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벌이를 제대로 하고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하여 하는 일

by 에뜰



한동안 나의 생활이 인스타처럼 네모 안에 가지런히 놓였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프레임 밖은 엉망이어도 그 안에서만큼은 최대한 정갈하고 단정한 무드로 예쁜 도자기 그릇에 올려진 단아한 쌀밥 같은 느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잘 먹고살아요



실은 전혀 아니었다. 밥은 전자레인지로 데워진 햇반이었고, 반찬들도 그닥 영양가 없이 짜고 매운 반찬가게 출신이었다는 거다.


전에도 '요리'는 나와 훌륭한 짝꿍이 되지 못했다. 하루의 긴 시간을 청소와 정리에 쓰고 나면 남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요리책을 봐가며 반찬 하나 만든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눈으로 레시피를 보지 못하면 손으로 음식을 차려 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다행히도 남편이 요리를 좋아한 덕분에 도마에서 오이를 써는 대신 도마를 윤이 나게 오일링 하거나 빈티지한 접시를 사모으는 재미로 부엌을 들락날락거릴 수 있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퇴근하고 돌아와 음악이나 TV를 켜지 않고 바로 부엌으로 가 칼을 들고 양파를 쓰윽 썰었다는 것. 조용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오직 양파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 이상하게도 이 행위가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날의 메뉴는 유일하게 레시피 없이 할 줄 아는 파스타였고, 양파 다음으로 버섯을 썰고 나무 도마에 들리는 탁탁탁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마치 무음도 소리인 것처럼. 수도승이 이렇게 수행을 하는 거였나 마음이 들 정도로 오직 부엌에서만 들리는 이 소리들이 감동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그동안 팟캐스트나 라디오를 틀고 하느라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 고요한 정적이 위로가 됐다.



밥벌이를 오직 돈으로만 생각했다. 돈만 벌어 오면 내 밥그릇은 챙길 줄 아는 어른이 된 것 같았고 모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솔직히 엄마의 밥도 아무렇지 생각했었다. 그냥 돈 주고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걸 왜 저렇게 집밥에 집착하는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의 정적에서 탁탁 재료를 썰고, 지글지글 볶고 접시에 가지런히 내놓으며 이제야 내가 밥벌이를 제대로 했다 싶었다. 진정 밥벌이는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 입에 넣는 일이었고, 음식에 집중했던 정성스러웠던 그 날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나를 위한 정직한 시간'이었다.


겉에 치중하는 삶을 내려놓고 기본에 다가가고 싶다면 '내 밥'을 차리는 것만큼 정직한 게 없다. 갓 뜸 들인 밥을 휘저으며 이것들이 내 입속으로 바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식은 거짓 없는 순수 그 자체였으니까. 귀찮은 마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먹는 것들이 결국은 내 몸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먹는 일을 결코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보다 자주 집밥을 해 먹게 되었느냐고? 상황상 기가 막히게도 무급휴가가 생겼고, 또 기가 막히게도 나물이 나오는 봄이고 해서 도마를 쓰는 일이 여러 번 더 있었더랬다. 냉이도 다듬고, 방풍나물 냄새도 처음 맡아보고, 씀바귀는 써서 남편의 차지가 되어 버렸지만 부추를 숭덩숭덩 써는 손의 감각과 자글자글 기름 위에 퍼지는 전 부치는 소리가 집안에 가득 찰 때 밥 벌어먹고 사는 일에 저절로 공손해졌다.


예전에는 블루베리 잼을 만든다며 조마조마하게 불 세기를 조절해 가면서 작은 기쁨을 맛보았던 것도 같은데 어느새 잊고 살았다. 뭐가 그리 바쁘고 여유가 없었는지 자꾸 제일 중요한 먹는 일을 소홀히 했다. 한 끼를 먹기보단 때우기에 가까웠던 최근의 내 삶이 자꾸만 허기지고 빈약한 이유였다.


