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 어디예요?"
전에 살던 동네는 1기 신도시가 만들어진 뒤 생긴 아파트 숲이었다. 그래서 마트나 병원 같은 대부분의 인프라가 도보 거리에 있었고 길도 넓고 곧았다. 교통도 좋은 편이라 좀 멀어도 출퇴근도 할 만했고. 하지만 마트에서만 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깔끔하고 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생활 물가가 비싼 편이긴 했다.
이사를 결심하고 돌아본 곳들은 모두 오래된 동네들이었다. 집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도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에 어느 동네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도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부동산 약속을 잡기 전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골목을 걸어 보고 주변 인프라나 동네 분위기를 보았다.
완벽한 동네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사실 이 쪽의 분위기는 내가 살던 계획도시와는 많이 달랐다. 차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길과 끝도 없는 계단, 띄엄띄엄 있는 편의점, 그리고 누가 봐도 낡은 건물들까지.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겠다고 결심했는데 어쩜 더 시골로 가는 기분이지? 눈앞의 풍경이 내 잔고에 대한 지표처럼 느껴져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렇게 다니다 우연히 내 눈에 띈 게 시장이었다. 시장이 바로 근처에 있는 동네를 보게 된 것이다. 김을 폴폴 내뿜으며 쪄지는 만두나 호빵 같은 것들을 보니 군침이 싹 돌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시장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들이를 갔다가 풍족한 먹거리에 눈이 돌아갔던 기억이 났다. 눈앞에 보이는 가성비 훌륭한 메뉴판이 붙어 있는 식당이나 좌판 가득 놓인 채소와 과일들이 싱그러움을 내뿜는 것 같았다.
나는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지런한 엄마 덕에 철마다 나물과 과일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자랐다. 그때야 그 맛의 진가를 모르고 엄마가 나에게 할당해 준 몫을 허겁지겁 해치우기 바빴던 것 같은데, 어느덧 그 아이는 커서 제철재료에 환장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전에 살던 동네에선 하나로마트를 밥먹듯이 드나들었고 본가에 내려갈 때면 엄마가 캐다 놓은 나물을 거절하지 않고 죄다 챙겨 온다. 어릴 땐 안 가져가더니 이젠 다 털어간다며 엄마도 흐뭇하게 세월을 체감한다. 심지어는 최근에 구글에 생긴 인스타그램 계정 검색에서도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소개한다고 요약해 줄 정도(나에겐 혼밥 요리들을 올리는 부계정이 하나 있다.) 구글이 인정한 제철코어 라이프.
그래서 시장 근처에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여행을 가도 시장을 둘러보길 좋아하고 '나 혼자 산다'같은 예능을 볼 때도 시장 에피소드는 잘 챙겨보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운명이 아닐까? 시장을 보게 된 순간, 꿈꿔왔던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내 심장은 뛰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니는 동네마다 부동산에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는지 체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처음 시장을 발견했던 그 동네로 이사를 하진 않았지만, 집을 보러 다니다 보니 서울 안에는 놀랍도록 시장이 많았다. 아는 시장이라곤 망원시장이나 광장시장, 남대문시장 정도가 전부였는데 알고 보니 이 쪽 지역은 동네마다 크고 작은 시장이 있는 듯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바로 집 앞에 시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도보 2~30분 거리 안에 시장이 3개나 있다.
이사를 마친 뒤 집을 정리하고 비로소 새 부엌에서 밥을 해 먹을 만큼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근처 시장을 찾았다.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온 아이처럼 왠지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사람 냄새와 먹거리가 가득한 시장은 활기찼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다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구를 걱정하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왕대추 상자 위에 놓인 과잉숙성 아보카도의 모습이 왠지 그럴듯해 보여 귀엽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마트와는 차원이 다르게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채소가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시장에선 봄이 되니까 산딸기 같은 것도 판다. 정육점에선 고기를 조금만, 막 200g만 사겠다고 해도 뭐라고 하시기는커녕, 무슨 요리를 하러 사는 건지 물으시곤 맛있게 해 먹을 수 있는 부분을 골라 썰어 내어 주신다.
