 있을 것만 같다.
감정에 푹 절여지는 일이 솔직하고 쿨하다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관계에서의 감정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제일 중요한 진심이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나를 대하는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 무겁고 뜻대로 다루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끼는 요즘인데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지 두통에 시달리거나 체력이 떨어지는 걸 겪고 있다. 즉, 내 뜻대로 감정을 확실하게 다루지 못하면 호르몬이 나를 조정하는 것처럼 몸이 아프고 힘들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갖는 장점 중 하나가 시간이 빚어낸 경험과 연륜으로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근데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내게 벌어지는 인생을 그대로 보지 않고 편견과 선입견, 내 머리에서 벌어지는 뻔한 예측과 예상을 더하는데서 시작했다. 업무의 컴플레인을 다루는 방식, 동료들과 일하는 태도,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 일조차 고깝게 바라보는 편협한 마음은 내 삶을 점점 얇고 흐물거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고 이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매일 반복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런 습관이 몇 년째 유지되면?
감정을 내 의지에 맞게 컨트롤하는 일이 굉장히 힘들어지고, 도리어 감정에 휘둘려 안 좋은 결말을 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인생에 이른다. 즉, 행복하면 이상하고 불행해야 안심이 되는. 그러면서 ‘내가 결국 이렇지 뭐’라고 포기하는 인생이 진짜 나의 삶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위와 같은 패턴이 글로 쓰이면 참 간단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막상 이런 ‘감정의 패턴’을 겪는 사람은 작은 일에 크게 예민하고 짜증이 나면서 화도 나는데 정작 그 화풀이 대상이 눈에 없기 때문에 인생이 안 풀리는 원인을 제대로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불안과 불행한 삶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합리화하며 사는 거다.
나는 몇 년 동안 이 나쁜 생각 패턴을 학습해 왔다.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내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정작 뒤돌아 보니 마음에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냥 흐름에 따라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친구들에게 두루뭉술하게 얘기하거나, 주어진 역할에 맞게 콘셉트를 잡아 누구를 흉내 내는 것으로 감정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몇 년 동안 이런 삶을 반복해 오니 막상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러 버렸다.
모두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기 위해 여러 일을 하면서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누구는 mbti로 몰랐던 모습을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세상을 더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이런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본인에 대해 끝까지 파고드는 시간.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보는 일.
그러기 위해 나는 많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중에 혹시 쓰게 될지도 모르니 이건 갖고 있어야 한다며 여러 물건을 쟁이는 강박증 환자처럼 구는 짓을 그만 멈춰야 한다. 불행이 언제 닥칠지 몰라 일상의 면면을 플랜 A, B, C까지 상상하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한다.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딱히 번쩍이는 해결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불안수집가를 자처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지만 이제라도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내고 있으니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어나지 않은 걱정과 불안이 나를 압도하면,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없다.
당연하다. 내가 선택하는 모든 행위에 자가믿음이 없고, 그걸 해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저평가하기 때문에 자기 말은 못 믿고 남의 말만 신나게 믿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의 모든 결정을 해주길 바라며, 정신적으로 기대는 패턴이 만들어진다. 나 스스로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서 뭔가를 해보기도 하고, 실패하면 극복하려고 노력도 하면서 다양한 변수의 상황을 읽어내는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선택에 기대면 인생이 참 편하다. 그러나 고민하는 시간은 줄지언정 그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잘 안 되었을 경우, 그 사람 탓으로 넘기는 일이 매우 쉽기 때문이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니까.
그렇게 중심 없는 인생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여기에 타인의 인생까지 만만하게 보며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너무도 쉽게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결국 시기와 질투를 친구처럼 여기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참견하고 판단하느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 얘기였다.
sns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극적인 제목으로 도배된 포털사이트의 기사에 손가락이 열심히 클릭하는 동안 내 삶은 헐렁해져 버렸다. 나랑 관련 없는 인테리어 기사를 읽으면 갑자기 우리 집이 가난해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면 여기를 리모델링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린 ‘자존감 잡아먹는 친구 유형‘을 클릭하고서는 가만히 있는 주위 친구들을 따져보기도 하고 ’남자들이 뒤돌아보는 향수 모음’을 읽고 향수 몇 개를 장바구니에 넣어놓는 에너지를 소모한다.
내가 생각이 많은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콘텐츠)를 마구잡이로 소비>하여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보는 휴대폰 속의 세상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점점 나를 약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의 생각은 없고 콘텐츠 생산자의 게시물이 정답일 뿐. 그 내용에 더 깊게 생각하기도 귀찮고, 따져 보기는 더더욱 싫은 콘텐츠 소비 습관이 내 인생을 운용하는 방법에 그대로 녹아든 것이다.
남들 하라는 대로.
그들이 정해준 것처럼.
그래서 내 머릿속은 항상 불안하고 모호했다.
휴대폰 속 대량의 콘텐츠는 나의 일상이 아니다. 그들이 게시하는 모든 글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고,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정답일 수 조차 없다. 조건과 환경이 철저히 다른 데다 내가 앞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제대로 투영되어 있지 않은 클릭수를 유발하는 글일 뿐이므로 애초에 제목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디 세상 사는데 특히 홍보 마케팅이 직업인 사람이 콘텐츠를 등지는 게 말이 되는가. 과잉 정보의 세상에서 상실감, 불안함, 초조함, 예민함의 감정을 범람시키지 않고 적절히 지키는 것.
아주 정말, 많이 어렵다.
그래서 자주 바란다. 내 감정을 흔적 없이 포스트잇처럼 아주 쉽게 붙였다, 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필요한 일에 쓱 감정을 붙여 건강한 에너지로 쓰다가, 이제 끝났다 싶으면 감정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내 일상을 침착하게 이어나가는 것.
부디 내가 가지 않은 길, 선택하지 않은 결정에 대한 미련을 적은 포스트잇을 얼른 떼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길에 충실하는 새로운 메모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