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재취업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회사에서 일을 하니 마음가짐이 새롭습니다. 마치 첫 직장에 들어선 것처럼 어깨엔 긴장이 잔뜩, 우물쭈물 팀 사람들 눈치도 보고요. 어딜 가나 꼭 한 명 씩 있다던 또라이는 아직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어쩌면 저일 수도 있겠네요.
취업을 한 부서는 홍보팀, 그 속에 온라인 마케팅 직원입니다. 전에 했던 기자직을 제외하면 마케팅일을 했었으니 결국 경력을 들이밀고 재취업에 성공한 셈입니다. (정말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와 용기가 부족했어요.) 지금 하는 일은 SNS 채널을 개설하고 그 안에 브랜드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키워드를 잡고 이야기를 만들어 다양한 곳에 알리는 일이 주 업무라 크게 기획을 하거나 돈을 계산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더구나 윗 선배가 저를 케어하는 시스템이어서 정말 '하라는 것만 잘하면 된다'이지요. 물론 시키는 일을 하는 건 쉬워도 '잘'이 힘든 법. 예전에 해보았던 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쉬울 일 없는 마케팅. 작정하고 고객 마음을 끌어당기는 수많은 마케팅 법칙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부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문서 복사와 스캔, 팩스 보내는 스킬을 배워 놓습니다. 어느 회사를 가나 왜 이렇게 복사하기와 팩스 보내는 일은 떨리는지요 ^^;;
선배가 하는 모습을 옆에서 잘 지켜봤다가 혼자 있을 때 몰래 메모를 해놓기도 하고, 제 자리를 넘어 오가는 대화를 유심히 들으며 팀장님과 팀원들의 일을 대충 파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몇 년 짬밥이 있다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융통성 있게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키워가고 있어요.
아침에 출근하면 텀블러를 씻고 물을 담아 자리에 앉아 시계를 봅니다. 약 9시 8분쯤.
음, 예전 같으면 지금 이 시간에 KBS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을 시간이네. 11시가 되면 CBS 라디오를 듣고 있겠군. 오후 2시가 되면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재택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불과 몇 달 사이, 주방 아일랜드에서 작은 파티션 아래로 공간이 바뀌었지만 통장에 꽂힐 월급을 생각하며 버티고 있죠. 때때론 '일이 무엇인가' 따위의 심각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어쩐지 저에겐 그저 돈으로밖에 치환되지 않습니다. 일에서 얻는 즐거움과 성취감은 이미 포기. 잘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나의 일을 찾기보단 주어진 일을 소처럼 묵묵히 할 뿐입니다. 좋아지면 기대를 하고 기대를 하면 집착하게 되는 저의 일 태도에서 벗어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working is just work를 되새겨 봅니다.
그런데 요즘 백종원 아저씨의 뼈 때리는 말을 맞곤 합니다. 요즘 자주 보는 골목식당 프로그램에서 일의 본질을 배우게 된달까요? 비단 골목식당은 자영업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아닐 거예요. 보면 볼수록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뜨끔한 소리가 많이 들리거든요. 특히 한동안 떠들썩했던 홍탁집 아들 편은 저에게 큰 현실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 나는 일머리가 부족하구나'
열심히 한다고 하는 홍탁집 아들의 닭 손질을 보고 백종원 아저씨는 한 마디 하십니다.
"닭 한 마리에 몇 조각 나와유?"
홍탁집 아드님 머리 속도 뻥했겠지만 저도 뻥했어요. "나라면 몇 조각 나오는지 세어 봤을까? 그저 깨끗하게 손질하려고만 하지 않았을까? 내장은 이렇게 떼고, 팔은 저렇게 자르고, 오직 보이는 것만 신경 썼겠지?”
맞습니다. 저도 일머리가 없던 것이었어요. 일상생활을 지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머리지만 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모든 일적인 면에서는 머리가 제대로 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냉장고 검사를 할 때도 한 말씀하시죠.
"통만 정리 잘하면 뭐해요. 그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 에피소드화에서 일이란 저렇게 하는구나를 배웠습니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한다고 했던 것들이 잘못된 방법이었던 것도 알았죠 백종원 아저씨가 뼈 때린 말을 정리하자면.
1. 기본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배워라.
2. 일은 도 닦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3. 숙달과 반복을 무시하지 마라. 그 속에서 장사할 힘이 나온다.
4. 제발 생각 좀 하고 일해라. 검은 봉지에 뭐 있는지 확인하고 닭 자를 때 몇 조각 나오는지 파악해라.
백종원 아저씨가 하는 말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이 '도 닦는 심정'이었어요. 매일 설거지하고, 삶은 닭 손질하고, 냉장고 정리하고, 쓸고 닦고 하는 모든 일이 수행이었어요. 산속에 들어가 가부좌 틀고 가만히 마음을 수행하는 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 상대해가며 뜨거운 불 앞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국자를 젓는 것도 분명 수행일 거예요. 저를 대입해 보자면 열심히 키워드 서칭 해서 워드 파일에 브랜드 이야기를 쓰고 포토샵으로 제작물을 만드는 클릭 하나하나가 도 닦는 일이겠지요. 어제 했던 일이 오늘 일이고, 그 일이 내일도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이게 바로 '일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겉으론 아무리 화려해 보이는 직업이어도 다들 상상하지 못하는 쭈구리 같은 일이 거듭될 수도 있겠지요. 다만 우리는 자신의 일에 갇혀 타인의 위대한 일만 현미경처럼 크게 보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능력에 매번 좌절하게 하고 아무리 해도 절대로 쉬워지지 않는 이 직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어떤 내용이든 한 권 한 권 최대한 꼼꼼하게, 완벽하게 해내는 동안 나도 조금은 변화했다.
나와 내 삶이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때로 망할 것 같아도 일단은 앉아서 버텨 보는 능력이 조금은 발달한 것이다.
아마 지금 신입직원 이었다면 어떻게든 일을 잘 해내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며 현실의 저와 이상의 저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을 겁니다. 타고난 일머리가 없으면 어떻게든 익히고 배우면서 일단은 버텨보는 일이 중요한데 단기간에 프로가 되고 싶었던 나머지 제대로 일 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조금 달라졌어지요. 일머리가 없음을 인정하고 월급 받는 만큼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해보리라. 풀리지 않고 막막해도 일단은 자리에 앉아서 버텨보리라. 직업을 유지하는 힘도 결국은 성실함임을 3년여간의 살림과 백종원 아저씨의 말 한마디 덕분에 다시 깨닫습니다. 세상에 쉬운 것은 없지만 단순하게 쉽게 생각하면 또 잘 해낼 수 있는 게 '일'인 것 같아요.
때론 어깨에 힘 좀 빼고 여유 있게 한다면, 어떨 땐 이 악물고 잘 붙어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기꾼 말고 쉽게 돈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 남의 돈 주워 먹기가 그리 쉬운 가요. 특히 장사처럼 직접적으로 서비스와 화폐를 맞바꾸는 직종은 사람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없으면 더 힘들 것입니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일을 대하는 태도도 수시로 바뀝니다. 이제는 직장보다 직업으로써 가치를 더 키워야 한다고도 하니 본인의 기본기와 도 닦기는 필수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너무 무능하다고 느끼는 날엔 일단 엉덩이 깔고 버텨보는 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수행하다 보면 뭔가 ‘탁’ 얻어지는 게 있지 않겠어요?
단순하면 확실하다
직진하면 차분하다
성실하면 명쾌하다
요즘 제가 일하면서 얻은 태도입니다. 당분간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성실하게 출근 도장을 찍으려고요.
ps. 아... 그런데 내일 월요일, 실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