내 손에 쥐는 자연



더 들여다보니 내 인생은 꽤나 자연과 동떨어진 하루들로 채워졌다. 매일 내 손에 쥐어지는 건 마우스나 키보드, 휴대폰 따위의 딱딱하고 정 없는 것들이었고 실제가 없는 온라인 세계를 휘젓고 다니느라 눈과 마음이 바빴다. 지하철 창밖의 하늘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요즘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지 뭘로 알았던가 생각해 보니 ‘유일하게 자연을 내 손바닥에 얹는 부엌’에서였다. 단단한 감자를 한 손에 쥐고 쓰윽 껍질을 깔 때, 주황빛 당근을 힘차게 칼로 자를 때가 자연과 내가 만나는 접촉의 시간이었다. 아마 올해 봄나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중하고 찬란한 봄을 눈으로만 보냈을 거다. 그러나 이번 나의 봄은 분명 내 손에 쥐어진 싱그러운 계절이었다.


그동안 시각에 의존해 살았던 빈약한 날들을 오감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요리였다. 된장 냄새를 맡고(후각), 각기 다른 초록색 나물을 보고(시각), 두부의 물렁함을 느끼고(촉각), 시금치가 도마 위에 썰리는 소리까지(청각). 재료에 담긴 자연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 몸으로 습득하는 경험이었다.



며칠 전에 본 삼시세끼 새 시즌은 '역시 다른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참 쉬워’ 보였다. 심지어 빗 속의 뜨끈한 수제비와 직접 캔 전복으로 된장찌개를 먹는 모습은 힐링되기까지 했는데 그런 아름다운 장면에서 '점심은 뭐 먹지'란 고민이 우습지만서도 고개가 끄덕여진건 이젠 나의 밥벌이를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내 손으로 거둔 생명을 요리해 차린 밥상. 이 밥상을 먹으면서 언젠가부터 내가 든든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스스로가 소중한 느낌이 든다.

그토록 막막하고 공허했던 삶이 어쩌면 아무렇게나 먹은 밥과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밥 먹기를 그리 허술히 하면서 삶이 풍성하길 바랐다니.


<책, 밥하는 시간>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창조고 다른 의미에선 탄생이다. 고유의 재료가 음식이 되고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생명력을 늘려가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건 생명뿐 아니라 자연을 감탄하는 마음이 긍정적인 태도로서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확실히 생명을 연장시키는 음식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을 줄 안다는 자긍심은 자존감으로 연결되고 나를 지켜줄 든든한 무언가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믿음이 진정한 ‘밥벌이’의 의미가 아닐까.


계절에 담긴 음식의 정서



이제 겨우 시작한 나의 다짐이다. 방해되는 소리 없이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나의 밥벌이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앞으로 보낼 정직한 시간에 기대감이 큰 이유는 여름의 식탁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아삭이 고추를 된장에 무쳐 먹는 그 맛을 알고 시원한 냉면에 쫑쫑 썰어 먹는 오이의 시원한 맛이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담긴 음식의 정서'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할 일만 남았다.

새로운 계획은 ‘밥’에 집중해 보자 하여 작은 가마솥을 사서 밥을 지어 보기로 했다. 전기밥솥보다 조금 더 귀찮음과 실패가 예상되는 도전이지만 나를 존중해보겠단 마음을 담았기에 무척 기다려진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큼해지는 가마솥밥처럼 나의 밥벌이도 좋아질까.



오늘도 고요함을 찾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때맞춰 비가 내리니 창문도 활짝 열어 두고,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 시원한 물에 담가 씻는다. 잠시 음악을 틀까도 싶었지만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조용히 들여다본다. 김이 올라오면 불을 줄여 뜸을 들이는 시간이 초조해도 이 고요한 정적이 결코 싫지 않다. 콩나물 솥밥을 밥그릇에 담고 미리 만들어 둔 양념장을 비벼 먹는다. 아삭한 소리가 살짝 촉촉한 공기를 타고 내려와 귓가에 들리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연이 선사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으니 나쁘지 않은 한 끼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