가격은 얼마나 착한 지. 맛있어 보이는 간식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지. 장보기 리스트를 적어 가지만 매번 계획보다 더 많이 사게 되는 마법. 내 최애 시장 간식은 가마솥에서 튀겨 만드시는 찹쌀 도넛이다. 팥 앙금이 가득 든 걸로. 족발에 만두에 닭똥집 튀김까지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하루에 고작 3끼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내 소화기관이 원망스럽다.
한 번은 인상이 좋아 보이는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산 적이 있다. 이게 싼 게 맞나, 의심하고 있을 무렵 적힌 가격보다 싸게, 8개에 만 원에 주시겠다는 말에 또 한 번 심장을 공격당했다. 맛있는 걸로 골라달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하나 손으로 닦아 봉투에 담아 주셨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이 시장에 장을 보러 온 게 기특했는지 연신 "아이 예쁘다."라고 하셨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역시 할머니들 눈이 가장 자비롭다. 혹시라도 오래된 걸 받아온 건 아닌가 걱정도 했는데, 집에 와서 먹어 보니 달고 상큼하고 아삭했다. 가을에 사과 철이 오면 또 한 번 찾아뵈어야지(아쉽게도 자주 찾아뵙기에는 파는 과일 종류가 많지 않았다.)
또 어느 봄날엔 쑥을 찾아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쑥 철이 끝나가던 시기라 파는 곳이 없었다. 딱 한 가게에만 쑥이 남아 있었는데, 상자 중간중간 누레진 잎이 보여서 잠시 주저하다가 뭐 다른 가게가 없으니 그냥 가서 상태 좋은 것들로 골라서 담아 달라고 말씀을 드렸더랬다. 사장님은 흔쾌히 한 바구니 가격에 남은 쑥 한 상자를 전부 주시겠다고 했다. 대신 직접 골라서 먹으라고.
쑥은 큰 봉투 하나 가득 꾹꾹 눌러 담겼다. 가격은 삼천 원. 나는 감동하며 봉투를 받아 들고 돌아와 집에서 열심히 다듬었다. 유튜브 좀 보며 하다 보니 금세 쑥 다듬는 일은 끝났고, 쟁반에 담긴 상태 좋은 쑥은 한 바구니 양을 훌쩍 넘겼다. 와, 오늘도 시장에 대한 애정이 상승한다. 사장님께도 재고처리가 되었으니 아마 윈윈이었겠지? 하여튼 그렇게 다듬은 쑥은 다음날 잘 씻고 쌀가루랑 꿀을 넣어 곧장 쑥 버무리를 만들어 아침으로 먹었다. 향긋한 봄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당연히 그러고도 쑥이 남아 국도 끓여 먹고 전도 부쳐가며 실컷 먹었다. 나에겐 이게 워터밤이고 페스티벌이야.
다가오는 가을은 대하랑 꽃게가 제철이다. 아, 전어도 있지. 아직 생선가게를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기회인 것 같다. 지나가며 눈여겨보니 회도 썰어서 저렴하게 파시고 생선도 구워 두신다. 가을에는 여길 한 번 가봐야겠다. 생선 말고도 이제 포도랑 사과도 나올 거고. 아마 내가 또 사 먹어보지 못한 다른 과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슬슬 직접 말린 시래기도 나오지 않을까?
이젠 어느덧 자주 가는 시장도 생겼다. 내 입맛에 맞는 김치를 파는 곳도 알게 됐고 쿠폰을 모으기 시작한 정육점도 생겼다. 하나씩 맛보고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직 사장님들이 알아보실 만큼 단골은 아니지만, 내적 친밀감을 키우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집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비로소 이 동네에 닻을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에 내가 아는 곳이 생기는 기분이 꽤 좋다. 근데 과일가게는 아직 더 탐색이 필요하다.
#뚝딱대는구옥살이